[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광복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불어닥친 제주도민의 항쟁은 일제강점기의 고난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일제를 벗어나 독립은 되었으나 미군정과 한국내 이념갈등 속에 무고한 제주도민들은 한국의 군인과 경찰들에 의하여 붉은빛으로 덧칠되었고, 지금도 그 희생자 수를 정확히 모른채 제주도 곳곳에서 하나씩 둘씩 계속 발견되고 있고, 그 흔적은 제주민들에 의하여 기념되어지고 있다. 오늘 올린 4.3의 자취는 산속으로 숨었던 주민들이 혹한의 겨울을 견디다가, "귀순하면 살려준다"는 군경 토벌대의 말에 얼어죽느니 살고자 귀순하였으나, 귀순한 뒤에는 붙잡혀 용공혐의로 고문을 받다가 육지 형무소로 끌려가기 위하여 제주항에서 배를 타러 끌려가는 모습을 형상화 한 조각상이다. 이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예비검속자로 집단 수용되었다가 행방을 모른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어디로 끌려가서 죽었는지 모르는 상태며 그 전모조차 밝혀지지 않아 안타깝다. 제주는 아름다운 풍광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바로 앞세대 사람들은 좌우 이념의 극한 상황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이념의 굴레를 뒤집어쓴채 고단한 삶을 살았던 피맺힌 원혼들의 한국 현대사 최대 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코로나 19로 인하여 정상적인 활동은 하지 못하지만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삶의 현장은 계속되고 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사람은 각자 해야할 일들을 스스로 찾아서 열심히 살고 있기에 인간세상은 지속될 수 있는 것이고, 사람은 그런 환경에서도 이룩한 것들에서 보다 더 뜻 깊은 삶의 의미도 알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한국문화 속에 깊숙이 뿌리내린 불교사찰의 일부분으로 그 의미가 남다른 '사찰의 다리'를 주제로한 사진전을 소개한다. 현재 한국에서 불교를 주제로 사진활동하는 단체가 여럿 있다. 그 중에 심상(心像)이란 모임이 있다. 이 단체는 해마다 전시회를 하였는데, 올해로 32회째 사진전을 개최한다. 매년 회원들의 의견을 모아 불교안에서 특별한 주제를 택하여 작품을 만들고, 이를 모아서 매년 전시회를 열어 왔는데, 올해의 주제는 사찰의 주변에 있는 다리를 주제로 정하여 작품을 만들었다. 한국의 사찰은 대부분 깊은 산속 아름다운 자연속 품에 안긴 듯 포근한 모습의 전각들로 이루어지는데, 이런 절 주변에는 산도 있고 계곡이 있고, 연못이 있어, 사찰의 본당인 전각에 이르기 까지는 많은 다리들이 있는데, 계곡을 건널 때 마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서쪽해안에서 남으로 길쭉하게 뻗은 태안반도의 시작점인 태안읍 백화산 중턱에는 태을암으로 불리는 천년고찰이 있다. 태을암의 절 이름은 본래 한민족의 조상으로 여기는 단군의 영정을 모셨던 전각인 태일전(太一殿)에서 유래한다고 하지만 현재는 단군을 모셨던 태일전은 없어지고 그 터만 남아있다. 현재 태을암의 중심건물은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이며 대웅전 가운데는 석가여래 그리고 좌우에는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모셨다. 관세음보살은 현재 사람들의 고통과 소원을 들어주기 위하여 모셨고, 지장보살은 부모형제 등 조상들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모셨다. 예전에 있었던 태일전은 터만 남았다고 했는데 태일전에 모셨던 단군은 최근 대웅전의 아랫쪽 언덕에 지은 산신각의 중심에 새롭게 모셨다. 산신각에는 다른 절의 경우라면, 가운데에는 북극성을 뜻하는 치성광여래(모든 별들은 움직이지 않는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믿었던 옛 사람들은, 북극성을 별들의 왕으로 생각하여 별들의 중심으로 여겼다)와 하늘의 4방위를 뜻하는 하늘신을 그리고 있으나, 이곳 태을암에는 치성광여래 대신 단군이 가운데 모셔져 있고 단군의 뒤에는 도교에서 모시는 신들이 있다. 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서해안으로 길쭉한 반도가 돌출한 곳에 있는 태안은 오랜 옛날 부터 중국으로 오고가는 뱃길이 있었다. 이에 뱃길을 따라서 많은 문물이 오고갔을 것인데, 바닷길은 언제나 목숨을 걸고 다닐 수밖에 없는 위험이 따르는 것으로, 사람이 오가는 길목에는 안전을 기원하기 위한 절들이 많이 있었다. 태안반도에서 바다가 멀지 않은 태안읍내 백화산 자락에는 아담한 절 흥주사(興住寺)가 있는데, 흥주사에는 고려시대 초기에 심은 것으로 수령 900여년으로 추정되는 큰 은행나무가 있다. 이 은행나무와 관련된 전설이 있는데, 옛날 고려시대에 먼길을 가던 노승이 이곳에 이르러 잠시 쉬는 동안 피곤함에 지쳐 깜박 졸았다. 꿈속에 하얀 산신령이 나타나 이곳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펼칠 곳이니, 노승의 지팡이를 가리키며 이곳에 표시하라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깜짝놀란 노승은 꿈이 너무도 생생하여 산신령이 가리킨 지팡이를 그곳에 꽂아두고 정성으로 기도를 하였더니 신기하게도 지팡이에서 잎이 피어나는 것이었다. 노승은 더욱 열심히 기도하였더니, 처음에 꿈에 나타났던 산신령이 다시 나타나 말하기를 이 나무는 신령스런 나무로, 자식없는 자가 기도하면 자식을 얻게 되고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고양시 원당동에는 한양의 서쪽에 3기의 왕릉이 있다고 하여 서삼릉(西三陵)이라 이름 붙인 왕릉들이 있다. 참고로 옛날에는 한양을 중심으로 어느 방향에 몇 기의 왕릉이 모여 있으면 방위에 왕릉의 기수를 붙여서 불렀다. 예를 들면 가장 많은 왕릉이 모여있는 구리시에는 9기의 왕릉이 모여 있어서 '동구릉'(東九陵)이라 불렀고, 서쪽으로 5기가 모여있는 고양시에는 '서오릉'(西五陵)이라 불렀으며, 서오릉과는 좀 떨어진 곳에 3기의 왕릉이 있어 이곳은 '서삼릉'이라 부르는 식이다. 왕릉이 2기 있는 경우에는 2기 능의 이름을 따서 불렀다, 여를 들면 강남구에 있는 2기의 왕릉은 선릉과 정릉을 합하여 '선정릉' 이라 부르며, 서초구에 있는 2기의 왕릉은 헌릉과 인릉을 합해서 '헌인릉' 이라고 부르른다. 오늘 탐방해 본 고양시 원당동 서삼릉에는 먼저 중종의 계비였던 장경왕후 윤씨의 '희릉' (禧陵)과 중종의 '정릉'(靖陵)이 있었으나, 중종의 정릉은 후일 강남구 삼성동 선정릉으로 이전하였고, 이어서 중종의 아들이었던 인종과 비 인성왕후 박씨의 합장묘인 '효릉'이 세워졌다. 그리고 조선 후기 강화도령이던 철종과 비 철인왕후 김씨의 '예릉'이 세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어석리 마을에는 제법 큰 규모의 고려시대 미륵불이 있다. 어석리 마을 초입, 두 주택의 담장 사이에 서있는 돌미륵은 높이가 4.3m에 이른다. 미륵불은 자세히 보면 무릎 윗부분과 무릎 아랫부분이 서로 다른 돌로 이루어져 있다. 미륵불의 얼굴 모습은 머리 중앙이 솟아난 육계가 표현되었고, 그 위에는 팔각형의 보계(모자)를 쓰고 있어, 비가 와도 미륵불의 얼굴은 젖지 않게 하였다. 입을 꼭 다문 모습이 특이하다. 얼굴모습은 사실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하기 보다는 불경에 나오는 부처님 형상의 기준(32상 80종호)에 따르고 있다. 불상의 이마에 백호, 긴 귀, 목부분의 3주름, 등은 그런 기준에 따라 표현한 것이다. 몸에는 옷의 주름이 통견(긴 헝겊을 몸에 두른 모습으로 앞에 U자형의 옷주름)으로 표현하였으며, 수인(손모습)은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인 시무외인(두려워 하지 말라)과 여원인(소원을 들어준다)을 하고 있다. 하지만 손의 모습은 사실적인 표현이라기 보다는 천진난만한 모습이다. 미륵불의 발은 땅에 묻힌 발 아래에 연꽃의 대좌를 그린 위에 발가락의 모습을 새겼으며, 옷주름은 발목 아래까지 늘어지게 표현하였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세한도는 조선 후기 선비, 금석학자, 문인화가, 서예가로 조선 학자들의 품격을 중국에까지 알렸던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인생의 후반기(1844년, 59살)에 제주도로 귀양가 어렵게 살던 때 그의 제자인 이상적(1804~1865)에게 그려준 한 폭의 수묵화다. 수묵화는 채색(물감)을 전혀 쓰지 않고, 오로지 붓에 먹물로 그린 것으로 사람의 마음을 담은 그림이다. 세한도의 그림에는 초라한 초가집 한 채가 고목이 된 나무 몇 그루 사이에 있고, 고목들은 비록 비틀리고 가지가 꺾이기도 하였지만, 초연한 듯 꽂꽂하게 서있다. 주변은 다른 잡다한 나무 한그루 없는 을씨년스러운 광야같은 곳임에도, 초가 주변의 소나무는 거칠지만 기개가 꺾이지 않은 채, 푸르른 잎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선비의 모습이다. 여기서 세한(歲寒)이란 「한겨울에도 변치 않는 푸르름」을 뜻한다. 이 그림은 평생 학문을 좋아하던 추사에게 통역관으로 중국을 자주 드나들던 이상적(당시 중인 통역관)이 스승인 김정희를 위하여 조선에서는 구할 수 없는 귀한 책들을 중국에서 수소문으로 구하여 보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여 그려준 그림이다. 세한도라는 이름은 논어에 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절은 불교가 들어온 2,000년 전 이래 본래 한국문화와 교류하면서 정착하여 전국토에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한국의 절은 인도에서 시작된 외래사상과 문화에 그친 것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종교적으로 한국인의 마음을 불교화 하였으며, 고유사상과도 습합하였다. 이에 따라 이땅에서 이루어진 건축, 조각, 회화, 문학, 역사, 서적 등에 이르는 모든 문화의 정수로 발전하여 인간이 가꾸고 이어받야할 보편적 가치를 정립하였고, 긍국적으로 부처가 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선한 행위에는 선한 결과가 맺히며, 악한 행동을 한다면 결국 나쁜 결과가 온다는, 인과응보의 사상을 갖게되었다. 불교는 이렇게 도덕과 윤리의 근본을 이루는 한국인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불교문화가 나무와 흙으로 이루어진 것들이어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방화로 인한 피해에 매우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서 무참히 파괴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한국인의 내면에 쌓여온 결과 불교가 탄압받아온 오랜세월을 거치면서, 한국인의 마음이 완전히 꺼져버린 듯 하다가도 훌륭한 선각자와 선승, 학승이 나타나면 역사적 훌륭한 스님들의 뒤를 이어서 또 다시 꽃피우는 전통이 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안성시 삼죽면 기솔리에는 국사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다. 절의 유래는 확실히 전하지 않고 있지만, 절이 있는 산이 국사봉(해발440m)에 이르고 있어 이 산의 이름을 따서 옛 절터에 절을 짓고 절의 이름을 정하였다고 주지 스님은 전한다. 국사암을 오르자면 기솔리 좁은 마을길을 따라 들어가 산기슭으로 부터 1km 가파른 산길로 더 올라가야 되는데, 암자 아래 마련해 놓은 주차장에서 약150m에서 부터는 더 가파른 길이다. 차를 세우고 150m를 오르는 것 만으로도 등줄기에 땀이 흠뻑 나올만큼 힘이 든다. 암자에 오르고 나면 힘들었던 만큼 산아래 펼쳐진 풍광이 매우 좋았다. 국사암에는 삼존석불이 있는데 석불의 이름은 "궁예미륵"으로 불리고 있다. 석불의 조성은 후삼국시대의 궁예가 조성했다면 매우 오래된 것으로 생각되나 그 연대는 확인 되고 있지 않다. 한국의 역사에서 곳곳에 미륵불 신앙이 활발하던 때는 사회가 혼란스럽고 전쟁에 휘말리던 때 였는데, 그 중에서도 후삼국시대의 혼란기가 미륵불신앙이 가장 활발했던 때로 짐작된다. 국사암의 삼존불은 가운데 있는 부처가 크고 높으며 양쪽 협시불은 약간 작다. 불상은 모두 발목아래가 땅에 묻혀있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전남 구례군 문척면 죽마리에는 섬진강을 굽어보는 해발 500m 높이의 바위산이 있다. 바위산의 이름은 오산(鰲山=자라산)이라고 하는데 모습이 자라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오산은 제법 큰 산으로 산 정상에 오르기 전, 가파른 8부능선의 비좁은 땅에 사성암(四聖庵)이 있는데 섬진강이 굽어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다. 사성암은 역사가 매우 오래된 암자로 그 연원은 백제 성왕 22년(544)에 인도에서 온 고승 연기조사가 처음 개창하였다고 한다. 연기조사는 지리산 근처에 많은 절들을 개창하였는데, 구례 화엄사 또한 그가 창건한 절이다. 처음 절의 이름은 오산암(자라산의 암자)이었으나 이곳에 한국 불교사의 최고 고승으로 손꼽히는 네분의 스님들이 수도하였다고 하여 사성암(四聖庵)이라 고쳐부르게 되었다. 사성암에서 수도하였던 한국의 고승은 원효대사, 의상대사 , 도선국사, 진각국사다. 사성암 주변에는 12비경이라는 명소가 전하는데 진각국사가 참선했다는 좌선대, 우선대를 비롯하여 섬진강과 지리산을 살필 수 있는 절경과 해질녘에 노을이 아름다운 낙조대 등이 있다. 무엇보다 절벽을 활용하여 높이 세운 기둥 위에 전각을 지은 것이 더 큰 비경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