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정석현 기자] 세상에서 가장 힘든 질병은 무엇일까? 질병마다 힘들고 어렵겠지만 물이나 음식을 삼키지 못하는 질병만큼 고통스러운 것도 없으리라.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것이 물이요, 음식일진대 말이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질병인 ‘삼킴곤란(연하장애)’이라는 병에 걸려 완치까지의 병상일지 《삼킴곤란(연하장애), 나는 이렇게 극복했다》를 쓴 저자 김영조 씨는 이 책의 집필 동기를 “그동안 이와 관련한 책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본 책을 베끼거나 의학용어를 남발하는 수준이어서 실제 환자인 나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삼키지 못하는 절망'에서 ’삼키는 기쁨‘의 과정을 적은 이 경험담이 삼킴곤란 환우들에게 작은 희망이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뜻에서 이 책을 썼다.”라고 했다. 저자가 책에서 "주치의가 삼킴곤란의 예후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주지 않았다. 그 이유를 추정컨대 환자에게 잘못 말했다가는 추궁을 당할 소지가 있기 때문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환자의 처지에서는 자신이 앓고 있는 병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절실했다. 그래서 저자는 병실에서 하루하루의 기록을 써가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책이 《삼킴곤란(연하장애),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이 이야기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우리의 할머니 세대가 ‘가장 예뻤을 소녀시절’에 일제강점기와 6·25 한국전쟁을 겪었던 생생한 기록입니다. 열두 분의 할머니와 한 분의 할아버지 증언을 바탕으로 그 당시 청소년들이 경험했던 삶의 단면을 남기고자 했습니다. 이 아카이브는 개인의 기억을 넘어서 우리 민족 공동체가 공유해야 할 소중한 역사적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 엮은이 말- 일제강점기와 6·25 한국전쟁을 겪었던 할머니들의 생생한 구술 자료인《내가 가장 예뻤을 때》(도서출판 얼레빗)가 지난 6월 25일 출간되었다. “나는 1927년생 퇴끼띠고 98살이야. 퇴끼띠가 새벽에 났기 때문에 어디 가면 먹을 게 많이 생기는 거야.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났고, 부모님은 농사지으셨어. 7살 먹어 어머니 재혼 가고, 12살 먹어 아버지 돌아가서 부모 사랑을 모르고 자랐지.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일제시대에 지집아(기집애) 공출 보낼 적에 일본에 안 붙잡혀 가게 할라고 우리 고모, 고모부가 시집을 새벽에 보냈어. 너무 일찍 보냈다고. 공출 안 갈라고 내가 15살 10월에 시집을 왔다고. 형제는 나 하나, 외동딸이야.” -정선 출신 김옥련 할머니-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이황과 이이. 이름도 비슷한 두 사람은 조선 중기 비슷한 시기에 살면서 조선의 사상사를 한 단계 발전시킨 거목들이다. 지금도 천 원권과 오 천원권 지폐의 주인공으로 왠지 모를 친근함을 주지만, 두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고 어떤 길을 걸었는지 견줘서 살펴본 일은 드물 것이다. 이황과 이이는 관직에 나아가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경세가이기도 했지만, 조선 지성계를 주름잡는 학자이기도 했다. 특히 이황은 분주한 관료 생활보다 오늘날의 대학 총장과 흡사하게 후학을 양성하는 교육자의 역할을 더 만족스러워했던 것 같다. 조남호가 쓴 이 책, 《이황 & 이이, 조선의 정신을 세우다》는 비슷한 듯 다른 두 사상가의 모습을 견줘 보여주는 책이다. 둘은 ‘리(理)’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을 하며 사상적으로 대결하기도 했지만,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임금의 공부를 힘껏 돕기도 했다. 이황은 1501년에 태어나 1570년에 7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이이는 1536년에 태어나 1584년에 49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이황의 사상적 스승은 중국 송나라 시대 학자인 주희였다. 주희를 평생 흠모했던 이황은 주희의 문집인 《주희대전》을 들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얼굴 좋은 것이 (相好) 몸 좋은 것만 못하고 (不如身好) 몸 좋은 것이 (身好)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不如心好) 마음 좋은 사람, 호심인(好心人). 마음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여러 가지 정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김구 선생은 이렇게 생각했다. 무슨 일을 할 때든, 그 일이 ‘곧고 옳은 일인지 잘 판단하고, 실천하며, 또 그 일을 꾸준히 계속하는 사람’. 말은 쉬워도 지키기는 어려운 법.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란 참 어렵다. 이 책, 현상선의 《나의 소원》은 백범김구기념관에서 펴낸 그림책이다. 김구가 평생토록 추구한 가치, ‘마음 좋은 사람’에 초점을 맞추어 어릴 때의 일화를 풀어낸다. 메시지가 단순한 것 같아도 독자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게 한다. 이야기는 ‘창암’이 겪은 일에서 시작한다. 창암은 김구의 어릴 적 이름이다. 창암의 집안은 상민이었다. 그가 살던 해주의 양반들은 뿌리 깊은 선민의식이 배어있어서인지, 상민을 무시하고 천대했다. 창암의 할아버지가 양반들이 쓰는 갓을 쓰자 옆 마을 양반들이 갓을 뺏어 찢어놓기도 했다. 신분의식이 비교적 희미해진 구한말이었는데도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지은이, 그리고 제4대 국립중앙박물관장. 세간에 알려진 최순우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이다. 오늘날 최순우, 라는 이름 석 자는 우리 박물관 역사에 깊숙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굵직한 이력 몇 줄로 쉽사리 설명되지 않는다. 한국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알리는 데 온 힘을 기울인 세월이 그만큼 무겁고 두터운 까닭이다. 그래서 이혜숙이 쓴 이 책,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의 아름다움을 전한 혜곡 최순우》는 더욱 반갑다. 책에 실린 최순우의 박물관 외길 인생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인생을 건 한 사람의 열정과 그 열정이 빚어낸 열매에 잔잔한 감동을 하게 된다. 그와 문화유산과의 인연은 송도고보 5학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개성에 살던 그는 송도고보 5학년 여름방학 때,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빼어난 감식안으로 이름난 우현 고유섭을 만나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는다. 고유섭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겨레 문화를 알리고 긍지를 심어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우쳐 주었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문학청년이었던 최순우에게 이런 격려는 천군만마와 같았다.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스승의 날 지나 고교동기 선종이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춘천에 사시는 권오길 선생님께 갔다 오자고요. 그렇지 않아도 선생님께 스승의 날 감사 전화를 드리면서 한 번 찾아뵙겠다고 하였는데, 선종이 덕분에 빨리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림성심대학교 총장으로 있는 영식이에게도 연락하여 5월 23일 같이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제가 글 제목을 《기생일까? 공생일까?》라고 하고는 선생님 이야기를 하니 좀 이상하지요? 이날 선생님께서 주신 책 제목이 《기생일까? 공생일까?》입니다. 생물수필 1세대이신 선생님은 그동안에도 수많은 수필을 쓰셨는데, 이번에 책으로 나온 것은 《기생일까? 공생일까?》이군요. 선생님은 그동안 50여 권의 책을 쓰셨으니, 참 대단하시지요? 선생님은 단순한 생물수필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에서 우리 토박이말을 많이 쓰셔서 ‘과학계의 김유정’이라고도 불리십니다. 자연에 있는 ‘기생’, ‘공생’에 대해서는 학교에서 배웠기 때문에 친숙한 개념입니다. 그래서 복습한다는 기분으로 책을 펼쳤는데, 그동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기생, 공생관계에서도 잘 모르는 것이 많네요. 그뿐만 아니라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던 기생, 공생관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206)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였고 나라를 내 집처럼 근심하였네 해가 아랫세상을 굽어보니 붉은 충정을 밝게밝게 비추어 주리 조광조가 사약을 마시기 전 남긴 절명시(絶命詩)다. 조광조의 죽음을 알자, 머리를 풀고 통곡하는 선비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조광조는 중종 재위 당시 조정에 출사하여 중종의 무한 신임을 받고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다가, 중종이 마음을 바꿔 갑자기 제거된 인물이다. 그의 행적을 두고 ‘정말 아까운 인물’이라는 평과 ‘지나치게 급진적이어서 적이 많았던 인물’이라는 평이 공존한다. 둘 다 맞는 말이다. 개혁을 부르짖는 ‘젊은 피’였으나, 10년에 한 번 추진하기도 어려운 개혁들을 3~4년 안에 완수하려는 조급증이 화를 불렀다. 신송민이 쓴 이 책, 《조광조》는 역사학자 33인이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꼭 알아야 할 역사인물 60인을 골라 펴낸 ‘인물 이야기’ 가운데 20번째 책이다. 조광조는 중종 시대를 다룬 사극이나 한국 역사에 남을 선비를 다룰 때 빠지지 않을 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다. 조정에 화려하게 출사한 유림의 기대주였던 조광조는 명문대가 출신으로 짐작하기 쉽지만, 생각보다 증조부나 조부, 아버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진회보다 더한 간신’, ‘강상윤리를 내팽개친 원흉’ - 조선시대 이런 악평을 들어야 했던 인물이 누구일까요? 짐작하시겠지만 최명길 선생입니다. 최명길은 청나라의 침입으로 나라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몰렸을 때 사람들의 비난을 무릅쓰고 강화를 끌어내어 조선의 사직을 지킨 인물입니다. 당시 조선의 형편으로서는 청나라에 항복하는 것 말고는 도대체 해답이 없음에도, 척화파 대부분은 강화니, 항복이니 말만 꺼내도 마구 공격하였지요. 만약 척화파의 주장대로 끝까지 항전했다면 청군은 하삼도까지 내려가 조선의 전 국토를 유린하고 수많은 백성을 죽음의 계곡으로 몰아넣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척화파에게 대다수 백성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권리가 있는 걸까요? 그렇지 않다면 조선의 땅과 백성을 그 정도의 질곡에서 멈추게 하고 벗어날 수 있게 큰 역할을 한 최명길의 업적은 마땅히 평가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리학 근본주의자들이 득세하는 조선에서 최명길은 저런 오명을 벗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 와서 그런 오명은 어느 정도 벗겨졌다고 하더라도, 최명길은 척화파를 훨씬 능가하는 평가를 받아야 함에도 여전히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청백리(淸白吏)! ‘청백’은 ‘청렴결백’을 줄인 말로, 마음이 깨끗하고 욕심이 없다는 뜻이다. 맑고(淸), 깨끗한(白) 그 이름처럼 청백하게 살다 간 이들이 있다. 조선시대 수많은 이들이 벼슬을 거쳐 갔지만, 그 가운데 청백리로 뽑힌 인물은 200명 안팎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 청백리가 된다는 것은 가문의 영예요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예로부터 공직자의 으뜸 덕목은 청렴이었다. 지금이야 공직자도 재테크를 잘해야 기를 편다고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공직자가 가난한 것을 오히려 멋스럽게 여기는 풍조가 있었다. 공직자가 지나치게 윤택한 삶을 사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백성의 고혈이 녹아있다 보았던 까닭이다. 임영진이 쓴 책, 《어린이를 위한 청백리 이야기》는 비교적 자료가 풍부하게 남아있는 조선 시대 청백리들을 중심으로, 고려와 신라 때 청렴했던 관리들의 미담까지 모두 34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이 소개하는 청백리의 미담을 읽다 보면 진정 어려운 길을 걸은 이들의 기백에 새삼 머리가 숙어진다. 자신이 조금만 손을 뻗으면, 조금만 눈을 감으면 금전적 이득을 볼 수 있는 순간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자리가 올라갈수록 그런 유혹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얼마 전 연휴에 재수할 때 인연을 맺은 친구들과 환갑을 기념하기 위해 태국의 파타야를 다녀왔습니다. 여행 첫날 시차 적응을 할 겸 여독을 풀기 위해 파타야 해변을 1시간 30분 정도를 걸으면서 몸 상태를 점검해 보았죠. 당시 파타야 낮 기온은 대략 30℃로 걷기 시작하니 바로 땀이 비 오듯 흘렀습니다. (가운데 줄임) 계속 걷다 보니 대략 1시간쯤 지나자 더 이상 땀이 나지 않고 더위가 느껴지지 않으면서 몸이 상쾌해졌습니다.” 위는 《유용우 한의사의 맨발걷기 처방전》 책 앞부분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런 ‘처방전’ 류의 책들은 그저 논리에 치우친다는 느낌을 받기가 일쑤인데 이 책은 직접 유용우 한의사가 환자를 치료하고 자기 건강을 위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위처럼 실제 몸으로 체득한 내용을 풀어 놓았다는 데 매력이 있다. 유용우 한의원을 방문해 보면 원장실에 맨발걷기를 해볼 수 있는 도구들을 준비해 놓고 수시로 걷는 모습을 목격할 수도 있다. 책에서 유용우 한의사는 “맨발걷기는 마라톤의 ‘러너스하이(runners’ high)‘ 같은 일체감을 가장 쉽고 자주 느낄 수 있는 운동법입니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하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