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조선 왕실은 아이를 어떻게 길렀을까? 조선 왕실에 태어난 아이는 특별했다. 왕조시대에 임금의 핏줄로 태어난 것부터가 특별한 일이거니와, 특히 왕위를 이어갈 ‘원자’로 태어난 아이는 그 출생의 무게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한 나라의 존망이 그 아이가 어떤 어른으로 성장하느냐에 달려 있기에, 왕실에서는 자녀교육에 모든 정성을 쏟았다. 그러나 그 정성이 반드시 아이의 행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세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조기교육’은 그저 뛰어놀고 싶을 나이의 아이들에겐 상당히 가혹한 것이었다. 물론 특별한 자질이 있는 경우에는 공부로 가득 찬 일과를 즐기기도 했지만, 대체로 버거운 일상이었다. 신명호가 쓴 책, 《조선 왕실의 자녀교육법》은 조선 왕실의 태교부터 육아, 청소년 시기의 갈등 해결 방법까지 자녀교육의 모든 면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사람을 낳고 기르는 일에 ‘이렇게까지’ 정성을 쏟았나 싶어질 정도로 열과 성을 다했던 조선 왕실을 보면 나라를 이끌어가는 집안에 면면히 흐르는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진다. (p.243)좌의정 채제공: 회의를 시작한 지 이미 두어 시간이 지났는데도 원자는 마치 심어 놓은 나무처럼 단정하게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6)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던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조각가 김종영의 생가는 <고향의 봄> 동요의 노랫말에 나오는 ‘울긋불긋 꽃대궐’ 이다. 경상남도 창원시 소답동, 지금도 ‘새터마을 소답꽃집’으로 불리는 그 집이다. 한국 조각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한국의 대표적인 추상 조각가, 김종영은 이렇게 아름다운 집에서 태어났다. 조은정 작가가 쓴 이 책, 《생각을 새긴 조각가, 김종영》은 한국 조각계의 거목인 김종영의 삶을 보여주는 ‘어린이미술관’ 시리즈 가운데 한 편이다. 이 ‘어린이미술관’ 시리즈는 ‘온 가족이 보는 예술책’답게, 어른과 어린이가 함께 볼 수 있을 정도로 쉽고도 알차게 내용을 담아냈다. 김종영의 증조부 김영규는 조선이 강제로 합방되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 은거했다. 그리고 1915년, 증손자 김종영이 아버지 김기호와 어머니 이정실의 5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종영은 집안 어른들이 가르쳐주는 대로 사랑방에서 글씨를 쓰고 난초와 대나무를 그리며 자랐다. 열여섯 살이 되던 1930년, 일본인이 세운 학교가 아닌 민족재단에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고교동기 채백 교수가 쓴 책 《민족지의 신화》를 보았습니다. 채 교수는 오랫동안 부산대 교수로 근무하다 2022년 8월 정년퇴임 하였습니다. 내가 부산에 근무할 때 동기들 모임으로 가끔 만났던 채 교수가 책을 냈다고 하니 반가운 마음에 책을 사두었었지요. 하지만 그동안 앞선 자기 차례를 주장하는 책들을 먼저 보다가 얼마 전에야 이 책을 보았네요. 아참! 책이 세상에 나올 무렵에는 채 교수는 명예교수로 물러나 있었네요. 그동안 교수 정년퇴임은 선배들 이야기이지 우리에게는 아직 미래의 일인 걸로 치부했는데, 어느새 지난해, 올해에 걸쳐 동기들이 다 강단을 떠납니다. 한 친구는 늘 학교 연구실로 향하던 발길이 어느 순간 멈추니, 우울증이 왔었다고도 하더군요. 저도 정년으로 작년에 제가 근무하는 사무실 업무에서는 은퇴하였지만, 그래도 변호사로서의 업무는 계속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출근하면 기록 보고, 소속 변호사가 써온 서면도 검토해야 하며 재판에도 나가야 하니, 아직은 뒷방 신세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거~ <《민족지의 신화》 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얘기가 엉뚱한 길로 빠져들었네요. 채 교수는 머리말을 이렇게 시작합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나는 오래전 4·1아우내 만세운동의 현장이었던 아우내(병천, 竝川)에 수년 동안 머무르면서 유관순 열사의 기념관과 생가, 열사를 기념하는 공원을 나의 산책 코스로 정하고 거의 날마다 그곳을 거닐었다. 그러면서 나는 유관순 열사의 동네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는 《김구응 열사 평전》(틈새의 시간 출간)을 쓴 전해주 성공회 신부의 말이다. 전해주 신부는 충남 아우내(병천) 성공회교회에서 사제로 지내면서 뜻밖에 ‘4·1아우내 만세운동’의 주역이 유관순 열사(이화학당 유학생, 당시 17살)가 아닌 당시 지역 유지이자 아우내에 첫 근대식 학교인 청신의숙(靑新義塾)을 세우고 더 나아가 성공회에서 운영하던 진명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김구응 열사(당시 32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글줄깨나 쓰는 신부'로 알려진 전해주 신부는 아우내 성공회교회에 부임한 뒤, 4년 뒤에 맞이할 성공회교회 100돌을 기념하기 위한 ‘100주년 교회사’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교회사(敎會史) 집필을 위해 교회에 보관되어 오던 1920년~30년대 자료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만난 인물이 김구응 열사였다. 그 자료는 강애단 신부의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11월 17일. 대련 수상경찰서.’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죽음을 알리는 전보는 짧았다. 그가 살다 간 태산 같은 인생에 견주면 허무한 결말이었다. 독립운동을 하는 이들은 죽음의 그림자와 함께 살아간다지만, 30년이 넘는 숱한 시련에도 건재했던 아버지였기에 아들 이규창의 충격은 그만큼 컸다. 그는 곧 동지들을 불러 모았다. 아버지가 대련으로 간다는 정보가 어떻게 일본 경찰에게 들어갔는지 모든 연결망을 동원해 샅샅이 알아보았다. 아버지를 죽게 한 밀정이 누구인지 찾게 될 때는, 그 누구라도 용서할 수 없었다. 김은식이 쓴 이 책, 《이회영-내 것을 버려 모두를 구하다》는 1910년, 망국의 파도가 대한제국을 집어삼킨 그해, 일제의 치하에서 단 한 해도 살 수 없다며 1910년 12월 30일 재산을 처분해 전 가족이 만주로 망명한 이회영 일가의 이야기다. 나라가 망했을 때 조상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으며 조선을 좌지우지하던 권문세족은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 책에 소개된 내용은 자못 충격적이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것처럼 자결, 사설 게재, 무장투쟁을 하는 저항의 움직임도 있었지만, 대다수 양반은 일제가 던져주는 달콤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인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첫 구절이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봄은 왔다. 비록 35년이나 걸렸지만, 빼앗긴 들은 주인을 찾아 기름진 옥토가 됐다. 특히 우리 문화에 푹 빠진 한류 팬들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할 만큼 문화 강국이 됐다. 그러나 봄이 결코 오지 않을 것만 같은 암울한 시기가 있었다. 일본의 위세가 맹위를 떨칠 때, 우리 문화의 정수이자 보배라 할 만한 문화유산도 갖은 수모를 당했다. 이 책, 《빼앗긴 문화재에도 봄은 오는가》에 실린 열 가지 유산이 특히 그랬다. 이 책은 다양한 경로로 나라 밖으로 빠져나간 문화재를 다루며 우리 역사를 되짚어보고, 스스로 지킬 힘이 없는 나라의 문화재는 비참한 운명을 맞이한다는 것을 생생히 일깨워준다. 만약 식민지 시절을 거치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문화재가 오롯이 우리 곁에 있었을 텐데, 절로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든다. 책에 실린 가야 문화재, 경복궁, 경천사 십층석탑, 고려청자, 몽유도원도, 북관대첩비, 의궤, 유점사 53불, 인쇄술, 수월관음도가 모두 보배 같은 유산이지만, 특히 경천사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그만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소!” 내가 장애인이라 중요한 업무에서 차별을 받을 때, 누군가 이렇게 외쳐준다면 얼마나 고마울까. 장애를 가졌다 하여 무조건 업무에서 배제하지 않고, 능력을 먼저 보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이는 조선 건국 초기의 명재상 허조에게 일어났던 일이다. 그는 어깨와 등이 많이 굽고 키도 작아 ‘말라빠진 매’라는 뜻의 ‘수응(瘦鷹)’ 재상으로 불렸다. 하지만 그의 강직한 성품과 훌륭한 능력을 높이 산 태종은 아들 세종에게 그를 ‘주석지신(柱石之臣)’, 곧 주춧돌 같은 신하라 소개했다. 예나 지금이나,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삶은 쉽지 않다.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는 몸, 예전보다는 나아졌다지만 여전히 차가운 사람들의 시선, 드러내지만 않을 뿐 언제 어디서나 느껴지는 은근한 차별 … 모두가 장애인을 차별하면 안 된다고 교육을 받는 요즘에도 상황이 그러한데, 하물며 몇백 년 전 조선시대에는 오죽했겠는가. 그러나 뜻밖에 조선은 장애인을 그다지 차별하지 않았다. 능력이 있으면 높은 관직까지 올라갈 수 있었고,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도 궁중 악공으로 직업을 가지고 능력껏 살아갈 수 있었다. 물론 조선에서도 멸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요즘 같은 검색의 시대에 누구나 한 번쯤은 자기 이름으로 검색해본 적이 있으시겠지요? 저는 제 이름으로 검색을 하면 제일 많이 나오는 사람이 세 사람입니다. 양승국 서울대 국문과 교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그리고 저입니다. 아무래도 자기와 이름이 같은 사람이면 좀 더 친근감이 가겠지요? 그래서 예전에 이분들에게 연락하여 ‘식사 한번 하자고 할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습니다. 이분들 중에 양 신부님 글은 종종 봅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제 이모가 양 신부님 강론하신 말씀을 카톡으로 가끔 보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모님 덕분에 가끔 양 신부님 강론을 보다가, 문득 양 신부님 책을 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구입한 책이 《축복의 달인》이라는 강론집입니다. 축복의 달인이 누군가 했더니, 바로 하느님을 말하는 것이네요. 책 머리에서 양 신부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에게 꿈을 주고, 희망을 주고, 어려움 한가운데서도 힘차게 살아가게 만듭니다. 따지고 보니 결핍투성이라고 여겨 왔던 이웃들의 얼굴은 또 다른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었습니다. 내 깊은 상처의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25) 수건에서 아름다운 여인의 향기가 풍기니 하늘이 나에게 정다운 사람을 짝지어 줌이라. 은근한 마음으로 사랑의 노래를 보내니 신랑 각시가 되어 신방에 들기를 바라노라. 만생 장필성 근정 (p.26) 그대에게 권하노니 선녀를 만나는 꿈은 생각지 말고 힘써 글을 읽어 과거에 급제하소서. 채봉 이런 ‘단호박 거절’을 당한 선비의 운명은? 결론을 말하자면, 잘 풀렸다. 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다’. 단, 가문이 풍비박산 나고 채봉이 기생이 될 정도의 엄청난 시련을 극복하고 말이다. 우연한 만남, 운명 같은 사랑, 갑작스러운 시련, 재회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런 사랑 이야기는 무수한 이들이 밤을 새워 읽는 마르지 않는 샘물이었다. 요즘같이 로맨스 소설이 넘치는 시대에, 그래봤자 옛날 사랑 이야기가 얼마나 재밌을까 싶지만 《채봉감별곡》은 그런 예상을 뛰어넘는다. 박진감 넘치고, 반전도 있으며, 생각보다 재밌다. 이 재미의 상당 부분은 여주인공의 당찬 성격에서 나온다. 운명에 순응하는 지고지순한 양갓집 규수가 아닌, 기생 되기를 마다하지 않으며 옛 정인을 찾는 적극적인 여성이기 때문이다. 당초 채봉은 평양성에 사는 김 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당신은 사람답게 살고 있습니까?” 일취 스님이 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을 찾아서》라는 책에서 독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먼저 던진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일취 스님은 ‘청정심원’ 선원장으로 태고종 스님이다. 스님은 《해동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으며, 한국불교사진협회 특별 자문위원이고 또한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다. 그렇게 바쁘게(?) 활동하는 스님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을 찾아서》라는 책을 썼다니 혹시 책 한 권을 내는데 만족해서 쓴 건 아닐까 하는 우둔한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동안 일부 스님들의 책을 접하면서 내용이 어렵거나 너무 현학적인 경우가 있어서 몇 장을 넘기다 그냥 덮어버렸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그런 기우는 금세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스님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방법론에서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고 하겠다. 그래서 대다수의 판단을 토대로 하되 형평성에 어긋나고 불합리한 주장을 배제한 다수의 합리적 관점을 모아 판단하는 방식으로 보편타당한 삶을 전제로 한, ‘보편타당성’과 ‘대아(大我), 소아(小我)에 대한 의미를 기준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