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김후신은 대쾌도(大快圖)를 그렸는데 만취한 선비가 흐느적거리면서 갈 지(之) 자로 걷고 친구들이 부축하는 그림이다. 어쩌면 대쾌도는 술 취한 그림이지만 이는 술 취한 사회를 비웃는 김후신의 뜻이 담겨 있음이 아닐까? 당시는 살벌한 금주령이 내려진 영조임금 시대였다. ▲ 김후신 대쾌도(大快圖), 자본담채, 33.7 x 28.2 cm, 간송미술관 심각한 사회 문제를 일으키는 술을 빚거나 마시는 것을 엄하게 다스리던 시절, 하지만 금주령 앞에 희생당하는 건 양반이 아닌 일반 백성이었다. 입에 풀칠도 제대로 못하는 백성은 술을 빚어 팔았다고 잡혀가고, 몰래 술 마셨다고 잡혀가지만 금주령이 내려진 대낮에도 양반들은 거리낌 없이 술을 마셨던 것이다. 양반은 취하고 처벌은 백성이 받고, 그림 속 배경인 나무들이 이런 광경을 흘겨보는 양 묘사한 김후신의 번득이는 재치다. 이름을 날렸던 조선의 많은 유명 화가들이 이렇게 술에 빠졌던 까닭은 무엇일까? 술이 아니고는 붓을 잡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는 것일까? 술독에 빠진 화가들은 어쩌면 의식과 무의식 중 어느 한 쪽에서도 예술에 대한 영감을 놓지 않았을 것이다. ▲ 이경윤 수하취면도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1) 신윤복이 스스로 감격에 겨워 한 그림, 미인도 ▲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 신윤복(申潤福:1758 ~?)의 미인도,114.245.7㎝, 간송미술관 소장, 왼쪽 / 공재 윤두서의 손자 윤용의 미인도, 해남 녹우당 소장 이 조그만 가슴에 서리고 서려 있는 여인의 봄볕 같은 정을 붓끝으로 어떻게 그 마음마저 고스란히 옮겨 놓았느뇨? 우리가 익히 아는 미인도는 조선 후기의 화가 신윤복이 그렸는데 화가는 그림을 그려놓고 스스로 감격에 겨워 그림에 이런 글을 적어 놓았다. 사계절출판사에서 나온 《한국생활사박물관 10》에 보면 다리(가체)를 구름처럼 얹은머리에 동그랗고 자그마한 얼굴, 둥근 아래 턱, 다소곳이 솟은 콧날과 좁고 긴 코, 귀밑으로 하늘거리는 잔털이라는 표현으로 이 여인은 우리 전통미인의 전형이자 우리 전통의 아름다움 그 자체라고 평가했다. 이 미인도는 비단천 먹 채색으로 그린 것이며, 사실적 기법으로 정통초상기법을 따라 머리털 하나하나까지 세밀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또 윤곽선(쌍선)을 그린 후 그 안에 채색하는 구륵법의 그림이라고 한다. 화폭은 113.9cm x 45.6cm로 현재 간송미술관 소장에 소장되었다. 다만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피나는 노력 끝에 서권기 문자향이 우러나오는 수묵화 ① 수묵화 정의 : 현란한 채색을 피하고 먹만으로 그리는 그림 양식 ② 수묵화(水墨畵) 기법 : 용필(用筆) 곧 붓놀림과 용묵(用墨) 곧 먹다룸의 두 가지. ③ 수묵화의 격(格) :서권기 문자향(書卷氣 文字香) 곧 명필은 단순히 글씨 연습만 반복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많은 독서와 사색을 통해 인문적 교양이 그 사람의 몸에 배었을 때야 비로소 가능하다는데 있다고 한다. ④ 먹을 다루는 방법 : 발묵(潑墨) 곧 먹 퍼짐과 파묵(破墨) 곧 먹 번짐 외에 적묵법, 갈묵법, 조묵법, 습묵법, 비묵법 등 여러 가지가 있다. ⑤ 먹의 빛깔 : 농묵(濃墨 곧 짙은 먹빛보다 더 검은 초묵(焦墨) 곧 숯처럼 까칠한 먹빛, 중묵(中墨) 곧 중간색의 먹빛, 담묵(淡墨) 곧 옅은 먹빛, 청묵(淸墨) 곧 맑은 먹빛 등 5묵법(五墨法) 수묵화의 대표 사군자 ▲ 강세황 사군자 병풍(종이에 먹) 예부터 한국화에는 매화ㆍ난초ㆍ국화ㆍ대나무를 소재로 하여 수묵으로 그린 사군자(四君子)라는 그림이 유난히 많다. 이는 수많은 식물 중에서도 이 매난국죽(梅蘭菊竹)의 의미가 남다르며, 그 생태적 특성이 모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어떤 이는 한국 문화를 중국의 아류쯤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한복의 기원은 중국에 있다고도 말하며, 거문고도 중국에서 들어왔으니 중국 악기라 한다. 또 문인화가 중국에서 전래했으니 중국 그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한국과 중국 문화의 차이를 모르는 소치다. 1909년부터 1928년까지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왔던 독일인 안드레 에카르트는 고국으로 돌아가 1929년 ≪조선미술사≫를 펴냈다. 독일어로 된 이 책은 815 광복 이전 한국 미술을 일본어가 아닌 외국어로 맨 처음 소개한 책이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한국 미술의 특성을 서구사회에 본격적으로 소개함으로써 해방 전까지 세계인들이 한국 미술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큰 구실을 했다는 평을 받는다. 그는 조선 미술을 다음처럼 평가했다. ▲ 열화당에서 번역해서 펴낸 안드레 에카르트가 쓰고 권영필이 뒤친 ≪에카르트의 조선미술사≫ 조선 사람들은 동양에서 가장 아름답고 또 고전적인 미술품을 만들었다. 이렇게 강조하는 것은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과장하거나 왜곡된 것이 많은 중국의 미술이나, 감상으로 치닫거나 지나치게 형식에 얽매이는 일본 미술과는 다르다. 그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10여 년 전 충북 괴산 시골마을의 추수감사제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때 마을 아주머니들은 양동이에 막걸리를 담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막걸리를 한 잔씩 마시게 했다. 한 서너 순배쯤 돌자 사람들은 얼큰하게 취기가 오르고 흥이 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다가오더니 내게 징채를 쥐여 주며 징을 쳐보라는 것이 아닌가? 나는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그때까지 한 번도 풍물 악기를 제대로 만져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무가내였다. 누구나 쉽게 칠 수 있으니 한번 쳐보란다. 할 수 없이, 사실은 적당히 취기가 오른 나의 객기에 결국은 엉겁결에 징채를 잡았다. 꽹과리, 장구 등 치배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연신 징을 울려댔다. 정말 흥겨웠다. 일생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적도 별로 없었던 듯하다. 만일 이것이 서양 음악이었다면 가능한 일일까? 그러나 풍물굿은 가능하다. 풍물굿은 연주자가 관객이 되기도 하고, 관객이 즉석에서 연주자가 되기도 한다. 연주자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두 한마음 되어 즐기면 그뿐인 것이 우리풀물의 멋이요 특징이다. ▲ 풍물굿 가운데 상모놀이 1) 풍물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연기자의 일부 또는 전원이 얼굴에 가면을 쓰고 등장하여 연출하는 극을 가면극, 가면희 또는 탈놀음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있는 탈놀음의 종류에는 하회별신굿, 봉산탈춤, 강령탈춤, 강릉탈놀이, 양주별산대놀이, 수영야류, 동래야류, 통영오광대, 고성오광대, 진주오광대, 가산오광대가 있는데 특히 서울 송파구에 송파산대놀이도 있다. 송파는 조선후기 전국 15대 향시 중의 하나로 서울, 경기 땅의 중요한 장터였다. 한강을 따라 강원도까지 배가 다니는 나루터가 있었고 말 행상, 보부상들이 온 나라에서 송파장으로 모여들어 1925년 대홍수가 나기 전까지만 해도 270여 호의 객주집이 성시를 이룰 정도였다. 따라서 장날뿐만 아니라 그 앞뒤 사흘 동안은 사람들로 붐비며 서울로 보내지는 경기미, 숯, 푸성귀, 곡식 등이 모두 송파나루터를 건넜다. 심지어는 임금님께 진상하는 꿀단지도 송파를 거친다.라는 속담이 생길 정도로 서울의 상업적 관문이었다. 이리하여 되쟁이, 말쟁이, 임방꾼(부두작업부), 잡심부름꾼, 뱃사람으로 넘쳐났으며, 주막, 운송점(창고 및 주문처), 우시장들로 흥청댔는데 그들이 추렴하는 기부금으로 크고 작은 명절과 장날에 놀이판을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일제가 조선 식민지배의 상징으로 서울 남산에 세운 조선신궁[朝鮮神宮]이라는 신사가 있었다. 그 신궁은 1925년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 오오카미), 명치왕 등 일본이 가장 큰 신으로 여기는 신들을 받들었다. 조선총독부는 1945년 6월 현재 신궁(神宮) 2곳, 신사(神社) 77곳, 면 단위에 건립된 작은 규모의 신사 1,062곳을 세웠다. 그런데 종교시설물인 이 조선신궁 안에는 본전, 중문, 사무소 등과 함께 경찰관출장소도 있었다. 그 종교시설물 안에 경찰관출장소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일본 홍문당에서 펴낸 《일본통치하의 해외신사》란 책을 보면 일본 헌병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신사로 데려가 강제로 신사참배 시켰는데 이에 반발하여 온 나라에서 신사를 습격하여 부수고 불을 지르는 사건이 잇달았다고 한다. 조선신궁은 일제가 건국신화의 주신 천조대신과 조선을 강제 병합한 명치왕을 제신으로 삼고 조선 사람들에게 강제로 믿게 한 장소이다. 조선신궁이 있던 곳은 한양공원(구 남산식물원 안중근의사기념관 남산도서관 터) 자리이다. ▲ 서울 남산에 세운 조선신궁 ※ 조선땅 곳곳에 신사를 만들어라! 신사로 조선인의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7. 일제에 맞선 한규설과 한용운의 집에 얽힌 이야기 만해 한용운 그는 3ㆍ1만세운동 선언자 33명 중 변절하지 않은 지사이다. 만해에 관한 일화는 참으로 많은데 그를 회유하려고 조선총독부가 성북동 일대 20만 평의 나라 숲을 넘겨주겠다는 것을 한마디로 거절하고, 총독부의 지시를 받은 청년이 돈 보따리를 들고 오자 뺨을 때려 쫓아 보냈다. 또 최린 등과 함께 3·1운동을 주도했던 그는 감옥에서 일부 민족대표들이 사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자 “목숨이 그토록 아까우냐?”라며 똥통을 뒤엎기도 했으며, 그토록 가까웠던 최린, 최남선, 이광수 등에 대해서도 ‘친일파’라며 상종조차 하지 않았다. 벽초 홍명희는 “만해 한 사람 아는 것이 다른 사람 만 명을 아는 것보다 낫다.”라고 했으며, 만공 선사는 “이 나라에 사람이 하나 반밖에 없는데 그 하나가 만해”라고 했다. 그 만해가 1933년부터 1944년까지 살았던 집 “심우장(尋牛莊)”이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다. 심우장은 서울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는데 ‘심우장“이란 이름은 선종(禪宗)의 ‘깨달음’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 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5. 나라의 위급상황을 알렸던 목멱산(남산) 봉수대 (木覓山 燧烽臺) *서울 중구 예장동 8-1(시도기념물 14)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1394년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후 목멱산(木覓山, 남산)에 봉수대를 설치하였다. 전국의 봉수가 최종적으로 모두 목멱산 봉수대에 전달되도록 하여 남산 봉수대는 중앙 봉수소로서 중요한 위치였다. 목멱산 봉수대는 갑오개혁 다음해인 1894년까지 거의 500여 년 동안이나 쓰였는데 봉수대의 이름은 서울에 있다고 하여 경봉수(京燧烽)라고도 하였다. 목멱산 봉수대는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5개소가 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고 현재 남산 봉수대는 《청구도》 등 관련자료를 종합하고 고증하여 현 위치에 1개소를 복원한 것으로 서울시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되었다. 봉수란 근대적 통신수단이 발달하기 전까지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중요한 국가적 통신수단으로 사용하였던 제도이다. 변방에서 긴급한 사태가 발생했을 때 그 사실을 가까운 관아와 해당 지역에 신속하게 알려 위급한 사태에 빨리 대처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여러 곳에 설치한 봉수대를 이어달리기 식으로 나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1. 임금이 하늘에 제사 지내던 환구단 ▲ 일제에 철거되기 이전의 환구단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환구단(圜丘壇)에 올라 제사를 지내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호천 상제위(昊天上帝位)황지기위(皇地祇位) 및 태조위(太祖位)에는 임금이 친히 삼헌(三獻)을 행하고, 대명위(大明位) 및 풍운뢰우위(風雲雷雨位)에는 세자가 삼헌(三獻)을 행하고, 야명위(夜明位) 및 동남북서해(東南北西海), 악독산천위(岳瀆山川位)에는 영의정 정인지가 삼헌을 행하였는데. 위는 세조실록 6권, 3년(1457)에 나오는 기록으로 세조가 면복을 갖추고 환구단에 제사를 올렸다는 내용이다. 환구단이 맨 처음 설치되어 제사를 드렸던 것은 고려 성종 2년(983) 정월이었는데 이후 설치와 폐지를 계속 되풀이하다가 세조 2년(1456)에는 일시적으로 제도화하여 1457년에 환구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이후 세조 10년(1464)의 제사를 마지막으로 환구단에서의 제사는 중단되었다. 그러다 환구단이 다시 설치된 것은 고종 34년(1897) 조선이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부터이다. ▲ 현재 조선호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