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 단종비 정순왕후의 정업원과 금남시장 ▲ 단종비 정순왕후를 돕기 위한 금남(禁男)이 있었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순조 임금 때 펴낸 ≪한경지략≫이란 책에 보면 동대문 밖 동묘의 남서쪽에는 한양에서 가장 큰 푸성귀(채소)시장이 있었다. 그런데 이 시장은 남자들이 드나들 수 없었던 금남구역이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 그곳에서 가까운 곳에는 단종비인 정순왕후 송 씨가 단종이 죽고 과부가 된 뒤 초막을 짓고 살았던 정업원(淨業院)이 있었다. 이후 세조는 정순왕후가 동냥으로 끼니를 잇는다는 소문이 돌자 그 근처에 영빈정이란 집을 짓고 살게 했지만 정순왕후는 영빈정에 들어가기를 거절했다. 또 조정에서 식량을 주어도 완강히 거부하고, 말년에는 베에다 자줏물 들이는 염색을 하면서 겨우 풀칠을 했다. 그래서 이 근처 마을을 자줏골이라고 불렀는데 장안 부녀자들이 정순왕후를 도우려고 앞 다투어 몰려들었다. 그런데 조정에서 이를 금하자 시장을 만들고 장사하는 척하면서 정순왕후의 생계를 도왔으며 혹시 조정에 밀고할까 봐 남자들은 일절 출입을 금하였다. ** 성균관 선비와 종의 딸 사랑이 서린 곳, 정고개 ▲ 양반과 종의 슬픈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 남자의 질투, 여자를 죽여 청계천에 버리다 성종실록 216권, 19년(1488) 5월 20일 자에는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 박한주가 와서 아뢰기를, 수구문 밖 왕심리(往心里)에 여자의 시체를 내버린 것이 있는데, 상처가 많으므로 이를 검시하도록 하였습니다. 청컨대, 추국(推鞫)하게 하소서.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곳은 지금의 청계천으로 이곳에 상처가 많은 20살 정도의 여자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상처가 심했다. 어느 정도냐 하면 다리 한쪽이 잘려나갔고, 음문은 살이 찢긴 참혹한 모습이었다. 이에 사건이 심각하다고 생각한 성종은 당장 당상관을 불러 추국할 것을 명했다. 내용을 확인해보니 범인은 양반집 주인으로 자신이 데리고 놀던 예쁜 종이 이후 다른 노비와 동침하는 것을 보고 질투가 나서 죽여서 노비를 시켜 내다버렸다는 것이다. 예전 말에 여자의 질투는 오뉴월의 서리를 불러온다.더니 이건 여자의 질투보다 더 무서운 남자의 질투다. 하지만, 조사해서 죄가 드러났어도 양반이란 신분 덕에 모든 신하들이 나서서 두둔했고 그 때문에 벌을 제대로 주지 못했다. 잘못된 양반사회의 한 일그러진 모습이 씁쓸하다. ▲ 남자의 질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종로 거리에서 보쌈당한 선비 이야기 ▲ 조선시대엔 외간남자 보쌈과 과부업어가기가 있었다.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조선 광해조 때 문인 유몽인이 지은 ≪어유야담≫에는 과거를 보러 서울에 왔다 괴기한 일을 겪은 선비 이야기가 있다. 인적이 끊긴 종가(현재의 종로)에서 장정 네 명에게 보쌈을 당한 일이다. 어딘지도 모르게 끌려가 예쁜 여인과 동침할 수밖에 없었던 선비는 그 여인을 잊을 수가 없어 다시 과거를 보러 한양에 왔다가 밤마다 그 종가를 서성였으나 그 장정들을 또 만날 수는 없었다. 조선시대 때는 과부가 된 여인은 죽을 때까지 개가를 못한다는 법이 있어 이런 일도 벌어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연산군 4년(1498년) 송헌동이라는 사람이 이 법을 폐하고 개가를 허락해달라고 임금께 청하였지만 대다수 대신이 반대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보쌈에는 여자집에서 외간남자를 보(褓)에 싸서 잡아다가 강제로 동침시키는 경우와, 남자가 과부를 보에 싸서 데려오는 과부 업어가기가 있었다. 옛 추억이 서린 종로 피맛골 ▲ 벼슬아치의 말을 피해 다닌 피맛[避馬]골 조선시대는 양반과 서민이 분명히 구분되던 시대였다. 그래서 서민들은 종로에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지난번에 이어서 이번에 사람 관계에 쓰는 토박이말을 알아보자 1. 부부 대신 가시버시를 쓰면 좋다 정식으로 결혼을 하지 않고 우연히 만나서 어울려 사는 남녀 곧 동거하는 남녀를 ‘뜨게부부’라고 하는데 ‘뜨게’는 ‘흉내 내어 그와 똑같게 하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뜨게부부’는 ‘가시버시’가 아니다. ‘가시버시’는 부부를 낮추어 부르는 말인데 혼인 청첩장에서 ‘저희는 부부가….’라는 말을 쓰기보다는 ‘저희는 가시버시가….’라는 말을 쓰면 더 멋지지 않을까? 2. 너나들이보다는 옴살이 더 가까운 사이 사람관계를 이르는 말로 ‘남진아비’, ‘자치동갑’, ‘풋낯’, ‘너나들이’, ‘옴살’ 따위가 있다. ‘남진아비’. ‘핫아비’는 ‘유부남’, ‘남진어미’, ‘핫어미’는 ‘유부녀’를 말한다. 핫아비·핫어미는 홀아비·홀어미의 반대이다. ‘자치동갑’은 나이 차가 조금 나지만 서로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를 뜻한다. 또 ‘풋낯’은 서로 겨우 낯을 아는 정도의 사이이고, ‘너나들이’는 나이 차이는 좀 나지만 서로 ‘너’, ‘나’하고 부르며, 터놓고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이며, ‘옴살’은 마치 한 몸같이 친하고 가까운 사이를 말하는 말이다. 한국에서는 ‘객지
[그린경제=김영조 기자]소위 지성인이라는 사람들 대부분은 어려운 한자말이나 영어 쓰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마치 그것이 자신의 유식함을 증명하는 것이라도 되는 양. 하지만, 2살 때 일본에 건너가 70여 년을 우리말을 사랑하며, 토박이말로 시조와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바로 교토의 김리박 선생이 그분인데 우리도 잊었던 토박이말 사랑에 평생을 바치고 있다. 토박이말을 쓰면 훨씬 글이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선생은 일찍 깨달았던 것이다. 이제 우리도 토박이말 사랑에 빠져볼까? 자연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토박이말1) 꽃보라 맞으며 꽃멀미 해보셨나요?봄철이면 눈 속을 뚫고 나와 고고한 자태를 자랑하는 매화를 시작으로 진달래, 산수유, 개나리가 흐드러진다. 이때 눈보라처럼 꽃이 휘날리는 모습을 꽃보라가 인다고 하며, 꽃의 아름다움이나 향기에 취하여 어지럼증을 느끼는 것은 꽃멀미다. 또 꽃보라 비슷한 말로 꽃눈깨비도 있는데 이는 흰 눈같이 떨어지는 꽃잎을 말한다. 편지 쓸 때 꽃보라 맞으며 꽃멀미 해보셨나요?라는 문구를 써보면 멋지지 않을까? ▲ 저렇게 흐드러지게 달린 꽃이 한꺼번에 떨어지면 모두가 꽃멀미를 한다. 또 산과 들에 가보면 우리의 토종 들꽃인 뽀리뱅이, 복
[그린경제=김영조 기자]한 학자는 세종임금이 명에 지성사대(至誠事大)를 했다.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아는 세종은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그리고 자주적인 임금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명나라에 지성으로 사대했다니 모두가 깜짝 놀랐던 것이다. 정말 그 학자는 세종을 사대주의로 본 것인가? 지성사대로 볼 수 있는 예를 그는 여럿 들고 있다. 먼저, 세종실록 25권, 6년(1424년) 9월 2일 자 기록을 보면 임금이 상복을 사흘 만에 벗지 않고 27일의 제도를 실행하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신하들이 홍무제의 가르침에 온 세상의 신하와 백성은 3일 만에 복을 벗으라.라고 했다며, 반대했지만 세종은 군신의 의리를 내세워 중국 천자의 죽음에 스무이레 동안이나 상복을 입었다. ▲ 임금이 상복을 사흘 만에 벗지 않고 27일의 제도를 실행하다.는 세종실록 6년(1424년) 9월 2일 자 기록 또 명나라는 여러 차례 1만 ~ 3만 마리의 말을 바치라고 요구했다. 이에 국방력 약화를 우려한 신하들의 반대에도 지금 만일 칙서를 따르지 아니하고, 말의 숫자를 채우지 못한다면 오해할 우려가 있다. 조선은 예부터 예의의 나라라고 하여 정성껏 사대하였다.라며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누구나 세종의 가장 큰 공적을 훈민정음 창제로 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처럼 한국이 발전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 한글만 한 것이 없다는 데 있다. 하지만,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을까? 세종실록 103권, 26년 2월 20일 자 기록에 보면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언문 제작의 부당함을 아뢰는 상소를 한다.' “우리 조선은 조종 때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스럽게 대국(大國)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따라 글을 같이 쓰고 법도를 같이하는데도 새롭게 언문을 창제하신 것은 보고 놀랐습니다.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기라도 하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중국을 섬기는 나라에서 감히 독자적인 글자를 만들 수 있느냐는 힐난이었다. 이런 생각은 당시 중화사상에 찌들어 있던 대부분 조선 사대부들이 가지고 있었던 철학이었을 것이다. 더더구나 최만리는 집현전 부제학으로 당시 최고 학자였다. 최만리 말고도 대다수 집현전 학사들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던 터라 감히 드러내놓고 훈민정음 창제 작업을 할 바보는 없었을 게다. 세종은 자신의 집권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한글을 아시나요?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도대체 한국 사람치고 한글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한글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어떤 사람은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해하는 것은 한글, 한국말을 잘 안다는 것이라고 꼬집는다. 초등학교부터 국어를 12년에서 16년을 배우고도 간단한 맞춤법 하나 모르는 것이 우리 실정이다. 그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의 특징이 무엇인지, 훈민정음이 언제 한글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는지, 한글날은 언제부터 지내왔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러니 한글에 대해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말글과 떨어져 살 수가 없다.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듯 말글 속에서 그냥 살아가기에 말글의 소중함을 모르고 살아간다. 또 한글은 세계 언어학자들이 격찬하는 위대한 글자인데도 정작 우리는 그 위대함을 모르고 푸대접하며, 남의 나라 글자인 영어와 한자 쓰기에 더 골몰해 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글자이면서 한글이 왜 위대한지, 한글의 특성은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훈민정음은 세종임금의 백성 사랑이 만든 작품 ▲ 훈민정음 해례본 먼저 훈민정음 머리글을 통해 창제의 동기와
▲ 시원스럼게 열린 경복궁 근정전(위)과 닫힌듯 보이는 자금성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북경에 다녀온 사람들은 흔히 북경에 가면 자금성은 꼭 보아야 한다. 자금성은 경복궁이 비교되지 못할 만큼 대단하다.라고 말한다. 물론 누구나 자금성을 보면 그 큰 규모에 놀란다. 그래서인지 경복궁은 자금성의 화장실(?) 정도로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어떤 사물을 크기로만 견주는 것은 의미가 없다. 경복궁은 전통적인 조선인의 미관과 세계관을 조화롭게 표현한 건축물로 검소하면서도 부족하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하지 않은 궁궐이라고 말한다. 자금성은 엄청난 크기, 엄격한 대칭, 깎아지른 직선으로 삼엄하고 답답한 느낌이 들지만 경복궁은 열린 구조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자연을 궁궐로 이끌어오고, 어디에서나 문을 열면 그 문을 통해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걸어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우리 것의 올바른 가치를 아는 것이 참 종요롭다. 배산임수 사상으로 지은 경복궁, 뒤엔 북악산이 자리하고 앞엔 한강이 흐른다. 하지만, 자금성엔 산과 강이 가까이 없다. 또 경복궁은 자금성의 화장실만 하다.란 말은 엄청난 과장이다. 자금성은 9,999칸인데 비해 경복궁은 999칸이라고 하는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 경복궁의 위치가 잘못되었다고 한 무학대사 무학대사와 함께 한양을 찾아온 태조는 궁궐터를 찾다가 지금의 왕십리에 당도하였다. 청계천이 합류하는 곳에 멈춘 뒤 서울이 될 만한 땅을 찾았다. 북악산과 남산 사이에 상당히 넓은 명당을 발견하고, 그곳이 왕도로 좋은 터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어디에 궁터를 정해야 할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때 한 할멈이 나타나 이곳에서 십리를 더 간 곳이 좋다.라고 일러 준 뒤 사라졌다. 두 사람은 하늘의 계시라고 믿고 북악산 기슭에 궁궐터를 잡았다고 전한다. 그래서 그 할멈이 나타난 곳을 왕십리(往十里))라 불렀다. * 경복궁의 주산과 좌향 조선왕조가 한양을 서울로 하고 궁궐을 지을 때 당대 풍수의 대가이며 불교계 왕사인 무학대사와 유학의 거목인 정도전 사이에 논쟁이 있었다. 무학대사는 건물의 방위를 정함에 서쪽의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여 낙산을 바라보는 형상이 국운이 오래갈 것이라고 하고, 정도전은 한 나라의 장래를 어찌 미심쩍게 풍수에만 맡길 수 있겠는가? 임금이 백성을 잘 다스리려면 남쪽을 향하고 북쪽을 등져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결국, 정도전의 주장대로 지금 청와대 뒤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