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수업 명예교수] 말은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며, 세상을 받아들이는 손이다. 사람은 말이라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말이라는 손으로 세상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말이 흐릿하면 세상도 흐릿하게 보인다. 천수관음보살처럼 손이 즈믄(천)이면 세상도 즈믄을 받아들이지만, 사람처럼 손이 둘뿐이면 세상도 둘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이치에서 중국말이나 일본말이나 서양말을 얼마든지 끌어다 써야 한다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그들은 우리 토박이말로는 눈과 손이 모자라서 지난날 중국 한자말로 눈과 손을 늘렸다고 여긴다. 그 덕분에 이름씨 낱말이 얼마나 넉넉하게 되었는지는 국어사전을 펼쳐 보면 알 수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러나 그런 소리는 참말이 아니고 옳은말도 아니다. 산은 마치 토박이말처럼 쓰이지만, 중국에서 들어온 한자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끌어다 쓰기 전에는 우리에게 산을 뜻하는 이름씨 낱말이 없었을까? 이것이 들어와서 비로소 산을 뜻하는 낱말이 생겨나 우리가 산을 처음 바라보고 세상을 더 많이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사실은 거꾸로다. 산 하나가 들어와서 이미 있던 토박이 이름씨 낱말 셋을 잡아먹었다. 뫼와 갓과 재가 모두 산에게 잡아먹혀
[우리문화신문=김수업 명예교수] 8년 전에 경남에서 열린 제10차 람사르협약 당사국총회 가운데서,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준 생태 관광지로 첫손 꼽힌 데가 바로 창녕의 우포늪이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는 창원의 주남저수지도 거기에 못지않은 곳이었다. 그런데 이들 두 관광지의 이름이 하나는 우리 토박이말 우포늪으로 람사르 정신에 잘 어우러지지만, 다른 하나는 주남저수지라는 한자말이어서 아쉽고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주남저수지는 아무래도 일제 때에 바꾸어 쓴 이름일 터이고 본디는 틀림없이 주남못이었을 것이다. 못은 쓸모 있을 적에 쓰려고 사람이 땅을 파고 둑을 쌓아서 물을 가두어 두는 곳이다. 못에 가두어 두는 물은 거의 벼농사에 쓰자는 것이라 논보다 높은 산골짜기를 막아서 만들어 놓은 곳이 많다. 못은 거의 벼농사에 쓰자고 물을 가두어 두지만, 바닥의 흙이 좋으면 연을 길러서 꽃도 보고 뿌리를 캐서 돈을 벌자고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연을 키우려고 만든 못을 연못이라 부른다. 그리고 연못은 집 안에 뜰을 꾸미느라 만들기도 하는데, 이런 뜰 안의 연못에 키우는 연은 꽃을 보자는 것일 뿐 뿌리를 팔아서 돈을 벌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문화신문=김수업 명예교수] ‘말꽃’은 ‘문학’을 뜻하는 토박이말이다. 토박이말이지만 예로부터 써 오던 것이 아니라 요즘 새로 나타난 말이다. ‘문학(文學)’은 본디 ‘글의 학문’이라는 뜻으로 공자님이 처음 썼다고 하는 중국말인데, 우리는 지금 그러한 뜻으로 ‘문학’이란 낱말을 쓰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쓰는 ‘문학’은 놀이(희곡), 노래(시), 이야기(소설) 같은 것을 싸잡아 서양 사람들이 ‘리터러처(literature)’라고 하는 그것이다. 이것을 일본 사람들이 ‘문학’이라 뒤쳐 쓰니까 우리가 그대로 가져와서 쓰는 것이다. 그러나 놀이, 노래, 이야기는 이른바 ‘말의 예술’이므로, 중국말이었든 일본말이었든 글의 학문을 뜻하는 ‘문학’이라는 말로는 그것들을 마땅하게 담아내지 못한다. 게다가 말의 예술인 놀이, 노래, 이야기는 입말, 글말, 전자말을 두루 싸잡아야 하는데, 글말만을 뜻하는 ‘문학’이라 부르면 입말과 전자말로 즐기는 예술은 싸잡을 수가 없다. 그렇게 중국 한자말 ‘문학’과 우리가 싸잡아 담으려는 뜻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데, 언제까지 우리가 ‘문학’이라는 남의 말을 빌려다 써야 하는가? 이런 물음을 가슴에 품고 마땅한 낱말을 오래 찾
[우리문화신문=김수업 명예교수] 지난 세기 동안에 우리네 집의 모습과 쓰임새가 크게 달라져 말들 또한 뜻과 쓰임새 모두 많이 달라졌다. 지난날 우리네 집은 울(풀이나 나무 따위를 얽거나 엮어서 담 대신 경계를 삼은 울타리)이나 담(집이나 일정한 공간을 둘러막기 위하여 흙, 돌, 벽돌 따위로 쌓아 올린 것)으로 둘러싸인 집터 위에 저마다 몫이 다른 쓰임새로 여러 자리가 나누어져 있었다. 방과 마루와 부엌을 중심으로 하는 집채를 비롯하여, 마당과 뜰과 남새밭(채소밭) 따위가 저마다 자리를 잡고 우리네 집터를 채운 것이다. 집의 노른자위는 물론 위채, 아래채, 사랑채로 나누어지는 삶의 보금자리인 집채다. 남새밭은 보금자리인 집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구석진 곳에 자리 잡고 있지만, 철따라 반찬거리 남새(채소)를 길러 내는 먹거리의 터전이었다. 마당은 집에서 집채나 남새밭에 못지않게 종요로운(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매우 긴요한) 자리다. 남새밭이 없는 집은 있을 수 있어도 마당이 없는 집은 있을 수 없을 만큼 그렇게 종요롭다. 살림이 넉넉하고 집터가 넓으면 앞마당, 뒷마당, 바깥마당까지 갖춘 집들도 적지 않았다. 마당은 한마디로 집 안의 일터며 놀이터다. 밤이 오거
[우리문화신문=김수업 명예교수] 우리말에서는 풀이말을 으뜸으로 삼아 종요롭게 쓴다. 말의 뿌리와 뼈대 노릇을 하는 풀이말이 맨 뒤에 자리 잡고 앉아서 앞서 나온 여러 말을 다스리고 거느린다. 그러므로 맨 나중에 나오는 풀이말을 제대로 듣지 않으면, 앞에 나온 여러 말을 아무리 잘 들어도 헛다리를 짚는 수가 적지 않다. 인사말을 보더라도 서유럽 사람들은 좋은 아침!, 좋은 저녁!같이 이름씨로 그만이고, 이웃 일본 사람들은 오늘 낮은?, 오늘 밤은?같이 풀이말을 잘라 버리고 쓰지만, 우리말은 반드시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같이 풀이말로 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말 이름씨 낱말은 움직씨나 그림씨 같은 풀이말에서 탈바꿈해 나온 것이 많다. 마개니 덮개니 뚜껑이니 하는 낱말도 모두 풀이말로 쓰이는 움직씨에서 탈바꿈한 이름씨다. 마개는 막다라는 움직씨의 줄기 막에 애가 붙어 이름씨 낱말이 되었고, 덮개는 덮다라는 움직씨의 줄기 덮에 개가 붙어 이름씨 낱말이 되었다. 이럴 적에 애와 개는 다 같이 ~에 쓰는 무엇이라는 뜻의 이름꼴 씨끝이다. 그래서 마개는 막는 데에 쓰는 무엇이고, 덮개는 덮는 데에 쓰는 무엇이다. 놀다에 애가 붙어 이루어진 노래는 노는 데에 쓰
[우리문화신문=김수업 명예교수] 광복 뒤로 얼마 동안은, 초등학교 운동회 때에 달려라! 달려라! 우리 백군 달려라! 하는 응원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625 전쟁을 지나고 언제부터인가부터, 그것이 뛰어라! 뛰어라! 우리 백군 뛰어라! 하는 소리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요즘은 온 나라 젊은이가 너나없이 뛰다와 달리다를 올바로 가려 쓰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아예 두 낱말의 뜻이 본디 어떻게 다른지도 모르게 되어 버린 듯하다. 그나마 다행스런 일은 국어사전들이 이들 두 낱말의 본디 뜻을 그런대로 밝혀 놓았다는 사실이다. 국어사전들은 뛰다를 있던 자리로부터 몸을 높이 솟구쳐 오르다. 몸이 솟구쳐 오르다.라고 풀이해 놓았고, 달리다를 닫다의 사동사. 달음질쳐 빨리 가거나 오다. 빨리 가게 하다. 뛰어서 가다.라고 풀이해 놓았다. 두 낱말의 뜻이 헷갈릴 수 없을 만큼 다르다는 것을 짐작할 만하다. 그런데 달리다를 뛰어서 가다.라고 풀이해서 달리다와 뛰다가 서로 헷갈릴 빌미를 남겨 두었다. ▲ 뛰다와 달리다는 분명 다른 말이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뛰다는 본디 제자리에서 몸을 솟구쳐 오르는 것이고, 달리다는 본
[우리문화신문=김수업 명예교수] 땅과 흙을 가려 쓰지 못하고 헷갈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의 뜻을 가려서 이야기해 보라면 망설일 사람이 적지 않을 듯하다. 뜻은 잘 가려 쓸 수 있으면서 그것을 제대로 풀어 이야기하기 어려운 까닭은 무엇일까? 그 까닭은 가르칠 수 있을 만큼 아는 사람들이 이런 우리말을 버리고 남의 말을 뽐내며 즐겨 쓰느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다는 사람들이 가르치지 않는데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배우겠는가? 공부하고 글 읽어 안다는 사람들은 우리말 땅과 흙을 버리고 남의 말 토지니 영토니 토양이니, 대지니 하는 것들을 빌어다 쓰면서 새로운 세상이라도 찾은 듯이 우쭐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똑똑하고 환하게 알고 있던 세상을 내버리고, 알 듯 모를 듯 어름어름한 세상으로 끌려 들어간 것일 뿐이었음을 이제라도 깨달아야 한다. 땅은 우리가 뿌리내려 살아가는 터전을 뜻한다. 우리는 땅을 닦고 터를 다듬어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며, 땅을 헤집고 논밭을 일구어 먹거리를 얻어서 살아간다. 삶의 터전인 땅에서 온갖 목숨이 태어나고 자라고 꽃피고 열매 맺는다. 세상 온갖 목숨을 낳고 기르는 어머니가 바로 이 땅이라는 말이다.
[우리문화신문=김수업 명예교수] 돕다와 거들다 같은 낱말도 요즘은 거의 뜻가림을 하지 않고 뒤죽박죽으로 쓴다. 《표준국어대사전》을 들여다보면 그 까닭을 알 만하다. 돕다 : 남이 하는 일이 잘되도록 거들거나 힘을 보태다. 거들다 : 남이 하는 일을 함께 하면서 돕다. 《표준국어대사전》 이러니 사람들이 돕다와 거들다를 뒤죽박죽 헷갈려 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들 두 낱말은 서로 비슷한 뜻을 지녀서 얼마쯤 겹쳐지는 구석이 있게 마련이지만, 여러 가지 잣대에서 쓰임새와 뜻이 사뭇 다르다. 무엇보다도 돕다는 사람을 겨냥하여 쓰는 낱말이고, 거들다는 일을 겨냥하여 쓰는 낱말이다. 앞을 못 보거나 말을 듣지 못하는 사람을 돕고, 배고픔과 헐벗음에 허덕이는 사람을 돕고, 힘겨운 일에 짓눌려 괴로워하는 사람을 돕는다. 한편, 힘이 부쳐서 이겨 내지 못하는 일을 거들고, 너무 많고 벅차서 감당하지 못하는 일을 거들고, 정한 시간에 마무리를 못 해서 허덕이는 일을 거든다. 이처럼 사람을 돕고 일을 거든다고 하면 쓰임새가 옳지만, 일을 돕고 사람을 거든다고 하면 쓰임새가 틀리는 것이다. ▲ 돕다는 몸과 마음으로 주는 것이지만, 거들다는 몸으로만 주는 것 (
[우리문화신문=김수업 명예교수] 는개는 국어사전에도 올라서 꽤 널리 알려진 낱말인데,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안개보다는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비라고 풀이해 놓았다. 굳이 틀렸다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알맹이를 놓쳐서 많이 모자라는 풀이다. 는개는 늘어진 안개라는 어구가 줄어진 낱말임을 밝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안개 방울이 굵어지면 아래로 늘어져 거미줄 같은 줄이 되어 땅으로 내려앉으며 비가 되는데, 이런 것은 비라고 하기가 뭣해서 안개 쪽에다 붙여 는개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는개처럼 비라고 하기가 어려워 비라고 하지 않은 것에 먼지잼도 있다. 먼지잼은 공중에 떠도는 먼지를 땅으로 데리고 내려와서 잠재우는 것이라는 뜻의 풀이를 그대로 줄여 만든 이름이다. 먼지잼은 빗방울이 는개처럼 아주 작기도 하지만, 공중의 먼지만을 겨우 재워 놓고 곧장 그쳐 버리는 비라는 뜻까지 담고 있다. 자연을 이처럼 깊이 꿰뚫어보고 감쪽같이 이름을 붙이며 살아온 겨레가 세상에 얼마나 될까? 먼지잼과 는개 다음으로 가장 가늘게 내리는 비가 이슬비다. 비가 오는 것 같지도 않은데 풀이나 나무의 잎에 내린 비가 모여서 이슬처럼 물방울이 맺혀 떨어진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그리
[우리문화신문=김수업 명예교수] 스펀지라는 텔레비전 방송에서 재미나는 구경을 했다. 돼지 다섯 마리를 새로 만든 우리에 넣고 돼지가 똥오줌과 잠자리를 가릴지 못 가릴지를 알아보려고, 다섯 사람이 한 마리씩 맡아서 밤을 새우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한 놈이 구석에다 오줌을 누었다. 그러자 다른 놈들도 모두 똥이나 오줌을 그 구석에만 가서 잘 가려 누었다. 그런데 지켜보는 사람들은 돼지가 오줌이나 똥을 눌 때마다 한결같이 쌌습니다! 쌌습니다! 했다. 박문희 선생님이 유치원 아이들과 살면서 겪은 그대로였다. 똥오줌을 눈다와 똥오줌을 싼다를 가려 쓰지 않고 그냥 싼다로 써 버립니다. 똥오줌을 눈다는 말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변기에 눈 건지 바지에 싼 건지를 가려 쓰지 않으니 가려듣지 못합니다. 이러니 생활이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분명히 똥을 눈다, 똥을 싼다는 말을 가려 써 왔습니다. - 박문희, 《우리말 우리얼》 46호 ▲ 잠자다 요에 지도를 그리는 것은 오줌을 싸는 것이다.(뉴스툰-왼쪽), 오줌싸개 치료법이 등장한 기사(동아일보 1932년 9월 28일) 누다와 싸다는 다스림으로 가려진다. 누다는 똥이든 오줌이든 스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