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전수희 기자] 눈으로 보는 것이 없어야 분별이 없고 귀는 소리 없음 들어야 시비가 끊겨 분별과 시비를 모두 버려버려야 마음 부터에 스스로 귀의 함을 보라 비 개자 꽃들이 일제히 피고 봄 깊자 우는 새들의 울음 맑은 바람 밝은 달밤 또렷또렷 맑긋맑긋한 마음 한 벌의 가사 걸쳐 풍진에 맡겼으니 청정의 선정공부도 참이 못되네 범의 굴, 마귀 집 어디나 즐거워 천지를 소요하는 한가로운 사람 되네 이는 영허대사(暎虛大師, 1541~1609)의 시다. 영허대사의 시는 《영허집》4권에 실려 있으며 54편의 시가 전한다. 사대부 가문에 태어나 15살에 과거 시험에서 떨어진 뒤 19살에 출가하여 능가산 실상사를 거쳐, 금강산, 묘항산 등에서 수행 정진 하였다. 《영허집》은 영허대사 사후 시와 산문, 소설 등을 행장(行狀)과 덧붙여 그의 제자들이 1635년에 간행한 문집이다. 모두 4권 1책으로, 오언절구(五言絶句) 5편, 칠언절구(七言絶句) 16편, 오언율시(五言律詩) 29편, 칠언율시(七言律詩) 14편, 부(賦) 1편, 가(歌) 1편, 소설[傳] 1편, 유산록(遊山錄) 3편, 행장(行狀)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목판본 2본이 전한다. 조선
[우리문화신문=전수희 기자] 거문고 속에 소리 있다면 갑 속에서는 왜 울리지 않나 그 소리 손끝에 있다면 그대 손끝에서 왜 들리지 않지 봉래산에서 도 물을 때도 도는 둘이 아니었고 묘향산에서 다시 맞았어도 역시 이 마음뿐이지 해 저물어 문밖에서 전송할 때도 온산의 소나무 회나무는 제 바람에 제 거문고 소리로군 속세 멀리한 사립문 온 산을 안고 사람 없는 숲 길 눈빛만 깊다 유정은 그래도 하늘에 있어 밤사이 밝은 달 창을 엿보네 이는 편양당(鞭羊堂, 1581~1644)의 시다. 서산대사의 제자인 사명당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명당과 쌍벽을 이루는 편양당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편양당의 시는 《편양집》에 실려 있는데 이 책은 제자 설청(說淸) 등이 스승의 글을 3년에 걸쳐 모아 1647년(인조 25) 백운암(白雲庵)에서 판각(板刻)하였으며, 용복사(龍腹寺)에 보관했던 간본(刊本)이 현존하고 있다. 모두 90수의 한시가 수록되어 있는《편양집》을 통해 승속을 넘나든 편양당의 폭 넓은 인생관과 이해득실을 초월한 철두철미한 선사(禪師)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시문에 나타나 있는 ‘초월’은 단순한 도피나 은둔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자각하여 어느 곳
[우리문화신문= 전수희 기자] 벌여놓은 모든 물상 다 허깨비 긴 허공 지나는 사이 자취 안남겨 허공이 몸 갈무리할 자리 못되니 바람결에 비 젖은 소나무 보게 백 천의 경전 손가락 같아서 손가락 따라 하늘의 달을 보네 달 지고 손가락 있어 한일도 없으니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잔다 이는 서산대사의 제자 소요(당) 대사(1562~1649)가 지은 시다. 소요당의 속 씨는 오 씨이고 담양사람이다. 13살에 백양산에 갔다가 세속 밖의 경지를 보고는 출가의 길을 걸은 소요당 대사는 나이 20살에 서산대사를 찾아 묘향산에 갔다가 서산대사로부터 게송 하나를 받는다. 그림자 없는 나무 베어다 물 속 거품 다 태워버린다 우습구나 소를 타고 있는 이가 소 등에서 다시 소를 찾네 이게송의 뜻을 수많은 제자들이 이해 못하고 있을 때 소요당은 서산대사의 이 게송이 ‘삶이 없음(無生)’ 임을 깨닫는다. 소요당은 서산대사의 가르침으로 비로소 ‘마음’을 보았고 본성에 내 맡길 수 있어 툭 트인 몸으로 이리저리 노닐며 구름처럼 모여드는 대중을 교화했다고 전한다. 소요당 대사는 경전에 얽매여 있는 것을 경계하였는데 온갖 경전은 길잡이일 뿐 그 자체가 길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마치 손
[우리문화신문=전수희 기자] 남쪽지방 모두 도적 칼에 빼앗겨 고깃덩이 된 백성 그 참상 어떠하랴 임금 수레 사령을 넘은 뒤 10년의 선창(禪窓)에서 가슴만 치다 이는 ‘임진년 여름’이란 시로 인오선사(印悟禪師, 1548~1623)가 임진왜란 때 지은 노래다. 인오선사는 32살 때 묘향산에서 서산대사를 모셨다. 때마침 왕명으로 서산대사가 의병을 모으자 인오선사도 승병장이 되어 3년 동안 공을 세웠다. 경(經)을 봄이 참 깨달음이 아니요 잠잠히 지킴도 헛된 수고 가을하늘 바다처럼 맑으면 둥구렷 달무리 외로워 인오선사는 어디에도 집착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국난을 보고 가슴만 칠 수가 없어 몸소 전란에 뛰어 든 것이다. 호가 청매(靑梅)인 인오선사는 《청매집》을 남겼는데 그 서문은 조선 중기의 대문장가 이정구(李廷龜, 1564~ 1635) 선생이 썼다. 월사 이정구 선생은 인오선사를 처음 본 인상을 다음과 같이 썼다. “월명사는 산 북쪽 제일 높은 곳에 있었다. 인오 노스님이 나를 절로 인도하여 함께 갔다. 거처나 책상, 향로 등이 너무도 청초하여 속세를 떠난 듯 바로 서천세계로구나 하고 놀랐다. 서가에 가득한 경전들의 앞면에 쓴 제목 글씨가 모두 자신의 친필인데
[우리문화신문= 전수희 기자] 깊은 우물 마시려 두레박끝 깊게 하랴 짧은 지팡이로 먼 길 가려말라 하고많은 세 상일 양 창자인 듯 험하고 끝없는 사람살이 호랑이 뿔 위의 맞섬 숨는 체 하려면 차라리 깊이 숨음이 낫고 육신의 단련이 육신을 잊는 것만 하겠나 이름 찾고 법에 노닌다고 진실됨일까 이려 쩌쩌 부르는 마소도 소리에 따를뿐 중관 대사(中觀大師, 1567~?, 명종 22)는 서산대사 문하에서 한 유파를 형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자세한 행적은 전하지 않고 있다. 다만《불조원류(佛祖原流)》에 따르면, “성은 오씨(吳氏)이고 전라남도 무안(務安)사람이다. 어려서 총명하고 지혜가 있어 신동이라 일렀다. 입산하여 머리를 깎고 곧 오묘한 선지를 깨쳐 임제의 정맥과 태고의 청풍이 다시 혼탁한 세상에 떨치게 되었다. ”고 기록하고 있다. 중관대사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 해에 영남지방에서 승병을 일으켰고, 전공을 세워 총섭(摠攝)이 되었다. 전란 뒤 지리산 화엄사에 있으면서 대화엄종주(大華嚴宗主)로서 법화(法化)를 폈다. 만년에는 지리산 귀정사(歸正寺) 소은암(小隱庵)의 옛터에 대은암(大隱庵)을 중창하고 그 곳에서 참선수도에 정진하였다. 시서 3만의 권축에 있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