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홀로 있는 시간은 쓸쓸하지만 / 아름다운 호수가 된다 / 바쁘다고 밀쳐두었던 나 속의 나를 / 조용히 들여다 볼 수 있으므로 / 그래, / 혼자 있는 시간이야말로 / 내가 나를 돌보는 시간 / 여럿 속의 삶을 / 더 잘 살아내기 위해 / 고독 속에 나를 길들이는 시간이다.“ 이 시는 한국의 유명한 시인 이해인 수녀님이 쓴 “고독을 위한 의자”의 몇 행이다. 엄마네 집 벽에 붙어있는 이 시를 나는 이젠 거의 외울 정도이다. 그러면서 나는 오늘도 거실 의자에 앉아 이 시를 읊조리며 고독을 달래고 있을 엄마의 모습에 가슴이 메여온다. 당뇨로 고생하시던 아버지를 십여 년전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내시고 홀로 계신 엄마에게는 고독이라는 무서운 친구가 찾아왔다. 종가집 큰며느리로 시집을 와서 시부모와 증조할머니, 어린 시누이에 자기 자식 삼형제까지 모두 합하여 아홉 식솔이라는 대가정속에서 생활하시던 엄마는 어느 순간에 텅 빈 집에 홀로 남겨지게 되셨다. 그 옛날 모진 가난으로 째지게 어려웠던 시절에도 항상 씩씩하시던 엄마가 고독 앞에서는 그만 아기가 되어버렸다. 눈물도, 서러움도 많아지셨다. 이제는 우리 자식들이 늙으신 엄마 곁을 지켜드려야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지난 1970년 여름날에 있은 이야기이다. 우리 마을은 해란강이 굽이돌아 흐르는 오붓한 동네였다. 그때 하방호로 왔던 딱친구 옥주네가 시내로 돌아간다는 소문이 동네에 쫙 퍼졌다. 옥주와 친하게 보내던 친구들은 일요일, 시내에 가서 기념사진을 찍자고 약속했다. 그런데 나는 걱정이 앞섰다. (돈은 어쩌지? 차비 20 전, 사진값 20전, 점심값 10전, 적어도 50전은 있어야 하는데. 이 돈을 누구와 달라지?) 그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침침해 났다. 우리 집은 아홉 식구에 로동력이라고는 아버지와 엄마뿐이어서 일년 수입이 얼마 안 되였다. 다른 애들 같으면 의례 엄마한테 돈을 달라고 할 것이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엄마가 계모였던 것이다. 세상물정 좀 알기 시작해서부터 다시 말해 우리 엄마가 나를 낳은 엄마가 아니라는 것을 안 순간부터 저도 모르게 눈치생활을 해왔다. 물론 우리 엄마는 나를 잘 대해 주었다. 우리집에 오셔서 낳은 내 아래 두 동생들은 조금만 잘못해도 호되게 꾸짖었지만 전처 자식인 나와 오빠만은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옛날이야기와 동화책속에 나오는 못된 계모들에 비해 더없이 착하고 인자하여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어제 밤에 눈이 내려 길은 상당히 미끄러웠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도 훨씬 차거웠고 거칠었다. 자가용을 몰고 역에 나가 시골에서 올라온 어머니를 마중해가지고 집 앞에 있는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창에서 집까지 가려면 몇 십 미터는 더 걸어야 했다. 나는 이렇게 춥고 미끄러운 날에 왜 부득부득 오시지요, 하고 어머니를 나무람하였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잔소리를 했다. 동네에서 있었던 일을 쉼 없이 얘기하셨다. 2년 전 겨울날, 어머니는 넘어지면서 손목을 크게 상해 고생한적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눈이 내리는 날에는 마실을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허지만 어머니는 아침에 통화할 때만 해도 우리 집으로 온다는 말씀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올라오시니 나는 좀 당황하였다. 길은 좀 경사가 지기까지 해서 한결 더 미끄럽고 걷기가 불편했다. 앞에서 궁둥방아를 찧는 사람도 가끔 보였다.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미끄러운 길을 조심스레 걸었다. 엎어지거나 넘어져서 상하면 큰일이다. 혹시라도 미끄러져 상하면 어쩌랴 한 발작 한 발작에 신경을 곤두세우고서 말이다. 나는 어머니의 손을 더욱 으스러지게 잡았다. 어머니의 손은 차겁고 꺼칠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살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소름이 오싹 끼치고 머리카락이 곤두서도록 무서운 정적을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홀로 산길을 걸을 때나 어두운 밤 빈집에 혼자 있을 때처럼 말이다. 소학교 4학년 때부터 나는 늘 아버지를 따라 산속을 다니면서 그런 정적을 신물 나도록 느꼈다. 내가 철이 들면서 언니들은 시집갔고 엄마는 집안일에 돌아치다보니 아버지 일을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내가 늘 아버지한테 불리워다니곤 했다. 어느 해인가 아버지는 손수레 한대를 샀다. 그날 동네사람들이 손수레를 빙둘러 싸고 마치 오늘날 고급승용차를 산 것처럼 구경할 때 아버지가 흥분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그 손수레는 아버지의 딱친구로 되였다. 봄에는 밭을 일구고 여름에는 김도 매고 나물도 캤으며 가을이면 수확하고 겨울이면 땔나무도 할겸 산토끼며 꿩도 잡았다. 그런데 길 떠날 때마다 아버지는 어김없이 나를 불러 손수레에 앉히고 갔다. 손수레 앞뒤무게를 조절하기 위해서였을까? 하여튼 그 시절 나는 아버지랑 일 나가는 것이 두렵고 싫었다. 가는 길은 그래도 덜컹거리는 손수레에 앉아가는 재미가 있었지만 산속에 도착 하면 한없이 지루하고 고독한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아파트층집밑에 자그마한 채소밭이 생겨난 후 남편은 아침에 일어나자 바람으로 일하러 나간다. 남편이 텃밭에서 일하고 내가 밥을 지으면서 참 평온하고 자연스러운 아침일상이 반복 되였는데 요사이 생각지 않은 일로 공연히 내 심기가 불편해졌다. 문제는 2층집 녀자다. 30대 중반쯤 되는 이 녀자와 한 아파트에서 산지도3년이 다 되는데 원래 이웃에 관심이 없는지라 이름도 직업도 모를 만큼 나는 그 녀자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그런데 그 녀자는 어쩌다 층계에서 만나도 무람없이 인사를 건네고 각별하게 친한 척 하다가도 때론 처음 보는 사람처럼 이상하게 쳐다보기도 하여 난감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요사이에는 남편한테 특별한 관심을 가져서 이만저만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아침밥 하다가 바깥을 내다보면 일하는 남편 곁에 서서 손짓발짓해가며 연설을 하는가 하면 남편의 삽자루를 빼앗는 시늉까지 한다. 때론 옆에 쪼크리고 앉아 턱받이하고 구경하는데 정말 어처구니없다. 아침밥상을 놓고 말하기가 좀 그래서 참으려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당신 아래집 젊은 녀자와 할 말 많은가 봅니다." 숟가락을 들다말고 나를 쳐다보는 남편이 멍한 표정이다. "날마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연변의 석화시인은 “연변이야기” 연재를 시작합니다. “연변이야기”는 중국조선족 민중들의 사는 이야기입니다. 모두 삶의 현장에서 있은 이야기를 본인들이 직접 쓴 글입니다. 따라서 연변에 사는 동포들의 정취와 민족정신이 생생하게 담겨있습니다. 많은 기대를 바랍니다. (편집자말) 아들애가 여섯 살 무렵 나는 앞으로 우리아이를 조선족학교에 보낼가 아니면 한족학교에 보낼가를 고민하다가 끝내 한족유치원에 보냈다. 그덕에 지금 소학교 4학년에 다니는 아들은 조선족이라는 티가 전혀 나지 않는다. 대신에 조선말은 몇 마디는 알아듣지만 단 한마디도 번지지를 못한다. 나는 앞으로 애가 커서 사회에 진출하더라도 조선말은 몰라도 중국에서 사는 데는 별 영향이 없을 거라는 판단에서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요즈음에 생겼다. 8월 2일날 한국에 있는 남동생네 여덟 살짜리 아들애가 중국에 놀러 온다고 해서 오후 4시에 남편과 같이 공황에 마중 나갔다. 조카애는 공항에서부터 형아랑 같이 만나려고 했는데 고모와 고모부만 마중 왔다면서 쉴 새 없이 재잘거린다. 사촌형이 무척 보고 싶었나 보다. 그것도 그럴 것이 애들은 서로 못 본지 벌써 3년이나 된다. 조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