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5월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완초장 보유자 이상재 선생이 세상을 떴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완초장은 논 또는 습지에서 자라는 1, 2년생 풀인 왕골로 살림살이에 쓰는 도구들을 만드는 장인을 말합니다. ‘왕골’은 키가 60~200cm에 이르는 풀로 용수초(龍鬚草), 현완(懸莞), 석룡초(石龍草)라고도 부릅니다. 왕골제품으로는 자리, 돗자리, 방석, 송동이(손바구니), 합(밥그릇) 따위가 있지요. 《태종실록》에 보면 관청에서 수요를 빙자하여 민간에게 공납을 강요하는 몇 가지 품목 가운데 왕골도 포함된 것으로 미루어 조선시대에도 왕골은 매우 귀한 물건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만화석(滿花席), 만화방석(滿花方席), 만화각색석(滿花各色席), 용문석(龍文席), 화문석(花文席), 잡채화문석(雜彩花文席), 채화석(彩花席) 등 여러 이름의 왕골제품이 있어 궁중과 상류계층에서 썼고 또 외국과의 중요한 교역품으로도 쓰였음을 알 수 있지요. 1991년 12월 31일 조사에 따르면 609호가 왕골 생산에 종사하여 20,624매의 꽃방석을 생산하였고, 206호가 종사하는 꽃삼합은 연간 30,371매를 생산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성종실록》 119권, 성종 11년(1480년) 7월 9일 “의금부에서 어을우동(於乙宇同, 어우동)과 간통한 방산수 이난 등을 죄줄 것을 아뢰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어우동과 놀아난 이난(李瀾)과 이기(李驥)는 종친이라 국문할 수도 없었고, 대신 먼 지방 한 곳을 지정하여 그곳에서만 머물도록 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관련된 중신들 모두 심문도 하지 않고 석방하거나 가벼운 처벌로 끝냈습니다. 하지만, 그해 10월 18일 어을우동은 교형(絞刑, 목 졸라 죽이는 형벌)에 처해 죽었지요. 어우동은 정3품 승문원 지사 박윤창의 딸로 효령대군의 손자인 태강수(泰江守) 이동(李仝)과 혼인하였던 여성입니다. 그녀는 태강수와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지만, 아들을 낳지 못하자 남편 태강수는 그녀를 외면하고 기생 연경비에 빠져들었습니다. 이에 어우동은 집안에 들인 은장이를 유혹하여 수시로 간통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태강수 이동이 분노하여 내쫓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종실의 사무를 관장하던 종부시(宗簿寺)에서 태강수가 종친으로서 첩을 사랑하다가 아내의 허물을 들추어 제멋대로 버렸다며 임금에게 고발했는데 이를 보면 어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내일은 24절기의 열한째로 하지와 대서 사이에 든 ‘소서(小暑)’입니다. 하지 무렵까지 모내기를 끝낸 벼는 소서 때쯤이면 김매기가 한창이지요. 요즈음은 농약을 쳐서 농사를 짓기 때문에 예전처럼 논의 피를 뽑는 일인 피사리나 김매기 하는 모습은 보기 어렵지만 여전히 예전 방식대로 농사를 짓는 농부들은 허리가 휘고 땀범벅으로 온몸이 파김치가 되는 때입니다. 이때 솔개그늘은 농부들에게 참 고마운 존재이지요. ‘솔개그늘’이란 날아가는 솔개가 드리운 그늘만큼 작은 그늘을 말합니다. 뙤약볕에서 논바닥을 헤매며 김을 매는 농부들에겐 비록 작은 솔개그늘이지만 여간 고마운 게 아닙니다. 거기에 실바람 한 오라기만 지나가도 볼에 흐르는 땀을 식힐 수 있지요.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소서 날 남을 위한 솔개그늘이 되어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이때는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는 철이므로 채소나 과일들이 풍성해집니다. 특히 시절 음식으로 즐기는 밀가루 음식은 이때 가장 맛나서 열무국수나 수제비를 즐겨 해 먹습니다. 채소류로는 호박이며, 생선류로는 민어가 제철인데 민어포는 좋은 반찬이 됩니다. 또 민어는 회를 떠서 먹기도 하고, 매운탕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요즘 생활한복 가운데는 서양의 원피스 같은 모양의 옷이 보입니다. 그것은 ‘철릭’이라 하여 남성들이 입던 전통옷을 개량한 것이지요. 전통 철릭의 기본형태는 웃옷과 주름잡은 치마를 허리 부근에서 연결시킨 것입니다. 곧은 깃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교차시켜서 여민 모양인 직령교임(直領交衽)의 특수형태이며, 원래는 관리들이 나라가 위태로울 때 또는 임금의 궁궐 밖 거동을 호위할 때 착용하는 융복(戎服)이었으나, 점차 일상적으로 입는 평상복이 되었지요. 조선 초기의 것은 소매통이 좁고, 웃옷과 아래 치마 길이의 비율이 1 : 1이며, 오른쪽 깊숙한 곳에 두쌍의 고름으로 여몄습니다. 또 비상시에 옷을 빨리 입을 수 있고 활동하기 편하게 고안된 실용적인 옷으로 한쪽 혹은 양쪽을 매듭단추로 연결하여 붙였다 떼었다 할 수 있고, 아래는 짧게 하여 이동할 때 불편함이 없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철릭은 시대에 따라 웃옷와 치마의 비율, 주름을 처리하는 방법, 소매의 모양에 변화가 있었습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로 아랫 부분은 더욱 길어지고 붙였다 떼었다 할 수 있었던 실용적인 소매의 기능은 사라지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허리에 약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2019년 국립중앙도서관은 “천자문, 종류가 이렇게나 많아요!” 전(展)을 열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글씨 교본으로서의 천자문(千字文)을 우리나라에서 펴낸 것은 110종이라고 합니다. 서예 대가로 알려진 한석봉(1543~1605)의 목판본 천자문은 정자체인 해서(楷書)의 글씨 교본으로 사용되었고 천자문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책입니다. 그런데 옛날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운 바로 뒤는 무슨 책으로 공부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조선 명종 때 학자 박세무(朴世茂)와 민제인(閔齊仁) 쓴 것으로 알려진 《동몽선습(童蒙先習)》이란 책이지요. 이 책은 《천자문》을 익히고 난 뒤의 아이들이 배우는 초급교재로, 앞에선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의 오륜(五倫)을 설명하였습니다. 그 뒤를 이어 중국의 삼황오제에서부터 명나라까지의 역사와 조선의 단군에서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역사를 간단하게나마 썼습니다. 특히 단군, 주몽, 왕건, 마의태자, 이성계 등의 인물들 이야기를 하며 자연스럽게 우리의 역사에도 접근할 수 있게 합니다. 물론 이 책은 중국 중심의 역사관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우리나라가 비록 땅은 좁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영조실록》 79권, 영조 29년 6월 25일 치 기록에 보면 ”숙빈(淑嬪) 최씨(崔氏)에게 화경(和敬)이라고 추시(追諡)하고, 묘(廟)는 궁(宮), 무덤은 원(園)이라 하였다. “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조선 21대 영조(英祖) 임금의 어머니는 무수리 출신으로 알려진 숙빈 최씨입니다. 당시 무수리는 궁중 하인 가운데서도 직급이 가장 낮아서 흔히 “궁녀의 하인”으로 불렸는데 어머니의 천한 신분 때문에 영조는 같은 왕자이면서도 이복형이었던 훗날 경종 임금이 되는 왕세자와는 전혀 다르게 주위의 은근한 멸시 받으며 자랐습니다. “붓을 잡고 글을 쓰려고 하니 눈물과 콧물이 얼굴을 뒤덮는다(涕泗被面). 옛날을 추억하노니 이내 감회가 곱절이나 애틋하구나.”라는 글은 영조 임금이 어머니 숙빈 최씨 무덤의 돌비석에 쓴 <숙빈최씨소령묘갈(淑嬪崔氏昭寧墓碣)>의 내용입니다. 영조임금은 이렇게 묘갈문을 직접 썼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 무덤가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한 효성이 지극한 임금으로도 알려졌습니다. 1724년 병약하던 경종이 후사 없이 33살에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조선 제21대 임금이 된 영조는 어머니 최 씨가 천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임금이 용천을 떠나 의주에 도착하여 목사(牧使)의 관청에 좌정하였다. 이때 고을 사람들이 평양이 포위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흉흉하여 두려워하더니 명나라 병사들이 강을 건너 성안으로 들어와 약탈하자 백성들이 모두 산골짜기로 피해 들어가 성안이 텅 비었다. 목사 황진(黃璡)과 판관 권탁(權晫) 등이 벼슬아치들과 관아의 여종 두어 명을 직접 거느리고서 임금의 수라(水剌)를 장만하였으며 호종한 관원들은 성안의 빈집에 분산 거처하였다. 꼴과 땔나무가 계속 조달되지 아니하여 비록 행재소라고는 하지만 적막하기가 빈 성(城)과 같았다.” 이는 선조 25년(1592년) 한양이 함락되기 사흘 전인 4월 30일 새벽 백성 몰래 궁궐 뒷문을 통해 한양을 나와 22일 뒤 의주에 도착했을 때의 기록입니다. 문제는 명나라가 조선을 구원해줄 것으로 생각한 선조의 뜻과는 달리 명나라 병사들은 성안으로 들어와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모두 산골짜기로 피해 들어가 성안이 텅 빌 수밖에 없었지요. 김영진이 교수가 쓴 책 《임진왜란(성균관대학교출판부)》에 보면 조선 중기의 문신ㆍ정치인이자 성리학자인 윤두수는 선조에게 일갈하는 내용이 나옵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시대 으뜸 풍속화가인 단원 김홍도의 풍속도첩 가운데 <무동(舞童)>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거기엔 무동이 춤을 추는데 위 맨 왼쪽에 좌고를 치는 이가 있으며, 그 오른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장구와 두 대의 향피리, 대금ㆍ해금이 연주합니다. 여기서 ‘향피리’란 중국에서 들어온 당피리에 견준 우리 고유의 피리를 말합니다. 그런데 <무동>의 그림에서 보는 이런 악기 편성이 삼현육각입니다. ‘삼현육각(三絃六角)’은 조선시대 궁중무용과 행진 음악, 지방 관청의 잔치, 높은 관리의 행차, 향교 제향 그리고 각 지방에서 신에게 제사 지낼 때 두루 쓰이던 민간의 주류음악이지요. 삼현육각은 <무동>에서처럼 6명으로 구성되지만. 경기ㆍ호남ㆍ해서ㆍ영남 등 지역에 따라 악기 종류, 편성인원, 음악적 특징, 악곡구성에 조금씩 차이를 보입니다. 삼현(三絃)이라 해서 3대의 현악기를 뜻하지는 않으며, 삼현육각이 주로 연주하는 음악이 <삼현영상회상>이어서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또 육각(六角)은 피리를 불고 북을 치는 6명의 연주자를 말합니다. 조선시대 민간음악의 주류를 이루던 삼현육각은 광복 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립경주박물관은 오는 7월 16일(일)까지 특별전시관에서 「천마, 다시 만나다」를 열고 있습니다. 그런데 김정기 천마총 발굴단장은 “‘아차! 나와서는 안 될 유물이 나왔구나!’ 하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지고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듯했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라고 1973년 발굴 당시를 회고했습니다. 천마도는, 하늘로 화려하게 날아오르는 백마처럼 보이는 말 그림입니다. 말다래는 말의 발굽에서 튀는 흙을 막기 위해 안장 밑으로 늘어뜨리는 판이지요. 신라의 예술혼이 즈믄해(천년)의 긴 세월 동안 암흑 속에서 살아있었던 세계적 유물 천마도. 김정기 단장은 유기물로 된 유물이 햇빛에 노출돼 미세한 가루로 변하여 감쪽같이 형태를 찾아볼 수 없었던 일을 경험했기에 또 그런 일을 당할까 봐 눈앞이 캄캄해진 것입니다. 심하게 썩은 상태였던 말다래. 발굴단은 겹친 말다래 사이로 여러 개의 대칼을 조심스럽게 꽂아 넣고 그 밑으로 켄트지를 끼워 넣습니다. 그렇게 해서 천마도 말다래를 무사히 걷어낸 다음 소독된 화선지로 쌓아 상자에 집어넣음으로써 숨죽였던 천마도 발굴을 끝낸 것입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아홉째 망종입니다. ‘망종(芒種)’이란 벼, 밀 같이 수염이 있는 까끄라기 곡식의 씨앗을 뿌려야 할 적당한 때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보리는 익어서 먹게 되고, 볏모는 자라서 심게 되니 망종이요.”라는 속담이 있는 망종 무렵은 보리를 베고 논에 모를 심느라 눈코 뜰 새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때는 “발등에 오줌 싼다.”라고 할 만큼 한해 가운데 가장 바쁜 철입니다. 그런데 보리 베기 전에는 ‘보릿고개’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 6월 7일 치 동아일보에도 ”300여 호 화전민 보리고개를 못 넘어 죽을지경"이라는 기사가 있었던 것이지요. 또 ‘보릿고개’를 한자로 쓴 ‘맥령(麥嶺)’과 더불어 ‘춘기(春饑)’, ‘궁춘(窮春)’, ‘춘빈(春貧)’, ‘춘기(春飢)’, ‘춘기근(春飢饉)’, ‘춘궁(春窮)’, ‘궁절(窮節)’ 같은 여러 가지 말들이 《조선왕조실록》에 자주 나옵니다. 이처럼 예전에는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망종 무렵 헐벗고 굶주린 백성이 많았습니다. 보리는 소화가 잘 안돼 ‘보리방귀’라는 말까지 생겼지만, 보리방귀를 연신 뀔 정도로 보리를 배불리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