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1. 당집 이태원 부군당에 속해 있는 구조물들은 당집을 중심으로 전각 앞마당에 서 있는 당나무, 전각 정문 앞의 비석, 하주청, 당지기 집, 서낭당 등으로 꾸며져 있다. 구조물들이 곳곳에 넉넉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은 부군당 터가 다른 지역보다 넓기 때문이다. 부군당에서 가장 핵심적 구조물은 당집이다. 당집을 들어서는 정문은 솟을대문이며 이 대문을 들어서기 위해서는 5계단으로 쌓아 올린 돌계단을 올라야 한다. 당집 전각 정면 중앙 처마 윗부분에 ‘府君廟(부군묘)’라고 가로로 새긴 나무 현판을 걸어 두었다. 단층으로 지어진 당집 전각 건축물 평수는 약 20평 이내의 규모이며 목재와 시멘트 콘크리트를 혼합하여 전통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웅장하고 장엄한 건축물이다. 당집 전각은 부군당에서 가장 우선시되는 본채로써 건축물로서 전각 내부에 부군할아버지 및 부군할머니를 비롯하여 모두 열두 분의 신격을 오색의 그림으로 그려 모셔놓고 있다. 당집 전각 건축물 사방에는 높다란 벽돌 담장이 둘러쳐 놓았다. 전각 앞마당은 대략 약 30여 평의 면적이며 바닥이 시멘트로 덮여 있다. 당집 전각 안에는 신령님들을 그림으로 그려 봉안하고 있다. 벽면 그림 아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부군당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신성하면서도 또한 무섭고 위엄 있는 곳으로 인식되어져 부군당 내부는 물론 주위 가까이도 쉽게 얼씬거리지도 못했던 곳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해마다 행해지는 정기적 의례가 행해지거나 특별하게 부군님을 찾아뵙고자 하는 날 이외에는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평상시에도 사람들은 부군당 앞을 지나가게 되면 부군님을 향해 두 손을 합장하여 경배하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부군님이 화를 내신다고 믿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험한 이곳을 늘 성스럽게 생각하게 되면서 나름대로의 부군당에 대한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금기들을 지키게 된 것이다. 이태원 부군당과 관련된 금기들은 부군당의 영험력을 과시하거나 주민들이 이곳을 더욱 신성시하고 경외감을 가질 수 있게 하는 내용들이다. 그뿐만 아니라 금기 중에는 자연친화적인 내용들도 있어 자연경관을 더럽히거나 훼손하는 행위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목적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태원 부군당에서 거행해 온 오래된 의례 전통을 이어가고 이를 전승하고자 하는 지역 사람들의 깊은 신앙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곳의 금기 내용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부군당 할아버지와 할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이태원에 지어진 제당은 무속적 신령을 모시고 있는 부군당이다. 이는 서울 곳곳에 있는 다른 부군당과 같은 기능을 갖고 있는 마을 신당이다. 이러한 부군당에서의 ‘부군’이라는 의미는 한민족이 이 땅에 삶을 영위하면서부터 구축해온 신앙의 모체로써 ‘빛’을 뜻하는 영적을 말한다. 따라서 한민족은 고대사회에서부터 빛을 통해 사상과 인생관을 설정하였고 이를 모체로 하여 신앙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는 궁극적으로 현세적 길복을 추구하고자 하는 삶의 풍요로움을 실천키 위함이다. 그런데 부군당의 ‘부군’이 한자어 府君, 府根, 府群, 付根, 富降, 符君 등 다양하게 표기되어 왔다. 이들 중, 가장 보편적으로 쓰였던 것이 ‘府君’이다. 이 용어가 등장한 것은 일제강점기때인 1937년 서울 무가를 조사한 아카마쓰 지조(赤松智城)ㆍ아키바 다카시(秋葉 隆)이 펴낸 《조선 무속(朝鮮巫俗)의 연구》에서 ‘부군말명(府君萬明)’이라는 용어가 쓰여지면서 부터이다. 알다시피, 무가는 순전히 구전으로 전승되어져 왔다. 이것을 활자화하는 것은 학식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무속현장의 용어들이 식자들에 의해 채록되어지면서 활자화되어 온 것이다. 그러면서 ‘부군’의 한자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이태원(梨泰院)은 외국인들이 붐비는 국제적 명소다. 새롭게 유입되는 외래문화에 힘입어 늘 새로운 문화가 창출되면서 국제 문화 교류의 마당 그리고 문화 창조 마당으로써의 기능을 하고 있다. 이곳에 우리 문화의 원형적 산실인 부군당이 이태원 2동에 자리하고 있다. 부군당은 현재의 하얏트호텔 근처에 있었던 남산 외인주택 자리에 있었다. 남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앞쪽의 화려한 한강수와 뒤쪽의 울창한 숲으로 우거진 남산을 배경으로 하여 이태원 일대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그런데 1917년(대정 6년) 일본제국주의가 부군당 터에 일본군 훈련소를 설치함에 따라 현재의 위치로 옮기게 된 것이다. 이태원 부군당이 현재 자리로 옮겨온 이 후에도 이곳의 당집은 전형적인 우리나라 마을 제당의 모습을 갖춘 조그마한 집 곧 약 다섯 평 남짓의 기와를 얹어 지은 1칸짜리 목조 건축물이 전부였다. 따라서 당시의 당집은 현재처럼 부군당 전각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도 없었으며, 당집의 높이도 그다지 높거나 장엄하지 않은 소박한 형태였다. 그런데 1967년 마을 사람들이 부군당을 새롭게 단장하면서 당의 규모를 늘리고 화려하게 단청을 하였으며 주의의 담장을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봉화산 도당굿은 원래 봉화산 자락에 거주하였던 여섯 개 마을 즉, 서 씨가 많이 살았던 서촌말(현재의 상봉동), 황 씨가 많이 살았던 황촌말(현재의 상봉동), 최 씨가 많이 살았던 최촌말(현재의 중화동), 파평 윤 씨가 많이 살았던 피울(현재의 신내동), 먹굴(현재의 묵동) 그리고 현 씨네 마을(현재의 면목동) 등이 힘을 합쳐 거행하였다. 그런데 먹굴은 떨어져 나갔고, 60년대 말 부터는 중화동과 상봉동 두 개의 주민들이 한 조직이 되고 신내동 등의 주민들이 한 조직이 되어 두 개 조직이 해거리(격년)로 번갈아 가면서 도당굿을 주관하였었다. 그런데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도당제보존위원회가 조직되어 행사를 주관하면서 중랑문화원과 중랑구청이 공식적인 주최와 후원을 하여 도당굿 재정을 도맡고 있다. 봉화산 도당굿은 오랜 전통에 따라 매년 음력 삼월 삼짇날 당일굿으로 치르는데 그 제차(차례)는 다음과 같다. ① 거리부정 - 산꼭대기 들머리에서 하며 일명 죽동부정이라고도 한다. 서서 행하기 때문에 선부정이라고도 말한다. ② 길군악 - 거리부정을 마친 후 잽이와 만신이 길군악에 맞춰 도당으로 올라간다. ③ 주당물림 - 당지기 집 앞 마당에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봉화산(烽火山)은 서울특별시 중랑구 묵동 산46-1번지에 있는 높이 160.1m의 산이다. 행정구역상 서울 동북부 외곽지역인 중랑구의 상봉동, 중화동, 묵동, 신내동에 접하여 있다. 이 산은 평지에 돌출된 독립 구릉이어서 한편에서는 ‘봉우재’라고도 부른다. 산 정상에는 조선시대 아차산(峨嵯山, 295.7m)의 봉수(烽燧)로 역할 하였던 봉수대(烽燧臺址, 1993년 11월 30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5호 지정)가 있다. 북쪽의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대이산(大伊山, 173m) 또는 한이산(汗伊山)에서 연락을 받아 서쪽의 남산(南山, 262m) 또는 목멱산(木覓山)으로 연락을 해 주는 구실을 했었다. 꼭대기에 오르면 동쪽에 아차산 봉우리가 있는 것을 빼고는 북쪽으로 불암산, 도봉산 그리고 양주 일대까지 조망이 잘되며, 서쪽과 남쪽으로도 높은 산이 없어서 남산과 이남 지역도 잘 보인다. 한편, 봉화산은 1963년 1월 1일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로 있었던 것이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었다. 봉화산 정상에는 마을을 수호하는 산신각이 있는데 이를 ‘봉화제도당’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재 이곳의 전각은 봉화(烽火)를 위해 있는 것은 아니며 오래전부터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서울 영등포 당산동 부군당에서 행하는 당제는 해마다 두 차례 행해진다. 간단한 치성으로 모시는 음력 7월 초하루 치성과 큰굿으로 행하는 10월 초하루에 당굿이 그것이다. 당제를 지내기 위해서는 이곳 마을 사람들로 조직된 당산향우회가 토박이를 대상으로 제주와 소임 그리고 총무 및 재무를 뽑는다. 먼 곳으로 이사를 떠난 사람들도 당제에 참여한다. 2001년 당굿에서는 제주 황인균, 총무 김혁구, 재무 염창학이며 소임으로는 송문수, 박수원, 심춘수, 송승성, 박윤웅, 김정택, 김영석, 류영득, 김택기, 임순성, 장석자가 뽑혔고, 5년 뒤인 2006년에는 제주, 송승성, 총무 김혁구, 재무 염창학이었으며 소임으로는 염창수, 신일길, 김영석, 송문수, 예재은, 김정택, 유영득, 신충현이 선정되었다. 선정된 제주와 소임은 당제 일주일 전부터 부정한 일이 없어야 하고 내외간 동침도 금하여야 한다. 상갓집이나 흉사에도 가지 않고 근신해야 하면서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하여야 한다. 그래야만 정성 들여 지낸 당제 효험을 본다고 믿는다. 당 주변에는 붉은 황토를 깔아 부정한 인간이나 동물들의 칩임을 막고 출입구에도 금줄을 쳐서 좋지 못한 해로운 액을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삼각산 도당굿 제차 삼각산 도당굿을 하기 위해서는 전날 오후 도당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다리에서 거리제를 먼저 지낸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다시 다리에서 황토 물림을 한 후에 당굿을 시작한다. 삼각산 도당굿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거리제 - 거리의 홍액을 막고 도당으로 들어가는 길을 튼다. 2) 황토물림 - 도당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황토를 뿌려서 좋지 못한 해로운 액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3) 주당물림 - 쇳소리 가죽소리를 내어 굿의 시작을 알리고 도당을 정화한다. 4) 앉은청배 - 만신이 장구를 치면서 모든 신을 불러들인다. 5) 산신거리 - 삼각산 산신 및 모든 산신을 모셔 놀린다. 6) 도당모셔오기 - 도당할아버지와 도당할머니를 굿당으로 모셔 온다. 7) 만신말명거리 - 당주만신ㆍ삼각산 도당과 관련된 말명신을 놀린다. 8) 불사거리 – 불사신을 모시고 놀린 후, 신장, 대감, 창부 등을 놀린다. 9) 대감거리 - 대감시루의 팥시루떡을 반쯤 꺼내어 흰 보자기에 싸서 짊어지고 흥겹게 대감신을 놀린다. 10) 작두장군거리 - 쌍작두를 타고 공수를 내린다. 11) 사냥거리 - 사냥을 나가 노루, 닭 등을 잡아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삼각산 도당굿은 해마다 음력 3월 초하루부터 초열흘 사이에 좋은 날 하루를 골라 연다. 그러나 2000년 이후부터는 매년 음력 삼월 제비 오는 삼짇날(3월 3일)로 고정하였다. 과거의 당굿은 모든 마을 사람들이 참석하였을 정도로 굿판이 북적거렸고, 아이들도 새 옷으로 갈아입고 부모님을 따라 나왔다. 인근의 마을 사람들도 참관하여 장관을 이루어서 아침에 시작한 당굿이 다음 날 아침까지 이어졌었다. 참여자들도 많고 밤새도록 무감 서기(굿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무당이 입던 신복을 입히고 신굿을 추게 하는 것)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즈음은 참여자가 옛날과 같지 않고 당굿도 밤늦게까지 하더라도 당일로 끝내고 만다. 삼각산 도당굿에서는 도하주, 이하주, 삼하주 등의 제관 그리고 제관을 보좌하는 소임을 뽑는다. 당굿 당일 날 도당신 앞에서 뽑아 두었다가 다음 해의 당굿에서 역할 하게 한다. 은행알에 하주 또는 소임이 될만한 후보자 이름을 써서 조롱박 속에 넣고 흔들어서 제일 먼저 나오는 은행알의 주인공이 도하주가 된다. 도하주를 상하주라고도 한다. 이하주는 중하주, 삼하주는 소하주가 된다. 두 번째 은행알 주인공은 이하주가 되고 세 번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삼각산(三角山)은 높이 837m에 이르는 북한산(北漢山)의 다른 이름이다. 서울특별시 강북구와 경기도 고양시의 경계에 있으며, 최고봉 백운대(白雲臺)를 중심으로 북쪽에 인수봉(仁壽峯), 남쪽에 만경대(萬景臺) 등 세 개 봉우리가 우뚝 서 있다. 그래서 삼각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산(漢山), 화산(華山)이라는 이름도 있으며, 신라 시대에는 부아악(負兒嶽)이라고도 하였다. 삼각산에는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산에 올라 살 만한 곳을 찾았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고, 조선조 개국 때는 무학대사가 도읍지를 정하면서 북한산 최고봉인 백운대 올라 그 맥을 찾아 만경대에 올랐다가 서남쪽으로 비봉(碑峯)에 이르렀다고 하여 이곳 만경대를 한편에서는 국망봉(國望峯)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삼각산(북한산) 밑자락에 있는 도선사 입구 왼쪽에는 마을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제를 지냈던 약 80여 평의 도당 터가 있다. 이곳에 도당신(都堂神)으로 모셔지는 도당할아버지와 도당할머니를 모시고 매년 도당제를 지내 온 지 오래되었다. 옛 도당 터에는 초가 토담집으로 된 당집이 있었지만 6.25 사변 때 없어지고 말았다. 초가였던 도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