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우리는 평생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삽니다. 손안에는 더 많은 소유를, 머릿속에는 더 다양한 지식을, 마음속에는 더 많은 욕망을 채워 넣어야 비로소 안심되곤 합니다. 그러나 턱끝까지 차오른 소유의 포만감이 우리를 진정 자유롭게 하던가요?. 오히려 꽉 찬 방 안에서는 숨을 쉬기 어렵듯, 과잉된 삶은 종종 우리 영혼의 산소를 앗아갑니다. 역설적으로 비어 있기에 가득 찬 찰나의 경지가 있습니다. 한국화의 미덕은 화폭을 가득 채우지 않는 여백에 있습니다. 그 비어 있는 공간은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상태가 아니라, 보는 이의 상상력이 파도치고 바람이 드나드는 유(有)의 공간입니다. 우리 삶도 이와 같습니다. 빽빽한 일정표 사이에 틈을 내고, 움켜쥐었던 손동작을 잠시 멈출 때, 그 빈자리로 비로소 나라는 존재의 본질이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소란스러운 소망들을 비워낸 자리에 고요가 들어차는 것, 그것이 바로 충만한 비움의 시작입니다. 조각가가 돌을 깎아내는 것은 무언가를 더하기 위함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어 그 안에 숨겨진 형상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삶에서 비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타인의 시선, 부질없는 집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세상은 거대한 파도와 같아서, 때로는 감상적인 이상(理想)만으로는 그 물결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한비가 우리에게 건네는 통찰은 차갑고도 단단합니다. 인간의 본성이 이기심(利己心)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보이지 않는 관계의 역학을 읽어내는 것. 그것은 비정함이 아니라, 오히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준엄한 생존의 기술입니다. 우리는 흔히 진심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영혼에 너무 깊숙이 발을 들여놓곤 합니다. 하지만 한비는 말합니다. 상대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될 거꾸로 선 비늘, 곧 '역린(逆鱗)'이 존재한다고 말입니다. 진정한 처세는 상대의 비위를 맞추는 아첨이 아니라, 그가 가진 고유한 경계를 존중하는 절제에서 시작됩니다. 말의 무게를 다스리고 침묵의 때를 아는 것, 그것은 타인을 향한 가장 고결한 배려이자 나를 화(禍)로부터 보호하는 단단한 성벽입니다. 세상은 단 한 순간도 멈추어 있지 않습니다. 어제의 정답이 오늘의 오답이 되고, 한때 나를 구원했던 방식이 이제는 나를 옥죄는 굴레가 됩니다. 과거의 영광이라는 그루터기에 앉아 우연한 행운을 기다리는 수주대토(守株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장자(莊子)는 ‘허실생백(虛室生白)’이라는 아름다운 구절을 남겼습니다. "빈방에 하얀빛이 가득 찬다"라는 뜻입니다. 방이 가구와 잡동사니로 가득 차 있으면 아무리 밝은 햇살이 내리쬐어도 빛이 머물 공간이 없지만, 방을 깨끗이 비워내면 비로소 사방에서 환한 빛이 들어와 가득 고인다는 이야깁니다. 현대인의 마음은 늘 무언가로 꽉 차 있습니다.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욕심,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강박, 그리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걱정들까지. 우리는 마음이라는 방에 쉴 새 없이 짐을 들여놓습니다. 하지만 장자는 말합니다. 마음의 방에 물건이 너무 많으면, 정작 그 방의 주인인 내가 편히 쉴 공간조차 사라진다고 말이지요. 가득 찬 방은 어둡고 답답할 뿐입니다. 지혜는 채우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집을 지을 때 어느 집이나 창문을 냅니다. 창문이 정말 쓸모 있는 이유는 유리나 창호로 막힌 모양이 아니라 그 안의 비어 있음입니다. 비어 있기에 빛을 받아들일 수 있고, 바람을 들일 수 있으며, 밖의 멋진 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부족해, 더 채워야 해’라고 스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속담에 뚝‘배기보다 장맛’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겉모양은 투박하고 거칠어도 그 속에 담긴 내용이나 본질이 진국일 때 쓰는 말이지요. 세상은 갈수록 반짝이는 것들에 열광합니다. 매끈한 도자기 같은 얼굴, 화려한 이력서, 번듯한 차림새... 우리는 너도나도 예쁜 그릇이 되기 위해 애쓰며 삽니다. 하지만 정작 배가 고프고 마음이 허기진 날 우리를 살리는 것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투박한 뚝배기 속의 된장찌개 한 그릇입니다. 뚝배기는 도자기처럼 매끄럽지 않습니다. 거친 흙으로 빚어 투박하고, 때로는 불길에 그을린 자국도 남아 있지요. 하지만 그 거친 표면의 미세한 숨구멍은 장(醬)이 맛있게 익어가도록 숨을 쉬게 해줍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매끈하고 빈틈없는 사람보다, 삶의 굴곡을 겪으며 생긴 적당한 주름과 투박한 손마디를 가진 사람에게 더 정이 갑니다. 그것은 그 거친 껍데기 안에 세월이라는 불길을 견뎌낸 진짜 사람 냄새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뚝배기의 진가는 불 위에서 내려온 뒤에 드러납니다. 얇고 화려한 그릇은 금방 뜨거워졌다가 이내 차갑게 식어버리지만, 두꺼운 뚝배기는 오랫동안 온기를 품습니다. 진정한 인연 또한 뚝배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우리는 타인과 연결될 때 안도감을 느끼며, 때로는 거대한 집단의 일원이 되어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군중이라는 거대하고 매혹적인 파도는 종종 개인의 비판적 사고를 삼켜버리고, 우리를 이성 없는 흐름으로 전락하게 만듭니다. 군중심리의 가장 무서운 점은 익명성입니다. 수많은 사람 속에 섞여 있을 때, 개인은 자신의 행동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 믿으며 평소보다 과감하고 공격적인 성향을 드러냅니다. 개별적인 존재로서 가졌던 도덕적 책임감은 집단 전체로 흩어져 증발해 버립니다.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하는 것"이라는 착각은 무고한 이에게 돌을 던지게 하고, 누군가를 무분별하게 찬양하거나 비난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다수의 선택이 곧 '정답'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이 한 방향을 가리킬 때, 혼자서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데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과정에서 개인은 집단에서 배제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눈과 귀를 대중의 의견에 스스로 맞춥니다. 이것이 바로 동조 현상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증명합니다. 다수가 항상 정의는 아니었으며,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인류의 시원부터 폭력은 늘 존재해 왔습니다. 그 원시적인 폭력이 집단화되고 거대화될 때, 우리는 그것을 전쟁이라 부릅니다. 구석기 시대의 폭력은 전쟁이라기보다 생존을 위한 처절한 충돌이었습니다. 인구 밀도가 낮아 마주칠 일조차 드물었으나, 기후 변화로 사냥감이 줄거나 안락한 동굴을 지켜야 할 때면 인간은 생존을 걸고 사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인류가 농경을 시작하고 정착하면서 전쟁은 비로소 조직화합니다. 정착은 곧 소유의 탄생을 의미했습니다. 비축된 식량과 비옥한 토지는 타 집단에게 매력적인 약탈 대상이 되었고, 신석기 유적에서 발견되는 깊은 해자와 단단한 성벽은 당시 외부의 침략이 얼마나 일상적이고 위협적이었는지를 증명하는 서글픈 흉터입니다. 석기시대 후기로 갈수록 전쟁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수단을 넘어, 명예와 복수, 그리고 상징으로 대변되는 종교와 이데올로기의 영역으로 진입합니다. "조상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라거나 "우리의 신이 이 땅을 허락했다"라는 명분은 전쟁을 정당화하는 강력한 동력이 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전사 계급이 생겨나고 전문적인 살인 무기가 등장하며, 전쟁은 하나의 견고한 사회적 구조로 자리 잡게 됩니다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겨울의 묵직한 외투를 벗어 던진 대지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쉴 때, 지표면 어디쯤에선가 투명한 아지랑이가 일렁이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대지가 겨우내 품어온 뜨거운 생동감이 밖으로 터져 나오는 봄의 지문(指紋)이자, 잠든 생명을 깨우는 고요한 합창입니다. 아지랑이는 형체도 없고 색깔도 없지만, 세상의 풍경을 가장 아름답게 흔들어 놓습니다. 메마른 논둑길 위로, 혹은 보리밭 사잇길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면 딱딱했던 세상의 경계는 이내 부드러워집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깝지만, 다가가면 신기루처럼 멀어지는 그 움직임은 마치 대지가 추는 느릿한 춤사위와 같습니다. 아지랑이 너머로 보이는 원경(遠景)은 마치 덜 마른 수채화처럼 번져 나가고, 그 일렁임 속에서 세상은 잠시 현실의 무게를 잊은 채 몽환적인 꿈을 꿉니다. 아지랑이는 단순히 공기의 밀도 차이가 만들어낸 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차가운 흙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려 애쓰는 씨앗들의 거친 호흡이며, 얼어붙었던 강물이 풀리며 숨 쉬는 안도감입니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는 것은, 땅속 깊은 곳에서 이미 봄의 맥박이 힘차게 뛰기 시작했다는 증거입니다. 햇살이 지면을 애무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시인 이상화는 “빼앗을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노래했지만 철원은 6.25를 통하여 빼앗은 들인데…. 그 빼앗은 들에도 봄이 오고 있습니다. 겨울의 끝자락이 유난히 길고 매서운 곳, 그래서 그 땅에 찾아오는 봄은 그 어느 곳보다 절절하고 극적입니다. 한반도의 허리, 철원의 봄은 단순히 계절의 바뀜을 넘어선 생명의 승리와도 같습니다. 철원의 봄은 소리로부터 시작됩니다. 꽁꽁 얼어붙었던 한탄강의 주상절리 사이로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깨지는 파열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지요. 수만 년의 세월을 견딘 현무암 협곡 사이로 흐르는 옥빛 물줄기는, 겨우내 멈췄던 대지의 혈관이 다시 뛰기 시작했음을 알립니다. 차가운 강물 위로 피어오르는 물안개는 마치 대지의 긴 안도의 한숨 같습니다. 철원의 봄은 색깔로 기억됩니다. 철원평야의 드넓은 벌판이 누런빛을 벗고 옅은 연둣빛으로 물들어 갈 때, 그 위를 수놓는 것은 이제 떠나갈 준비를 하는 두루미들의 우아한 날갯짓입니다. 사람의 발길이 닿기 어려운 비무장지대(DMZ) 안쪽에는 얼레지, 바람꽃, 얼음새꽃 같은 들꽃이 수줍게 고개를 내밉니다. 가장 치열했던 전쟁의 상처 위로 가장 부드러운 꽃잎이 돋아나는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아직도 아침저녁으로 한기가 가시지 않은 삼월 말 서둘러 봄이 먼저 상륙하는 남해를 찾았습니다. 내가 사는 곳은 아직 동토의 끝자락이 남아 있는데 남해는 진달래, 개나리, 목련이 화사한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반가웠던 것은 등산로에 앙증맞게 피어난 변산바람꽃 몇 송이였습니다. 모두가 움츠러든 계절, 변산바람꽃은 두터운 낙엽을 들치고 고개를 내밉니다. 화려한 색채도, 거창한 몸짓도 없지만 그 정갈한 하얀 꽃잎은 보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줍니다. "이제 곧 봄이 올 거야, 그러니 조금만 더 힘내"라고 말해주는 친구의 따뜻한 손길을 닮았으니까요. 가느다란 줄기는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지만, 절대 꺾이지 않습니다. 차가운 얼음장을 뚫고 나오는 그 가냘픈 생명력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진정한 강함은 겉모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간절한 의지에 있다고 말이죠. 우리 삶의 겨울이 길게 느껴질 때, 변산바람꽃은 조용히 응원을 건넵니다. 변산바람꽃은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피어나지만,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선물합니다. 둥글게 감싼 연녹색의 포엽, 그 위로 수줍게 앉은 하얀 꽃잎 보석처럼 박힌 보랏빛 수술…. 이토록 정성스러운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십팔사략(十八史略, 원나라 증선지-曾先之가 펴낸 중국의 역사서)》에는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의 이야기, 곧 ‘관포지교(管鮑之交)’가 나옵니다. 관중과 포숙아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장사를 했습니다. 관중은 항상 이윤을 더 많이 가져갔고, 장사에도 종종 실패했습니다. 남들이 관중을 탐욕스럽거나 어리석다고 손가락질할 때, 포숙아는 결코 그를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관중이 이윤을 많이 가져가는 것은 집안이 가난하기 때문이고, 장사에 실패하는 것은 때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인간관계에서 누군가의 단점이나 실수를 볼 때,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결과만을 보고 쉽게 판단합니다. 그러나 포숙아는 그 행동 뒤에 숨겨진 상황과 본질적인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진정한 관계는 비난과 단죄가 아닌, 이해와 통찰 위에서 꽃피울 수 있습니다. 포숙아의 이 무조건적인 믿음이 관중에게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세(勢)가 되어줍니다. 두 사람은 각각 다른 주군을 섬기게 되면서 잠시 떨어져 지냅니다. 훗날 제나라의 군주가 된 제 환공(桓公)은 포숙아를 재상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포숙아는 단호히 거절하며 이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