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경제학 교수라고 해서 모두 부자는 아닙니다. 어떤 분야에 전문가라고 하더라도 현실과의 괴리감은 있게 마련이지요. 같은 의미로 조향사는 향기를 소유하지 않습니다. 가장 매혹적인 향수를 배합하는 조향사의 몸에서는 정작 아무런 향취도 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향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의 냄새를 비워두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팽창을 계산하고 수억 광년 떨어진 성단의 일생을 기록하는 천문학자는 그 광활한 우주를 바라보고 연구하지만 정작 발을 딛고 선 땅 위에서는 단 한 평의 정원조차 갖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무한(無限)을 사유한다고 해서 그 무한이 그의 영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으로 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 시인은 정작 현실에서는 지독한 고독 속에서 차가운 차 한 잔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합니다. 사랑의 본질을 언어로 빚어내기 위해 스스로 외로움이라는 용광로 속에 집어넣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富)를 연구하는 자가 부유하지 않고, 빛을 연구하는 자가 눈부시지 않듯, 가르치는 자의 위대함은 가진 것이 아니라 그가 보여주는 세계의 깊이에 있습니다. 가르침은 기계적인 지식의 전달을 의미하는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매독환주(買櫝還珠)’는 상자만 사고 진주를 돌려준다는 의미입니다. 주객(主客)이 전도된 경우를 이야기하지요. 우리는 때로 눈부신 껍데기에 매료되어 그 안에 담긴 침묵의 본질을 잊곤 합니다. 한비자(韓非子)에는 매독환주(買櫝還珠)의 우화가 나옵니다. 초나라의 한 장사꾼이 진주를 팔기 위해 난초 향이 배어나는 좋은 나무로 상자를 만들었습니다. 그 상자에 금과 은으로 무늬를 새기고 장식하니, 진주보다 상자가 더 찬연히 빛났습니다. 그것을 본 정나라 사람이 값을 치르고 상자를 샀지만, 그 안의 진주를 꺼내 장사꾼에게 되돌려주었습니다. "상자가 아름다워 샀을 뿐, 진주는 필요 없소."라는 말과 함께 말입니다. 주를 팔기 위해 상자를 꾸몄던 상인은 횡재를 하지요. 이 이야기는 비단 어리석은 정나라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은 어쩌면 수많은 매독환주로 점철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기 위해 대화를 시작하지만, 진실한 공감보다는 세련된 말투와 화려한 수식어에 집착합니다.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반지를 준비하지만, 정작 중요한 사랑의 맹세보다 보석의 크기와 상표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본질인 진주를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옛날 사람들은 사서(四書)를 중심으로 공부에 매진하였습니다. 그 중심 내용은 나의 인격을 어떻게 가꾸어 가느냐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징요. 문제를 풀고 점수를 많이 얻어 남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인데 그것을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고 부릅니다. 곧 자신을 위한 공부라는 뜻입니다. 세상이라는 화려한 무대 위에서 우리는 종종 길을 잃습니다. 타인의 박수갈채에 목말라하며 나를 증명하려 애쓰는 삶과, 고요한 방 안에서 묵묵히 내면의 등불을 밝히는 삶. 공자는 이 두 갈래 길을 ‘위인지학’과 ‘위기지학’이라는 정갈한 언어로 나눕니다. 위인지학(爲人之學)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공부입니다. 남이란 타인의 시선, 사회적 명성, 혹은 나를 향한 기대치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때로 내면의 갈증을 채우기보다 남들에게 보여줄 화려한 스펙을 채우는데 더 많은 시간을 쏟습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비교의 잣대 위에서 스스로 불행해하기도 합니다. 마치 뿌리 깊지 않은 나무가 화려한 조화(造花)를 매달고 있는 것과 같지요. 반면 위기지학은 나를 위한 공부입니다. 이는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의 인간다움을 완성해 가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삼국지를 읽다 보면 영웅들의 웅장한 서사가 펼쳐집니다. 그 정점에는 ‘적벽대전’이 있지요. 그날 제갈량은 도술을 부리듯이 동남풍을 불러옵니다. 동남풍이 불지 않으면 천하의 지략도 한낱 종이호랑이에 불과했던 그 겨울밤, 적벽강가는 차가운 침묵에 잠겨 있었습니다. 제갈량이 칠성단 위에서 소매를 휘날리며 하늘을 우러러보던 그 장면은, 천 년이 흐른 지금도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박제되어 우리 뇌리에 박혀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적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단순히 신비로운 도술이 아니라 정교한 준비의 결정체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은 제갈량이 바람을 불러왔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초월적인 힘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짜릿한 반전을 원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공명이 칠성단에 오르기 전, 그가 한 일은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장강의 물결이 바뀌는 주기, 계절의 끝자락에서 대기가 뒤틀리는 찰나의 징후, 그리고 구름의 흐름 속에 숨겨진 습도의 변화를 읽어내는 것이었죠. 남들이 보지 못하는 데이터를 읽는 눈, 그것이 그가 부린 유일한 술법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늘이 돕는 운을 천운이라 부르며 손을 놓아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공명에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지도는 종이 위에 그려지지만, 지명은 사람의 피와 눈물로 새겨집니다. 백두산에 오를 때입니다. 중국 길림성 용정을 방문했지요. 그곳에는 우리에게 선구자라는 노래로 알려진 많은 지명이 있습니다. 선구자(先驅者) 일송정(一松亭) 푸른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海蘭江)은 천 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머무나 용두레 우물가에 밤이슬 내릴 때 그리운 검은 머리 서글프게 웃는다 그 옛날 국경을 넘던 그날의 그 노래 말굽 소리 시원하게 들리던 그 노래 비암사(琵岩寺) 쇠북소리 허공에 울려 퍼져도 그날의 굳은 약속 어데로 갔나 거친 들 달려가던 그 기상 어디에 우리 님 오실 날을 기다려 보노라 선구자의 구(驅)는 말 달릴 ‘구’자입니다. 먼저 앞서서 말을 달리는 사람을 선구자라고 부르지요. 남의 앞에 선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외로운 일인가 하는 중요성을 내포하고 있는 낱말입니다. 해란강 굽어보는 비암산 정상, 외롭게 서 있던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독립군들이 사격 연습을 하며 지표로 삼았던 겨레의 눈동자였고 멀리서 고향을 그리며 찾아온 유랑민들에게는 '여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밤공기가 차가운 창경궁의 서재, 집경당의 촛불은 꺼질 줄 모릅니다. 그 불빛 아래 앉은 정조의 시선은 화려한 궁궐이 아닌, 백성들의 거친 손마디와 이름 없는 이들의 고단한 숨소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의 사랑은 아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뒤주 속에서 스러져간 아버지의 비극을 눈으로 보고 자란 소년은, 증오 대신 세상의 모든 눈물을 닦아주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자신이 겪은 지독한 외로움을 타인의 온기로 바꾸려 했던 정조에게, 백성은 통치의 대상이 아니라 지켜야 할 가족이었습니다. 정조는 스스로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불렀습니다. 하늘의 달이 만 개의 시냇물을 차별 없이 비추듯, 그의 사랑은 신분과 처지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서얼들에게 규장각의 문을 열어 재능을 펼치게 했고, 노비들의 가혹한 처우를 개선하며 그들의 인간적 존엄을 고민했습니다. 어린아이들을 보살피는 자휼전칙(정조가 흉년 등으로 인해 구걸하는 아이들을 구호하기 위해 제정하여 온 나라에 반포한 우리나라 처음 독립된 아동복지법령서)을 세울 때는 마치 자식을 걱정하는 어버이의 심경으로 붓을 들었습니다. 정조의 인간 사랑이 가장 찬란하게 꽃핀 곳은 수원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세상은 끊임없이 속도와 화려함을 성취하라 유혹하지만, 현자의 시선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본질을 향합니다. 그는 계절이 바뀌는 섭리에서 영원을 읽고, 길가에 굴러다니는 이름 없는 돌멩이 하나에서도 우주의 질서를 발견합니다. 그의 삶은 요란한 축제가 아니라, 깊은 밤 홀로 타오르는 촛불처럼 형형하고 평온합니다. 현자는 바삐 움직이는 것만이 삶의 정답이 아님을 압니다. 때로는 멈춰서 바람의 방향을 살피고, 자신의 발자국이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봅니다. 쥐어야 할 것과 놓아야 할 것을 구별하는 명징한 눈.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부드러운 힘. 타오르는 분노나 깊은 슬픔조차 한 발짝 떨어져 지켜보는 넉넉한 마음. 그에게 삶은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온몸으로 겪어내야 할 아름다운 순례입니다. 현자는 침묵으로 웅변하고, 비움으로 소유합니다. 그의 언어는 간결하되 깊습니다. 수천 마디의 말로 자신을 방어하기보다 한 번의 깊은 침묵으로 진실을 드러냅니다. 또한 그는 소유가 곧 구속임을 알기에, 손에 쥔 것을 놓을 줄 압니다. 역설적으로 손을 비울 때마다 세상은 더 풍요로운 영감으로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경주마의 눈가에는 차안대라는 작은 가죽 조각이 덧대어져 있습니다. 것은 말의 시야를 좁혀 옆에서 달려오는 경쟁자의 기세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결승선이라는 단 하나의 점만을 향해 폭주하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각자의 생이라는 트랙 위에서, 보이지 않는 차안대를 찬 채 옆을 보는 법을 잊어버린 경주마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경주마는 자신이 달리는 트랙 옆에 어떤 들꽃이 피었는지, 구경꾼들의 눈빛에 어떤 응원이 서려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오직 채찍 소리와 앞서가는 말의 뒷모습만이 세계의 전부가 됩니다. 우리 역시 속도와 효율이라는 채찍에 쫓겨, 나란히 걷고 있는 이의 손을 외면하고 계절이 바뀌는 길목의 서정을 놓치곤 합니다. 성공이라는 결승선은 선명해질지 모르나, 그 과정에서 만날 수 있었던 수많은 곁의 온기는 시야 밖으로 밀려나 버립니다. 하지만 진정한 삶의 지도는 결승선에 도착했을 때가 아니라, 잠시 멈춰 서서 눈가의 가리개를 벗어 던질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좁아졌던 시야가 넓어지는 순간, 비로소 세상을 가득 채운 천연색의 풍경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옆에서 함께 숨 가쁘게 달리고 있던 동료의 젖은 어깨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어스름한 역사의 지평 위로 두 개의 태양이 떠오릅니다. 하나는 만물을 태워버릴 듯 광기 어린 열기를 내뿜고, 다른 하나는 대지의 숨결을 어루만지며 잠든 생명을 깨웁니다. 전자를 혼군(昏君)이라 부르고 후자를 성군(昏君)이라 부릅니다. 혼군의 시대는 고립된 성벽과 같습니다. 군주의 눈은 아첨이라는 안개에 가려져 세상의 허기를 보지 못하고, 그의 귀는 간신들의 감언이설에 갇혀 백성의 신음을 듣지 못합니다. 그에게 권력이란 백성을 지키는 방패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잔입니다. 잔이 넘칠수록 백성의 눈물은 흐르고, 궁궐이 화려할수록 민초의 한숨이 늘어납니다. 혼군이 다스리는 나라는 겉으론 화려하지만, 서서히 침몰하는 난파선과 같아서, 밤은 깊으나 새벽이 올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반면 성군의 시대는 막힘없이 흐르는 강물과 같습니다. 성군은 자신의 보좌를 가장 낮은 곳에 둡니다. 높은 곳의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그의 통치는 백성의 아픔이 고인 곳으로 자연스레 스며듭니다. 그는 백성의 근심을 자신의 불면으로 바꾸고, 백성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삼습니다. 성군의 언어는 서슬 퍼런 명령이 아니라, 시대를 읽는 혜안과 타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우리는 평생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삽니다. 손안에는 더 많은 소유를, 머릿속에는 더 다양한 지식을, 마음속에는 더 많은 욕망을 채워 넣어야 비로소 안심되곤 합니다. 그러나 턱끝까지 차오른 소유의 포만감이 우리를 진정 자유롭게 하던가요?. 오히려 꽉 찬 방 안에서는 숨을 쉬기 어렵듯, 과잉된 삶은 종종 우리 영혼의 산소를 앗아갑니다. 역설적으로 비어 있기에 가득 찬 찰나의 경지가 있습니다. 한국화의 미덕은 화폭을 가득 채우지 않는 여백에 있습니다. 그 비어 있는 공간은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상태가 아니라, 보는 이의 상상력이 파도치고 바람이 드나드는 유(有)의 공간입니다. 우리 삶도 이와 같습니다. 빽빽한 일정표 사이에 틈을 내고, 움켜쥐었던 손동작을 잠시 멈출 때, 그 빈자리로 비로소 나라는 존재의 본질이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소란스러운 소망들을 비워낸 자리에 고요가 들어차는 것, 그것이 바로 충만한 비움의 시작입니다. 조각가가 돌을 깎아내는 것은 무언가를 더하기 위함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어 그 안에 숨겨진 형상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삶에서 비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타인의 시선, 부질없는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