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가을은 궁궐의 계절이다. 성큼 찾아온 가을 날씨를 만끽하며 궁을 걷다 보면, 문득 이 나무, 저 돌이 궁금해진다. 궁궐 안에 있는 기물 하나하나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면, 이미 ‘궁궐 덕후’의 대열에 들어선 것이다. 김서울이 쓴 책, 《아주 사적인 궁궐 산책》의 지은이는 ‘궁궐 덕후’다. 궁궐에 있는 나무 한 그루, 돌 하나까지 애정이 듬뿍 담긴 눈으로 아로새긴다. 스스로 ‘박물관을 좋아하는 유물 애호가’라 소개하는 만큼, ‘우리나라 대표 유물’이라 할 만한 궁궐 사랑도 만만치 않다. 이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 ‘지극히 주관적인 궁궐 취향 안내서’는 ‘궁에 스며드는’ 궁궐의 매력을 다채롭게 소개한다. 제2장 ‘궁궐의 돌’ 편에서는 궁궐의 돌짐승과 월대, 돌다리 등을 다룬다. 제3장 ‘궁궐의 나무’에서는 궁궐 곳곳에서 빛을 발하는 나무들과 꽃을 담았다. 가끔 궁궐에 가면 산림욕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본 적이 있을 것이다. 특히 창덕궁 같은 곳은 숲이 우거져 도시 속 녹취를 느끼고 싶을 때 딱 좋은 곳이다. 제4장 ‘궁궐의 물건’ 편은 왕실 사람들이 궁궐에서 썼던 다양한 물건을 다룬다. ‘왕실 실내장식’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조선시대 공무원?! 지금보다 사회가 다원화되지 않았던 조선시대, 하지만 ‘나랏일’은 지금보다 더 거대하고 엄중한 일이었다. ‘관청’과 ‘관리’의 위상이 아주 높았고 나라의 많은 부분을 관청에서 관장했다. 그러면 조선시대 관청의 직제와 구성은 어떠했을까? 박영규가 쓴 책, 《조선시대에는 어떤 관청이 있었을까?》는 이런 궁금증을 한껏 풀어주는 책이다. 사극을 봐도 이런저런 관청과 벼슬의 이름이 나오지만, 따로 책을 읽지 않으면 이 부분을 자세히 알기는 어렵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조선시대 관청의 세계’를 자유롭게 노닐며 익히게 해 주는 유익한 책이다. 책의 구성은 크게 1장, ‘조선의 중앙 관청’과 2장, ‘조선의 지방 관청’으로 나뉜다. 중앙관청 편에서는 의정부와 6조, 언론 삼사(사간원, 사헌부, 홍문관)를 비롯해 세자궁의 관청, 조선의 학문 기관, 그 밖의 주요 관청, 소규모 중앙 관청 등을 소개한다. 2장에서는 도, 부, 목, 도호부, 군, 현 등 각 지방을 관할하던 관청과 이방, 호방, 형방, 예방, 병방, 공방 등 지방 관아에서 일하던 아전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국방을 관장하던 병조의 지방 관직인 병마절도사, 병마절제사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위기에 강한 지도자. 흔히 이상적인 지도자상을 떠올릴 때 위기에 책임 있게 대응하며, 강력한 문제해결력으로 난국을 타개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위기가 닥쳤을 때 지도자가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엇갈리고 국민의 미래가 결정된다. 박은정이 쓴 책, 《병자호란, 위기에서 빛난 조선의 리더들》은 ‘병자호란’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가 찾아온 1636년 조선, 조정에 있던 신하들 – 최명길, 삼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 이경석, 김상헌이 어떻게 국난에 대응했는지 살펴본다. 이들의 선택은 제각각이었다. 최명길은 화친 국서를 썼고, 김상헌은 이를 찢어버렸고, 홍익한과 윤집, 오달제는 끝까지 화친을 반대하다가 청나라 선양으로 압송당해 죽음을 맞았다. 이경석은 굴욕과 치욕을 삼키며 1,009자의 삼전도비문을 지었다. 이들의 마음은 감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착잡했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 신세를 진 명나라의 위세가 어마하던 시기, ‘오랑캐’라 여기던 청나라에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청 황제를 찬양해야 하는 마음이 오죽했겠는가. 그러나 나라를 그 지경으로 만든 위정자의 일원으로 책임지고 수습해야 했다. 전쟁이 일어나자 도망간 사람도 많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낯선 공간이 내게 말을 거는 느낌. 공간은 낯설지만, 그 느낌은 퍽 익숙하다. 오영욱ㆍ하성란 등이 쓴 책, 《어떤 외출》은 작가, 건축가, 소설가, 정원 전문가 등 창조적인 직업에 종사하는 18인의 지은이가 마치 공간과 대화를 나누듯, 자신만의 감성을 담아 좋아하는 공간을 소개하는 책이다. ‘하동 평사리 악양 들판’, ‘통도사 가는 길’, ‘잠실야구장’, ‘서귀포 대평박수 큰 홈통’, ‘양구 방산자기 박물관’ 등 한 번쯤 들어봤지만 잘 알지는 못했던, 한국의 매력적인 장소들이 서정적으로 펼쳐진다. 그 가운데 특히 마음을 끄는 장소는 ‘상실과 절망을 딛고 선 땅’이라는 부제가 붙은 강진 다산초당이다. 1801년 유배형에 처한 정약용은 강진 땅에서 18년간 머물렀다. 유배되었던 동안 숱한 저술을 남겼고 그 덕분에 우리는 주옥같은 지식을 만났지만, 어쩌면 그 모든 것은 다산에게 고통을 잊는 방편이었을지도 모른다. (p.162-163) ‘원지(遠地)’에 부처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형을 받을 때 들었던 한마디 말이다. 유배형을 받은 정약용 선생이 강진 땅을 밟은 해는 1801년이고 거기서 다산 선생은 18년간 머물렀다. …(줄임)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하늘 맑은 궁, 건청궁(乾淸宮)! 건청궁이 특별 개방됐다. 경복궁 깊숙한 안쪽, 고종과 명성황후가 생활하던 곳이자 우리나라에서 전기가 처음 설치된 건청궁이 다음 달 18일까지 특별히 공개된다. 건청궁은 명성황후가 을미사변으로 시해된 이후 방치됐다. 그러다 1909년 일제에 의해 완전히 헐리고 1939년 조선총독부미술관이 되었다가,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복원됐다. 박영규가 쓴 책, 《건청궁일기》는 1908년 12월 26일 낮 2시, 건청궁 해체 공사를 하던 중 건청궁 곤녕합에서 신무문 밖으로 이어지는 지하 통로를 발견한 것으로 시작된다. 지하 통로에서 나온 유골 두 구는 신원을 알 수 없었지만, 두 구 가운데 한 구는 책을 품고 있었다. 조선 통감부 관원 이치로가 ‘날렵한 필치의 조선어를 더듬거리며’ 읽어나가는 것을 시작으로 명성황후 일인칭 시점의 자전적 이야기가 펼쳐진다. 망국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까닭에 ‘민비’로 낮춰 불리기도 하지만, 지은이는 따뜻한 시각으로 명성황후를 새롭게 조명한다.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대를 이은 명문가에서 태어나 왕비로 간택된 이야기,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권력 투쟁을 벌이며 ‘폭탄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간송(澗松). 산골에 흐르는 물, 그리고 푸른 소나무를 뜻하는 이 말은 어느새 우리 문화의 대명사가 되었다. 간송은 물려받은 큰 재산으로 우리 문화재를 지켜내는 데 열과 성을 다한 전형필 선생의 호다. 오늘날 국보급 문화재를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것도, 우리 미술사에 긍지를 가질 수 있는 것도 간송이 그 모든 것을 지켜내지 않았더라면 요원했을 일이다. 최석조가 쓴 이 책 《조선의 백만장자 간송 전형필, 문화로 나라를 지키다》는 ‘간송미술관’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진 간송 전형필의 일생을 조곤조곤 들려준다. 간송에 막 관심을 가진 청소년이 읽기에도 좋다. 미술 교과서에서 보았던 수많은 그림과 도자기가 알고 보면 간송의 엄청난 노력으로 이 땅에 남아있음을 일깨워주는 책이다. 간송 전형필은 1906년 서울에서 아버지 전영기,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큰형 형설은 벌써 열다섯이었으니, 정말 늦둥이였던 셈이다. 아들이 귀한 집안이었기에 형필은 자식이 없던 작은아버지 전명기의 양자로 들어갔고, 온 가족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자랐다. 선대 할아버지 때부터 배오개 장터(지금의 종로)에서 장사한 그의 집안은 나라에서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경주 최부잣집. 부를 일구는 것은 어렵다. 창업보다 수성이 어려운 것처럼, 부를 이어가는 것은 더 어렵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것은 그렇게 부를 쌓으면서도 세간의 칭송을 받는 것이다. 사람들은 부자를 질시한다. 돈과 권력에는 그만큼 시샘하는 눈길이 따라붙는다. 그렇기에 부와 권력을 지닌 이들은 그 눈길을 피해 더 높은 곳으로 가고, 공고한 자신만의 성채를 짓는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지키려 한다. 황혜진이 쓴 책, 《경주 최부잣집은 어떻게 베풀었을까?》는 그와 반대로 절제와 중용을 실천하며 사람을 존중하고, 사람들 속에 머물렀던 경주 최부잣집의 이야기를 읽기 쉬운 문체와 그림으로 담아냈다. 경주 최부잣집이 대를 이어 실천했던 부에 대한 철학, 진정한 명문가 정신이 녹아들어 있다. 최부잣집에는 여섯 가지 가훈이 있었다.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이는 부와 권력을 동시에 탐하지 말라는 경계였다. 부가 생기면 권력이 탐나고, 권력이 있으면 부가 탐나는 것이 인지상정이건만 부를 지키고자 한다면 최소한의 양반 신분을 유지할 수 있는 벼슬만 하고 중앙 정계에 진출하는 큰 벼슬은 욕심내지 말라는 가르침이었다. 고위공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역사가 필요한 날이 있다. 옛날에는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이런 상황에서 나보다 앞서 살다 간 사람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궁금해지는 때가 있다. 신동욱이 쓴 《그래서 역사가 필요해》는 그럴 때 펼쳐보기 좋은 책이다. ‘삶의 무기가 되는 역사 속 인물 이야기’라는 부제처럼, 지은이 신동욱은 자신의 삶에 놓인 수많은 문제 앞에서 고심하고, 또 노력했던 인물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풀어낸다. 예나 지금이나 ‘인생 고민’은 늘 비슷한 것처럼, 똑같이 슬퍼하고 분노하며 기뻐하는 역사 속 그들을 보노라면 시대를 뛰어넘은 동질감이 느껴진다. 가령, 책의 한 꼭지로 들어가 있는 제목처럼 ‘배신감과 복수심이 내 마음을 어지럽힐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작가는 성왕의 사례를 들려준다. 백제 성왕이야말로 신라 진흥왕에게 호되게 배신당한 인물이다.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배운 대로, 백제와 신라는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몰아낸 뒤 한강 유역의 땅을 수복했지만, 진흥왕이 갑자기 배신하면서 기껏 되찾은 한강 유역이 모두 신라의 땅이 되고 말았다. 한강 유역의 위례성에서 건국한 백제는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 유역의 땅을 되찾는 것이 누대에 걸친 숙원사업이었다. 천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이태영 변호사.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생소할 그녀는, 한국 여성 인권 발전에 한 획을 그은 여성 법조인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고등 고시에 합격한 여성, 이태영! 그녀는 일제강점기 치하에서 모진 고생을 하면서도 마침내 한국 첫 여성 변호사가 되기까지 절대로, 절대로 꿈을 놓지 않았던 멋진 여성이었다. 강효미가 쓴 책, 《이태영 변호사의 낡은 가위》는 우리나라 첫 여성 변호사로 오랜 세월 차별받아 온 수많은 여성의 응어리진 한을 풀어 준 이태영의 일생을 알기 쉽게 풀어 쓴 책이다. 여성은 남성에게 예속된 부속물처럼 여겨지고 ‘여성 인권’이라는 개념조차 희미했던 시절, 그녀는 시대를 앞서간 감성으로 여성의 권리를 부르짖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여자들이 정식으로 교육을 받은 것은 불과 백여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1914년 평안북도 운산에서 2남 1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난 이태영은 한 살 무렵 광산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홀어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이태영의 어머니는 아들딸 차별 안 하고 공부시켜주기로 약속했다. 그 누구보다 총명하고 웅변도 잘했던 그녀는 평양 정의여자고등보통학교를 1등으로 졸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창백한 낯빛, 수염 없는 매끈한 턱, 가느다란 목소리... 흔히 내시를 떠올릴 때 생각나는 모습들이다. 내시는 그림자처럼 임금을 수행하면서 궁 안팎의 일을 두루 살피는 벼슬이었다. 비록 거세됐다는 까닭으로 세간의 인식이 좋지 않기도 했지만, 높은 영화와 권력을 누릴 수도 있는 요직 중의 요직이었다. 내시는 거세된 만큼 자손을 볼 수 없었지만 대체로 양자를 들여 가문을 유지했다. 윤영수가 쓴 책, 《그림자처럼 왕을 섬긴 왕의 남자 내시》에서는 내시 박계운의 양자로 들어간 서개동이라는 소년이 내시가 되기 싫어 몸부림치다가 마침내 양부의 대를 이어 훌륭한 내시가 되는 과정을 담았다. 내시가 되는 과정은 아주 고된 일이었다. 우선 어릴 때 불의의 사고로 성기를 다친 소년들이 내시의 양자로 입적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 시대 내시들의 계보를 적은 족보 《양세계보(養世系譜)》를 보면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들의 성이 모두 다른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비록 양자를 들였더라도 원래 집안의 핏줄을 존중해 주는 내시 가문의 가풍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시 집안에 양자로 들어가면 원래 식구들은 집과 논밭을 받아 풍족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