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포크의 조선 남부 여행기는 뒤에 계속하기로 하고 이번에는 근대식 병원 설립에 포크가 한 역할을 짚어보고자 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선 최초의 근대식 병원은 1885년에 설립된 제중원(濟衆院)이다. 개원 당시에는 광혜원(廣惠院)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으나, 고종 임금의 명에 따라 2주 만에 '대중을 구제한다'라는 뜻의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1884년 갑신정변 당시 크게 다친 왕실 외척 민영익을 미국의 의료 선교사 호레이스 알렌(Horace Allen)이 서양 의술로 치료해 살려낸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에 감동한 고종이 알렌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립병원을 설립했다. 이런 사실은 상식처럼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지 포크의 숨은 공헌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역사학자 이광린의 설명이다. 주한미국공사관부무관 포크(George C. Foulk) 소위의 열띤 충고와 알선은 마침내 조선 최초의 근대식 병원 ‘제중원’ 설립을 성취시켰다. 포크 소위는 보빙사 일행이 워싱톤에 도착한 이후로 미국 곳곳을 안내하고 다녔으며, 그들이 귀국할 때도 같이 행동하여 한국에 부임하고, 새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던 것이니, 그의 노력이 없었던들 아마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조지 포크는 1876년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직후, 미 해군 아시아 함대(Asiatic Squadron) 소속의 철제 포함(Gunboat) 앨럿(USS Alert)호에 배속되었다. 그는 이 배를 타고 뉴욕항을 출발하여 대서양, 지중해, 수에즈 운하, 인도양을 거쳐 일본으로 이어지는 긴 항해를 했다. 포크가 1884년 11월 1일 남부 지방 탐사 여행을 떠났을 때 중요한 관심사가 있었다. 1884년 중반 조선의 금강에 진입했다가 좌초되었던 앨럿호에 대한 것이었다. 그 배가 곤경에 처했을 때 도움을 주었던 관리는 누구였을까? 그것을 알아보는 일이었다. 1884년 11월 7일 여행 일기를 보자. 용안(현재 익산시에 속함)에 도착하니 4시 45분. 다시 매우 피곤하다. 마을 사람 전체가 나를 맞이하러 나왔다. 나는 떠밀리듯 관사로 들어간다. 아, 거기에 탁자가 있다! 네 개의 등받이 의자가 있고 중국식 탁자 덮개가 덮여 있다. 이곳은 금강 남쪽에 자리를 잡은 인가 150 채 정도의 작은 마을이다. 숲이 우거져 있는 그림 같은 곳이다. 나는 전양묵(통역)에게 명함과 여권을 지참시켜 현감에게 보냈다. 앨럿호가 좌초되었을 때 도와주었던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공주 숙소에서 아침 8시에 일어났다. 지난밤은 몹시 춥고 피곤했다. 이곳에서 하루를 머물까 했는데 조선인들은 은진미륵 이야기만 한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어 미륵을 본 다음 강경포를 거쳐 용안(오늘날 익산에 속함)로 가기로 한다. 오늘 아침 화장실에 갔다. 마당에 싸릿대가 쳐져 있는 곳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수 없을 정도다. 족히 150명은 되어 보이는 온갖 행색의 구경꾼들이 세상에서 가장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말없이 살펴본다. 실로 그 시선을 견디기가 힘들다. 이 사람들은 도무지 사생활과 예절 개념 같은 건 전혀 없는 듯하다. 신이시여, 저들을 도우소서. 최악의 경험이다. 이 끔찍한 땅을 떠나고 싶다는 충동이 인다. 은진미륵을 보았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미륵(Miryok)의 이마에는 지름 20cm의 황금 명판이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수정구가 박혀 있다. 나는 그곳에서 사진 6장을 찍었다. 스님들의 말로는 미륵상은 고구려Kokoryoh)시대에 세워졌다고 한다. 모자 부분이 무척 크고 아래쪽에 조각이 잘 되어 있다. 북서쪽 구석에는 떨어져 나간 곳을 커다란 철제 고리로 아주 잘 고쳐 놓았다. 미륵상은 수리한 흔적이 보이지만 양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공주 산성 인근의 작은 절에 들렀다. 두 명의 승려와 긴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조선 불교와 인도 불교 사이의 유사점을 찾아보려 했다. 스님들은 내게 약간의 산스크리트어 문자가 쓰여 있는 불경과 한문 불경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불교에 대해서 상당히 아는 것 같았다. 나는 스님들에게 인도에서의 경험과 산스크리트어 경전들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랬더니 결국 스님은 경기도 장단에 있는 어떤 절에서 산스크리트어 경전 5권을 본 적이 있다고 말한다. 산스크리트어가 가로로 길게 쓰여진 패엽경(貝葉經: 나뭇잎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빳뜨라-pattra를 한자로 표기한 단어다. 고대 인도에서 종이가 발명되기 전, 야자수의 잎사귀에 새겨 기록한 불교 첫 성문 경전) 이라고 한다. 중요한 정보다. 승려들은 나와의 환담을 매우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절을 나와 중군(中軍, 조선시대 오군영이나 각 지방 절도사 밑에서 군무를 총괄하던 무관)을 방문했다. 그는 내게 성찬을 대접했다. 나는 사진을 찍어 두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미국에 대하여 긴 대화로 들어갔다. 나는 미국의 지도를 그려 보이면서 각 지역의 산물을 설명했다. 나는 전설적인 미국의 벼락부자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나는 얼마 전에 광안역에서 하인에게 민참판(민영익)의 편지를 주면서 공주 감사에게 전하라고 일렀다. 그 하인이 길을 5마일이나 벗어나 허탕 치고 내게 되돌아왔다. 나는 무척 피곤하고 외롭다. 이들 이상야릇한 이방인들 속에서 나는 때때로 심연 같은 고독감을 느끼곤 한다. 그 기이한 느낌을 마땅히 표현할 길이 없다. 어떤 외국인도 나처럼 이교도들 속에 완전히 자신을 내던진 사람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엄습한다. 나는 문득 깨닫는다. 인간은 세상 어디에서나 인간임을, 이 절대고독이야말로 나의 의지처임을. 비장(Pijang)이 전양묵(조지 포크의 통역)을 찾아와서 내가 무슨 음식을 먹는지 등등을 묻는다. 감사의 명함도 가져왔다. 내가 보낸 명함에 대한 답례이다. 비장이 말하길, 음식을 여태 가져오지 않은 아전들이 몹시 나쁘다고 말한다. 감사에게 보낸 민영익의 편지를 비장이 가지고 있다. 그 편지에는 내가 원하면 감사가 돈을 빌려주라고 적혀 있다. 이곳엔 돈이 없어요, 비장이 전양묵에게 말한다. 그 문제는 내가 직접 처리할 것이다. 9시 20분 무렵이 되어서야 밥상이 왔다. 수일(조지 포크의 집사)의 말에 의하면, 나의 전령(하인)이 민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지난밤의 천안 주막은 크고 깨끗한 편이었다. 오늘 아침은 날씨가 흐리고 안개가 끼었다. 주막 주위에 거위들이 어슬렁거린다. 8시 17분 주막을 출발하여 남쪽으로 향하다. 9시 8분에 휴식. 남쪽으로 작은 계곡이 흐른다. 주위는 구릉이 달리고 있는 첩첩산중이다. 남쪽으로 향하는 행인들이 꽤 많다. 짐꾼들이 동물과 쌀, 담뱃대 그리고 상자를 지고 가고 있다. 주막들에서 많은 양의 놋쇠 그릇이 보인다. 행인도 많고 마을도 많다. 10시 4분 주막 출발. 남쪽으로 향하다가 약간 서쪽으로 틀었는데 감탄할 만하게 경작이 잘 된 지역이 나타난다. 지금까지 본 것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논이다. 배수로도 완벽하다. 버려진 땅은 한 뙈기도 없다. 길을 따라 연달아 고을과 마을이 나타난다. 덕평 주막이라는 곳은 주위엔 관목이 우거져 있고 산악지역의 분위기가 풍긴다. 11시 16분 마을 언저리에서 휴식을 취하다. 11시 45분 주막이 있는 원토 마을 서쪽 끝에서 쉬었다. 조선에서 다랑이논을 처음 보다. 어떤 곳은 180m~270m까지 올라갔다. 조선의 서쪽 지형은 토양이 쉬이 씻겨 내려가 경작하기 어려운데 이곳은 그와 달라 이처럼 계단식 경작이 가능하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어젯밤 경기도 소사에 도착하기 전이었다. 엄청난 기러기 떼가 서쪽에서 북쪽으로 낮게 날았다. 밤에 기러기 소리에 종종 잠을 깼다. 오늘은 꽤꽥거리는 기러기 소리가 더욱 잦다. 정말 많은 기러기가 주변을 날아다닌다. 조선인들은 기러기를 건드리거나 잡아먹지 않는다. 대신에 기러기를 잡아 집을 지키는 용도로 쓰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아침 일찍 안성장에 갔다. 규모가 매우 컸다. 족히 4천 명은 될 법한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군중이 나를 보러 밀려든다. 북새통 속에서 한 소년이 넘어지며 감을 떨어뜨린다. 순식간에 등을 밟히고 진흙탕에 머리를 쳐박힌다. 사람들에 에워싸인 나는 앞을 볼 수 없다. 내게 적개심을 보이거나 쏘아보는 기색은 없지만 무례한 호기심은 놀랍다. ‘’쉿”, “제미”라고 외치며 웃는 소리가 들린다. 천태만상 호기심 어린 얼굴들이 보인다. 사진을 찍어두고 싶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고 무례하여 엄두가 나지 않는다. 군중을 해산시키기 위해 내 일꾼들이 몽둥이질을 해댄다. 소년을 후려치기도 하고 갓을 잡아채기도 한다. 나는 악당 같은 그들의 행동을 막느라고 힘들었다. 10시 42분 가까스로 장터를 벗어났다. 매우 신기한 경험이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1884년 11월 1일 아침 8. 58 : 서울 갓전골 입동(수표교 근처)의 집에서 출발 ▶ 갓전골 : 조선 시대 수표교 부근 '갓전골'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수동과 관철동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이곳은 조선 시대에 갓(冠)을 만들어 팔던 가게가 많아 갓전골(갓전골)이라 불리게 된 지역이다. 9. 58:- Pa-chon-kori 도착 10. 40: 동작 나루를 건너 관악으로 향함 11. 9 : 승방돌 도착. 승방돌은 서울에서 20리, 과천까지는 10리 12. 29 : 과천의 끝 도착 낮 1.25 : 갈뫼(갈산)에서 휴식 2.10 : 사근내Sakunae(沙斤乃) 도착 ▶ 경기도 ‘사근내(沙斤乃)'는 오늘날 경기도 의왕시 고천동 일대를 가리키는 옛 지명이다. '사근내' 또는 '사그내'는 오전동, 왕곡동 등 사방에서 흘러들어오는 개울을 뜻하는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한자 표기로는 사근내(沙斤乃) 또는 사근천(沙斤川)이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평사천(平沙川), 고정동(古亭洞), 고고리(古古里), 내곡동(內谷洞) 등이 합쳐지면서 '고천리(현재의 고천동)'가 되었다. ‘사근내(沙斤乃)'의 역사적 역할 (사근내원-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조지 포크는 1884년 11월 1일부터 44일 동안 한강 이남의 조선 남부를 탐사했다. 대학노트 약 350쪽을 여행기로 가득 채웠다. 삽화도 다수 그려 넣었다. 수많은 주막에 들렀다. 외국인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사람도 당시 그처럼 많은 주막을 들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여행기에 가장 자주 나오는 단어도 ‘주막’인 것 같다. 그가 숙박한 주막을 중심으로 그의 자취를 더듬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먼저. 그가 여행기 첫 쪽에 적어 놓은 여행단 내역을 보겠다. (뒤침) 우리 여행단은 다음과 같다: 조지 C. 포크 미국 해군 소위 전양묵, 양반 정수일, 조지 포크의 수행원 가마꾼 12명 말몰이 소년 2명(11월 5일 공주에서 한 명이 추가되어 3명이 된다) 하인 1명 총계: 18명의 인원에 2필의 말, 3대의 가마 5 상자의 트렁크, 3개의 손가방, 사진기, 삼각대, 총기 상자, 돈 바구니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15살의 조지 포크를 만나 보자. 해군사관학교에 막 들어간 아들에 대해 아버지가 자기 동생(포크의 삼촌)에게 거침없이 자랑하는 편지다. 매우 긴 편지의 손글씨 판독이 썩 어렵다. 오래 뚫어본 결과 거의 완파하였다. 번역문을 여기에 올린다. 1872년 6월 20일 마리에타에서 친애하는 조지 사관생도 조지 클레이턴 포크를 소개하려네. 나는 방금 아나폴리스에서 돌아왔네. 거기에서 녀석이 학교용 군함 산텍호(US S School Ship Santec)에 승선하는 것을 보았네. 이제 그 자초지종의 역사를 기술하려 하네. 5월 초 우리 지역 의회의 의원인 디키(Dickey)가 카운티 신문을 통해 밝혔다네. 곧 랑카스터 지역에서 14살에서 18살 사이의 모든 청소년을 대상으로 선발시험을 열어 가장 우수한 인재를 한 명 뽑아 해군사관학교 생도 후보로 추천하겠다고. 디키 의원은 브룩스 교수, 에반스 교수 그리고 헤이스 판사를 심사 위원으로 임명하고 신체검사는 블랙우드 박사에게 위촉했다네. 이 소식을 나는 아들 녀석에게 알려주면서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 있냐고 물었지. “아빠, 딱 제게 맞군요, 도전해 보고 싶어요.” 하더라구. 나는 녀석를 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