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은 사맛[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백성이 주인이 되는 ‘민위방본(民爲邦本)’의 목표를 실현하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구해 듣고, 임금에게 고하기를 권하고, 옛 문헌을 조사하여 의제[agenda]를 구하려 했다. 의제가 되는 주제를 가지고 토론하고 더욱 연구하여, 그것도 두뇌집단인 집현전의 집단지성을 통하여 좋은 해법을 찾아 현장에서 실현하고 ‘새로운 법칙을 만들어 나갔다.’(以爲恒式) 그 가운데 경연 등을 통해 옛 문헌을 공부하고 현실에서 고쳐 나갈 길을 찾으려 했다. 그 첫 번째 과제로 옛 문헌이나 관례를 찾는 ‘고제이문(古制以聞)’이 있다. 둑제(纛祭)에 대한 의견 한 예로 세종 12년 둑제를 지낼 때 무반의 참여 여부를 문헌에서 찾는다. 이에 무반의 배제를 허락지 말 것을 건의한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이제 교지(敎旨)를 받자온즉, ‘서반(西班)에서 호군(護軍, 정4품의 무관) 이상은 둑제(군대를 출동시킬 때 군령권(軍令權)을 상징하는 둑[纛]에 지내는 국가 제사)를 지낼 때 재계(齋戒,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하고 부정한 일을 멀리함)를 드리지도 않고 배제(陪祭, 임금을 모시고 함께 제사 지냄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판소리 동편제 명창, 송흥록과 대구 감영(監營) 소속 명기(名妓) 맹렬(猛烈)과의 사랑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맹렬은 송흥록의 소리를 듣고, 후원자 겸 연인 관계가 되어 동거하게 되었으나 자존심이 강한 두 남녀는 자주 다투고, 헤어지는 상황을 연출했다는 이야기,《조선창극사》에는 “맹렬이 떠난다는 소리에 송흥록은 슬프고, 외롭고, 애달프고, 사랑스러우나 미운 감정을 여지없이 발로하게 되었고, 이때 문밖에서 듣던 맹렬도 동감의 정을 이기지 못했으며 이것이 그 유명한 자탄가(自歎歌)로 진양조의 완성을 이루게 되었다”라는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조선창극사》라는 책은 일제의 폭거가 마지막 기승을 부리던 1940년, 1월, 조선일보 출판부에서 펴냈으며 저자는 정노식이다. 이 자료를 펴내기 2년 전인 1938년에 저자는 《조광》에 「조선광대의 사(史)적 발달과 그 가치」라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을 보완하고 증보하여 1940년, 조선일보에서 2년 전인 1938년에라는 이름으로 책을 펴냈다고 한다. 이 책의 간기(刊記 판권지)에는 저작 겸 발행자가 방응모(方應謨)로 되어 있는데, 이는 아마도 발행인을 저자로 기록하는 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예전(1919~1923)에 이 강이 범람하곤 하여 치수 작업을 할 때 한국인 특히 제주도 출신이 많이 건너왔지요. 코리아타운과 츠루하시 일대에 정착한 분들 가운데 제주도 출신이 많은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이 일대는 백제강(현재 이름은 히라노강)이 흐르던 곳으로 이곳에 놓았던 다리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였다고 일본 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 닌토쿠천황(仁德天皇)조에 나와 있으며 지금은 폐교(廢橋, 1940년) 상태로 ‘츠루노하시(鶴橋)터’라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는 지난 4월 13일, 오사카 코리아타운 일대를 둘러보고 그 들머리에 있는 ‘오사카 코리아타운의 왕인박사노래비를 찾아서’ 기사를 쓴 뒤, 다음 날인 14일에 찾은 ‘츠루노하시(鶴橋)터’를 안내한 재일 작가 김길호 선생이 들려준 이야기다. 일본의 정사(正史)인 《일본서기》의 완성 시기가 서기 720년인데 당시 오사카 츠루하시 일대를 흐르는 강의 이름이 백제강(百濟江, 구다라가와)이었다는 것은 이 일대에 고대 백제인들이 많이 정착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를 입증하듯, “고대에 이 주변은 조선반도에서 건너온 선진적인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며 백제군 소속이었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일 수가 있지만, 그럴 적에는 한쪽 어깨에 하나씩 따로 맡겨야 메었다고 할 수 있다.우리가 어릴 적에는 책가방을 어깨에 메고 학교에 다녔으나, 요즘은 유치원생에서 대학생까지 모두 책가방을 등에다 짊어지고 다닌다. 그러면서도 책가방을 지고 다닌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두 메고 다닌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가 말뜻을 올바로 가려 쓰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메느냐 지느냐 하는 것은 책가방이냐 아니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어깨에만 맡기느냐 등에다 맡기고 어깨는 거들기만 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메다’는 어깨에다 무엇을 걸치거나 올려놓는 노릇이다. 이때 ‘무엇’이란 장대나 통나무, 보따리나 보퉁이를 비롯하여 어깨에 얹혀 있을 만하면 가릴 것이 없다. 그러나 반드시 한 쪽 어깨에만 맡겨야 메는 것이라 한다. 굳이 두 쪽 어깨에 맡겨도 메는 것일 수 있지만, 그럴 적에는 한쪽 어깨에 하나씩 따로 맡겨야 메었다고 할 수 있다. 무엇이나 하나를 두 쪽 어깨에다 걸치면 그 무엇은 어쩔 수 없이 등허리 쪽에다 맡기는 수밖에 없고, 그렇게 하면 메는 것이 아니라 지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다’는 본디 ‘짊어지다’에서 ‘짊어’를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작업 중 다이너마이트 불발탄이 폭발하여 눈앞에서 죽은 사람만도 10여 명이나 있었다. 그들은 손발이 갈가리 찢겨 나갔고, 바윗돌이 가슴을 덮쳐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래서 사체의 행방은 잘 모른다. 강제징용자들은 질병으로 죽은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부상으로 죽었다. 터널 공사 중 나온 돌덩어리를 나르는 짐차에서 떨어지거나 터널 받침목을 제대로 설치 안 해서 죽어 나가는 사람도 많았다. 공사장에서 죽은 사람을 끌고 나가는 것을 수백 번 이상 목격했다. - 나가노 히라오카댐(長野平岡) 강제연행노동자 김창희 증언, 경북 월성 출신, 160쪽 - “내가 일본에 연행된 것은 1944년 2월의 일로, 당시 누나는 시집을 갔고, 큰형은 사망했고, 셋째 형은 만주로 갔다. 고향에는 어머니와 둘째 형과 내가 농사를 짓고 살았다. 내 나이 23살 때다. 어느 날 잔디를 깎고 돌아왔는데 구장이 찾아와 하는 말이 ‘이 집에는 일하는 사람이 두 명 있으니까 한 명은 2년 동안 일본에 가서 일하고 와야 한다.’라며 통달(通達, 소집통지서)을 들이댔다. 당시 이러한 통지서를 거부할 수는 없었으며 도망을 쳐야 한다는 생각은 더더욱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먼 곳에서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마침 오늘(4월 12일) 아사히신문(朝日新聞) 1면에 《정본 한국어강좌(定本 韓玉語講座)》 책이 소개되었습니다. 바로 이 책입니다. 표지도 더 산뜻해졌고 특히 노마 히데키(野間秀樹) 교수의 해설 부분이 들어 있어 더욱 뜻깊습니다.” 이는 지난 4월 12일(금) 낮 2시, 효고현 다카라츠카시(兵庫縣 宝塚市)에 살고 있는 김예곤(金禮坤, 91) 선생을 찾아갔을 때 선생께서 기자에게 건넨 첫 인사말이다. 아파트 거실 너머는 탁 트인 시가지와 타카라즈카 가극단이 한눈에 들어오고 시가지 너머에는 롯코산(六甲山)과 가부토야마(甲山)가 병풍처럼 아늑하게 펼쳐진 봄날 정경이 물씬 느껴지는 곳에서 김예곤 선생 부부는 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실 탁자 위에 앉자, 김예곤 선생은 아침 신문이라며 아사히신문 1면 하단에 소개된 《정본 한국어강좌》 책 부분을 보여주었다. 아사히신문은 신문 1면에 책을 소개하는 신문으로 유명한데 그 소개 한가운데 《정본 한국어강좌》가 자리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1960년대 한국어 교육이 지금, 새롭게 되살아나고 있다. 문법 입문, 불멸의 금자탑,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 가르치는 사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판소리, 또는 산조(散調)음악에 쓰이는 장단형 가운데 가장 느린 형태가 <진양 장단>이라는 점을 이야기하였다, 또한 진양 1장단의 길이를 6박으로 볼 것인지, 6박×4장단으로 해서 24박으로 볼 것인지에 관한 이야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진양 장단>의 완성은 동편제(東便制)의 명창, 송흥록이 그의 매부(妹夫)인, 중고제(中古制) 명창, 김성옥으로부터 진양조를 처음 듣고, 그것을 여러 해 갈고 닦아 완성에 이르렀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 오는데, 그 일부를 소개하였다, 송흥록은 1780년대 태어나서 1800년대 중반까지 활동한 판소리 동편제의 중시조(始祖)로 알려진 대명창이다. 특히 그가 진양조를 완성했다는 기록은 1940년,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 비치고 있는데, 구체적인 정황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맹렬’이라는 여인과 만나게 된 배경과 헤어짐 속에서 이루어졌던 이야기이다. 명창, 송흥록이 대구 감영에 소속되어 있는 명기(名妓)로 노래와 춤이 뛰어나다는 맹렬로부터 ‘미진한 부분이 있다’, ‘더 연습해야 한다(피를 더 쏟아야 한다) 등의 부정적인 평가, 곧 수긍하기 어려웠
[우리문화신문=오사카 이윤옥 기자] “이 지역은 이카이노(猪飼野)라고 불리어 고대로부터 일본과 조선반도의 사람들이 교류해 왔습니다. 약 1600년 전 미유키모리신사(御幸森神社)의 제신(祭神)인 닌토쿠왕(仁德天皇)의 즉위를 축하하여 백제(百濟)에서 도래한 왕인박사(王仁博士)가 ‘나니와즈노우타(오사카의 노래)’란 와카(和歌: 일본 시)를 보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에도시대(江戶時代)에 일본과 조선의 선린·우호의 사절단인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12회(오사카에는 11회) 왔습니다. 이 통신사의 방문을 축하하여 쓰시마번의 통역관인 운메이(雲明)가 고대 왕인박사가 쓴 ‘나니와즈(오사카)의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어 매화꽃이 피었습니다.’라고 지은 시를 한글로 써서 조선통신사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이 자료는 1994년 조선통신사 연구가 신기수(辛基秀)에 의해 효고현 다츠시의 구가(舊家) 야세가(八瀬家)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일본과 한국·조선과의 우호·공생시대가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며 이 가비(歌碑)를 오사카 이카이노 땅에 건립합니다.” -2009년 (평성 21년) 10월 길일, 왕인박사 ‘나니와즈(오사카)의 노래’, 일본어·한글 노래비 건립위원회- 이는 오사카 츠루하시 코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토박이말은 우리 겨레가 이 땅에 살아오면서 스스로 만들어 낸 마음의 집이다. 우리 몸에는 우리 겨레의 유전 정보가 들어 있듯이, 토박이말에는 마음 정보가 들어 있다. 몸에 들어 있는 유전 정보는 쉽사리 망가지지 않으나, 말에 들어 있는 마음 정보는 흔들리는 세상에 맡겨 두면 단박에 망가진다. 지난 백 년 동안 우리는 무섭게 흔들리는 세상을 살아오면서 토박이말을 지키고 가꾸고 가르치지 못했다. 흔들리는 세상을 타고 일본말이 밀려와 짓밟고 미국말이 들어와 휘저어 뒤죽박죽되었다. 수백 년 수천 년을 살아오며 갈고닦아 마련한 겨레의 마음 정보를 온통 망가뜨린 셈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네 마음, 우리네 느낌과 생각과 뜻과 얼은 토박이말과 함께 뒤죽박죽되어 버린 것이다. 토박이말 ‘무섭다’와 ‘두렵다’의 쓰임새도 그런 보기의 하나다. 이들은 말할 나위도 없이 모습도 속살도 서로 다른 낱말이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어느 누가 이들이 어떻게 다른지 알고 가려서 쓸 수 있는가? · 무섭다 : 어떤 대상에 대하여 두려운 느낌이 있고 마음이 불안하다. · 두렵다 : 어떤 대상을 무서워하여 마음이 불안하다. 《표준국어대사전》 《표준국어대사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은 일처리에 앞서 문제점을 조사하고 옛 문헌과 자료를 살피고, 여러 사람에게 물으며, 관계자와 토론하며 더 좋은 방안을 찾으려 했다. 답을 찾은 후에는 항식(恒式, 항상 따라야 하는 형식이나 정해진 법식)으로 법제화하고자 했다. 이런 과정에서 하고자 하는 일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옳고 그른 것인지 널리 물었다. 여기 세종 4년에 한증소의 이익과 무익에 대해 논의한 예가 있다. 예조에 전지(傳旨)하기를, "병든 사람으로 한증소(汗蒸所)*에 와서 당초에 땀을 내면 병이 나으리라 하였던 것이, 그 탓으로 죽은 자가 흔히 있게 된다.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널리 물어보아(廣問便否)’, 과연 이익이 없다면 폐지할 것이요, 만일 병에 이로움이 있다면, 잘 아는 의원을 보내어 매일 가서 보도록 하되, 환자가 오면 그의 병증세를 진단하여, 땀낼 병이면 땀을 내게 하고, 병이 심하고 기운이 약한 자는 그만두게 하라." 하였다. (《세종실록》 4/ 8/ 25) * 숯이나 도자기를 굽고 남은 가마 속 열기로 땀을 내 몸의 독소를 배출하던 곳 또 다른 예로 세종 17년 좌의정 최윤덕이 국경방비에 따른 군사시설정비,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