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서도좌창 중, 공명가(孔明歌)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서도의 좌창은 물론이고, 송서나 시창과 같은 느리고 긴소리들 모두는 수심가조의 가락이나 표현법 등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점, 이 노래는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명재상, 제갈 양의 자(字)가 공명이기에 연유된 이름이란 점, 오(吳)나라의 주유와 함께 공명이 화공(火攻)에 대한 전략을 논의하며 공명이 동남풍을 비는 광경을 그린 내용이란 점을 말했다. 이와 더불어 ‘초한가’와 더불어 서도창의 정수로 알려진 이 곡은 부분 부분의 진행이 힘찬 고음에서 저음으로 연결되는 하행(下行)선율형, 곧 강하게 뻗는 대목에서는 살짝 떨어주며 내는 요성(搖聲)과 졸음목을 구사하는 대목이 일품이란 점, 또한 극(劇)적인 구성이나 내지르는 목청이 격렬하고 강(强)과 약(弱)의 대비가 뚜렷한 점으로 엮음수심가의 창법을 활용, 서도창의 멋을 지키고 있는 소리라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이번 주에는 경서도 소리와 함께 전통무용, 그 위에 북이며 장고와 같은 타악기 연주도 겸비한 김단아(구-김영순) 명창을 만나 보기로 한다. 서도소리 발표회가 있던 날, 한국문화의 집(Kous)공연장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고 김수업 선생은 전 대구가톨릭대학교 총장을 지냈으며, 우리말대학원장과 국어심의위원장을 지낸 분이다. 특히 선생은 토박이말 연구에 평생을 바쳤으며, 쉬운 말글생활을 위해 온 정성을 쏟았다. 그런 선생은 토박이말사전을 만들다가 지난 2018년 우리 곁을 떠났다. 선생이 생전에 펴낸 책 《우리말은 서럽다》는 우리가 왜 쉬운 토박이말을 써야 하는지 명쾌하게 말해주고 있다. 우리 신문은 지난 2014년 《우리말은 서럽다》 본문을 연재한 지 10년이 다 되어가건만 대한민국은 오히려 토박이말을 더욱 홀대하고 있다. 이에 우리는 다시 선생의 《우리말은 서럽다》를 끄집어내 토박이말을 써야하는 까닭을 또렷이 해두고자 한다. <편집자 말> 사람에게 가장 몹쓸 병은 제가 스스로 업신여기는 병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했다지만, 제가 스스로 업신여기는 병보다 더 무서운 절망은 없으며, 이는 스스로 손쓸 수 없는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겨레는 지난 이즈믄(천) 년 세월에 걸쳐, 글 읽는 사람들이 앞장서 스스로 업신여기는 병에 갈수록 깊이 빠져 살았다. 그런 병은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앞에서 부산의 소리꾼, 하인철은 <향수>를 비롯하여 <배뱅이굿과 함께하는 고향길>, <8도강산 소리여행>, <창세무가-創世舞歌>, <하인철의 전통 소리를 담다>, <산염불>과 <각설이 타령> 등, 공연무대를 통해 자신의 독자적인 소리세계를 만들어왔다고 이야기하였다. 각 소리제에는 지역 토착민들의 독특한 표현이 녹아 나온다는 이야기, 수심가조는 목을 조여서 위로 치켜 떠는 듯한, 격렬한 요성(搖聲)법이 특징이라는 이야기도 하였다. 이번 주에는 서도좌창 가운데서도 널리 알진 공명가(孔明歌)를 소개해 보기로 한다. 우선 용어의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우선, ‘서도좌창’이란 말에서 서도(西道)는 관서지방, 곧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지방을 가리키는 지역 이름이고, 좌창(坐唱)이란 앉아서 부르는, 연행형태가 단정하면서도 비교적 가사가 길고, 느린 형태의 노래를 가르치는 말이다. 그러므로 앉아서 부르는 관서지방의 긴소리를 일컫는 말이 곧 서도좌창이다. 과거에는 좌창이라는 이름보다는 <잡가-雜歌>, 또는 <긴 잡가>라는 말도 사용해 왔지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 후기 선비 화가 정수영(鄭遂榮, 1743~1831)은 1797년 가을 금강산을 유람하였습니다. 금강산 풍경을 유탄(柳炭, 그림의 윤곽을 그리는 데 쓰는, 버드나무를 태워 만든 숯)으로 스케치하고 이를 토대로 2년 뒤인 1799년 3월부터 8월까지 6달에 걸쳐 가을 금강산(풍악산) 그림첩인 《해산첩(海山帖)》을 완성했습니다. 지리학자 집안 후손인 정수영은 남다른 관찰력, 독자적인 시각과 경물 배치 방식, 특유의 필법이 특징인 자신만의 금강산 그림을 남겼습니다. 금강산의 가을을 담은 정수영의 《해산첩》 단풍의 계절 가을이 오면 현대인들은 여행을 가서 아름다운 풍경을 기념하기 위해 사진을 찍고 이를 블로그 등의 개인 누리집에 올려서 여러 사람이 함께 볼 수 있도록 합니다. 사진들을 보고 있노라면 같은 장소라도 개인의 취향과 관심사, 시각 경험에 따라 촬영 대상이 달라지고, 같은 대상을 찍어도 사진기의 종류, 촬영 각도, 촬영자의 기술에 따라 서로 다른 사진이 생산됨을 깨닫게 됩니다. 조선시대에도 가을 여행의 추억을 글과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단풍이 아름다워서 ‘풍악산(楓嶽山)’이란 별명이 있는 금강산을 찾은 문인들은 자신이 본 것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17째 절기로 찬 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는 때라는 뜻의 한로(寒露)입니다. 한로 무렵은 기온이 더 내려가고 서리가 내리기 전에 가을걷이를 끝내야 하므로 농촌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쁩니다. 이때 농부들이 열심히 일하고 쉬는 새참에 마시는 막걸리 한 사발 맛은 농부들에게 있어 행복이며 또 지나가는 길손을 불러 함께 하는 것은 마음의 여유에서 비롯되는 풍요로움일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 가을 들판에는 콤바인이 굉음을 울리며 논을 누비면서 타작과 동시에 나락을 가마니에 담아내고 있어 옛 정취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또한 대부분 자동차를 타고 달리기에 한가롭게 길가는 나그네도 볼 수가 없어 예전처럼 막걸리 한잔을 나누거나 논둑에 앉아서 새참 먹는 모습도 보기 어려워졌지요. 한로와 상강(霜降) 무렵에 사람들은 시절음식으로 추어탕(鰍魚湯)을 즐겼습니다. 추어탕은 조선후기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추두부탕(鰍豆腐湯)”이란 이름으로 나옵니다. 또 1924년에 이용기가 쓴 요리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는 “별추탕”란 이름으로 소개됩니다. 가을에 누렇게 살찌는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대체로 여자의 마음을 비유하자면, 꽃은 피지만 덩굴이 뒤틀린 등나무와 같다. 소년은 가시가 있지만 처음 핀 매화꽃처럼 형언할 수 없는 깊은 향기가 있다. 그러므로 이런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여자를 버리고 남자에게 가야 할 것이다. 남색도(男色道)의 심오함을 홍법대사(弘法大師, 774-835)가 널리 퍼트리지 않은 것은 인간의 씨가 마르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말세의 남색을 내다보셨기 때문이다. 한창때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어찌하여 《호색일대남(好色一代男)》의 남자주인공은 많은 금과 은을 여러 여자에게 써 버렸을까? 진정한 유흥은 남색(男色)뿐이다. 다양한 남색을 이 책 《남색대감(男色大鑑)》에 빠짐없이 기록하기 위해서 나니와만(難波灣)의 해초를 채취하듯 많은 소재의 글을 수집하였다” -제1권 1화 가운데- 이는 이하라 사이카쿠의 저서인 《남색대감(男色大鑑)》의 제1권 1화 끝에 나오는 남색(男色) 예찬(?) 글의 일부다.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 1642-1693)는 《남색대감(男色大鑑)》 외에도 《호색일대남(好色一代男)》 등을 써서 에도시대(1603-1868)의 인기도서 작가로 등극한 인물이다. 《남색대감》은 불가(佛家)나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부산의 경서도 소리꾼, 하인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지난해 상주(尙州) <전국민요경창대회>에 출전, 대상(대통령상)에 올랐다는 이야기, 여러 사람 앞에서 소리를 하거나, 발표회, 경연대회를 치를 때에는 누구나 긴장하게 마련이어서 실력 발휘가 어려운 법인데, 연습과정이 탄탄하여 무난히 목표점에 도달했으며 명창의 반열에 올랐다는 점을 이야기 하였다. 그가 부른 곡명들은 수심가 토리인 <공명가-孔明歌>, <초한가-楚漢歌>, 그리고 <산(山)염불>이었다. <경 토리>를 비롯하여 <수심가>, <육자배기>, <메나리> 등등, 각각의 소리제에는 오랜 세월을 그 지역에서 살아 온 토착민들의 감정이 녹아 있기에 기쁨과 슬픔의 대조적인 표현 등이 노래 속에 자연스럽게 묻어 나오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서도지방의 수심가토리가 어떻게 남쪽에서 확산이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 궁굼하다. 서도소리의 특징적인 선율형이나 창법, 또는 다양한 표현법 등이 독특하여 명창들의 소리를 통해, 또는 음반을 통해 호감이 가게 되었다는 점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지금 인천 월미도의 한국이민사박물관(관장 김상열)에서는 <역경을 딛고 우뚝 선 조선인, 자이니치, 다시 재일동포> 전이 열리고 있다. 재일동포, 재미동포, 재프랑스동포와 같은 낱말은 한국인이 해당 나라에 가서 둥지를 틀고 사는 경우를 일컫는 말이지만 ‘재(在)’ 자를 붙인다고 해서 다 같은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다. 특히 재일동포와 재중동포(조선족) 등은 오늘날 이민 형식으로 건너가 자리를 잡은 ‘재미동포’ 등과는 출발부터 다르다고 봐야 한다. “82만여 명의 재일동포(在日同胞)가 일본에 살고 있습니다. 재일동포의 궤적은 일본의 식민 지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가운데 줄임) 해방 이후 일본에 남은 조선인은 제도적, 민족적 차별과 싸우며 스스로 ‘자이니치(在日)’라 부르며 일본 사회에 자리매김했습니다.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면서도 정상 국가를 꿈꾸는 모국에 무한한 사랑을 보냈던 이들을 우리는 ‘재일동포’라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동포인 재일동포. 그들을 알고자 하지 않았던 우리. 이번 전시를 통해 모국과 함께 해왔던 이들이 누구보다도 가까운 동포임을 느끼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는 <역경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기와이기, 주막, 새참, 무동, 씨름, 쟁기질, 서당, 대장간, 점보기, 윷놀이, 그림 감상, 타작, 편자 박기, 활쏘기, 담배 썰기, 자리 짜기, 신행, 행상, 나룻배, 우물가, 길쌈, 고기잡이, 노상풍정(路上風情), 장터길, 빨래터.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화가 단원 김홍도(1745~ ?)가 그린 《단원풍속도첩》 속 스물다섯 점의 그림들입니다. 이 그림들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이미지 가운데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것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으로, 서민들의 노동, 놀이, 남녀 사이에 오고 가는 은근한 감정 등 삶의 여러 모습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조금 더 상세하게 보자면, 그림의 소재는 농업, 상업, 어업 등 일상에서의 노동부터 노동 뒤의 휴식, 서민들의 놀이와 선비들의 고상한 취미생활까지, 그 주인공은 젖먹이 아기부터 노인까지, 서민부터 양반까지입니다. 그려진 소재와 대상이 다채롭고 생생하여 조선시대의 한 때, 어떤 곳에 다녀온 기분인데, 이렇게 다양한 삶의 모습을 하나의 화첩에 모아 그린 예는 풍속화가 유행했던 조선 후기에서도 많지 않습니다. 스케치풍의 그림 : 최소화된 묘사와 채색 가로, 세로 30여 센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서도소리 대부분은 수심가(愁心歌)의 창법이나 표현법을 기본으로 하기에 <수심가조>라고 한다는 점, 하인철은 10년 이상 부산에서 새벽기차를 타고 인천으로 소리 공부를 하러 다녔다는 점, 이동시간 동안 소리를 녹음한 테이프를 들으며 경서도 소리를 익혔다고 하였다. 제2의 고향, 부산에서의 생활은 노래만으로는 살기 힘든 상황이어서 수리기술도 익혔고, 풀빵 장사도 했으나, 무슨 일을 해도 서도소리 부르기와 명창의 녹음테이프를 들으며 연습을 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에서 내려온 친구를 기다리다가 우연히 근처의 민요학원이 눈에 들어왔는데, 그곳이 바로 국가무형문화재 제19호 경기민요 이수자 강숙희 명창이 운영하는 소리 학원이었다고 한다. 그의 말이다. “당시 민요 부르기를 처음 시작한 것은 매우 단순한 이유였어요. 트로트의 맛을 내야 하는데, 꺾기의 발성이 잘되지 않아서 그것을 해결하려는 방법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우리 소리는 참 묘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트로트보다 경기민요와 서도민요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어요. 그런데 정작 사람들 앞에서 소리를 하게 되는 발표회 무대나 경연대회에 출전할 때는 정말 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