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1926년, 한글 반포 480주년을 맞아 한글날 기념식 ‘가갸날’이 열렸다. 민족주의 국어학자들의 단체인 조선어연구회가 주최한 기념식에서 처음으로 가갸날을 선포했으며, 가갸날은 오늘날의 한글날이 되었다. 한글은 ‘가갸거겨, 나냐너녀’ 하는 식으로 배울 때라 언문, 가갸글 등으로 불려왔다. 그러다 1910년대 조선어 연구회에서 ‘으뜸가는 글, 하나밖에 없는 글’이라는 뜻으로 지어서 쓰게 되었다. 가갸날은 1928년부터 ‘한글날’로 이름을 바꾸었다. ------------------------------------------------------------------------------------------------------------------ The “Gagya Day” Celebration for Hangeul Day [Illustrated History of Hangeul 27] Professor Kim Sle-ong In 1926, marking the 480th anniversary of the invention of Hangeul, the first official celebration of Hangeul Day,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1907년(고종 44년), 국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주시경 선생이 남대문 시장 부근의 상동 교회에 있던 상동청년학원 안에 한글 강습소를 열었다. 주시경 선생은 1914년 운명할 때까지 한글 강습소에서 김두봉, 최현배 등 많은 제자를 길렀다. 제자들은 1921년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 전신, 현 한글학회)를 조직하여 주시경의 뜻을 이어 한글 보급과 연구에 앞장섰다. 상동 교회는 지금도 같은 지역 새로나 빌딩에 남아 있어 그때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 Opening a Hangeul Education Center at Sangdong Youth Academy by Professor Ju Si-gyeong [Illustrated History of Hangeul 26] Professor Kim Sle-ong In 1907 (the 44th year of King Gojong’s reign), linguist and independence activist Ju Si-gyeo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1904년(고종 41년), 충청도 노성군에 살던 ‘백조시’라는 여인이 여산 군수에게 자신의 집안 재산으로 있던 논밭을 가로챈 서 씨를 고소한 소장을 작성하는 일이 있었다. 백씨 여인은 자신의 동생이 약값 3냥 5돈을 갚지 못한 것 때문에 서 씨에게 논밭을 빼앗긴 일을 뒤늦게 알고, 집안 재산을 찾아 달라고 여산 군수에게 억울한 사연을 호소한 것이다. 그 뒤로 양측의 주장이 상반되어 여러 차례 소장이 오갔다. 1894년 고종이 한글을 국문으로 선언한 뒤에도 공문서는 한자로 작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한글로 공식 문서가 소통되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더불어 세종대왕이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을 토로할 수 있도록 한글을 만들었는데, 이 문서 역시 그러한 정신이 구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Expressing an Injustice in Hangeul [The Illustrated History of Hangeul 25] In 1904 (the 41st year of King Gojong’s reign), a woman named Baek Jo-si, who lived in Nosoeng-gun, Chungcheong Pro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1896년(고종 33년), 우리나라 첫 순수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이 발행되었다. 《독립신문》은 독립협회의 서재필ㆍ윤치호가 창간한 신문으로, 가로 22cm, 세로 33cm 4쪽짜리 신문이었지만 당시에는 혁신적인 일이었다. 그전에 발행된 신문들은 모두 한자로만 기사를 썼기 때문에 한자를 모르는 사람들은 신문을 읽기 힘들었는데, 《독립신문》이 나오면서 누구나 쉽게 신문을 읽을 수 있었다. 《독립신문》은 나라의 발전과 민중의 계몽을 위하여 지대한 역할을 담당했다. ----------------------------------------------------------------------------------------------------------------- The First Hangeul Newspaper, Dongnip Sinmun, Is Published [The Illustrated History of Hangeul 24] In 1896 (the 33rd year of King Gojong’s reign), the first newspaper written entirely in Hangeul, Dongnip Sinmun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1894년(고종 31년) 고종은 칙령을 통해 한글을 조선의 주류 공식 글자로 선포했다. 당시의 대한제국 칙령 제1호로, “법률 명령은 다 국문으로 본을 삼고, 한역을 부하며, 혹 국한문을 혼용함.”이라는, 한글 전용 대원칙에 관한 법령이 공포된 것이다. 이 법령이 바로 널리 시행되지는 못했지만 450년 만에 한글이 나라의 공식 글자로 인정받았다는 것에 커다란 의미가 있다. -------------------------------------------------------------------------------------------------------------------- Emperor Gojong Proclaims Hangeul as the National Script [The Illustrated History of Hangeul 23] In 1894 (the 31st year of King Gojong’s reign), Emperor Gojong issued a royal decree declaring Hangeul as the official script of Joseon. This was established und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1888년(고종 25년), 하동의 중터마을에 사는 ‘양기연’이라는 사람이 논을 담보로 건네고 돈을 빌리면서 한글로 각서를 작성하는 일이 있었다. 그는 각서에 논 2마지기를 담보로 20냥을 빌리되 닷새 안에 갚을 것을 다짐하는 내용을 담았다. 거칠지만 힘 있는 글씨로 글을 쓰고 큼지막한 손도장을 찍은 각서에서 서민들의 소탈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한글이 창제된 뒤에도 대부분의 문서는 한자로 작성되었지만, 관청의 공식 문서가 아닌 개인과 개인이 주고받는 문서는 한글로 작성하는 경우가 많았다. -------------------------------------------------------------------------------------------------------------------- Writing a Written Agreement in Hangeul [The History of Hangeul through Illustrations 22] In 1888 (the 25th year of King Gojong’s reign), a man named Yang Gi-yeon from Jungteo Village in Hado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1886년(고종 23년),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Hulbert)는 우리나라의 초청을 받아 육영공원 교사로 근무를 시작했다. 고급 양반의 자식을 대상으로 영어 교육을 하던 한국의 첫 근대식 공립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서는 영어로 된 교과서를 가지고 영어로 수업했다. 또 헐버트는 한글의 우수성에 감명받아 우리나라의 역사와 세종대왕의 업적을 스스로 공부해서 학생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그런 그는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3년 만인 1891년에 우리나라 신교육의 기초를 닦을 세계지리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펴냈다. 《사민필지》는 161쪽으로 이루어졌으며, 한자가 하나도 없는 우리나라 처음의 완전한 한글 교과서다. -------------------------------------------------------------------------------------------------- Hulbert Publishes the First Hangeul-Only Textbook, Samminpilji [An Illustrated History of Hangeul 21] In 1886 (the 23rd year of King Gojong’s rei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1790년(정조 14년)에 책을 읽어주는 전문 직업인인 ‘전기수’가 낫에 찔려 목숨을 잃는 사건이 벌어졌다. 전기수는 종로 거리 연초 가게 앞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한글 소설책을 읽어주었다. 그러던 가운데 영웅이 뜻을 이루지 못한 대목에 이르자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사내가 눈을 부릅뜨고 입에 거품을 물면서 풀 베던 낫으로 전기수를 내리찍어 죽게 했다. 사내는 전기수가 이야기를 너무 실감 나게 들려주는 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전기수를 악인으로 착각해서 죽였다고 말했다. 그만큼 많은 사람에게 한글 소설이 인기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조실록》 1790(정조 14년) 8월 10일 참조 ---------------------------------------------------------------------------------------------------- A “Jeongi-su” is Killed by a Scythe While Reading a Hangeul Novel [The History of Hangeul Through Illustrations 20] In 1790 (the 14th year of King Jeon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정조는 원손 시절에 큰외숙모인 여흥 민씨에게 한글로 편지를 썼다. 편지를 썼던 때는 1756~1759년(영조 32~5년) 무렵으로 다섯 살에서 여덟 살로 추정한다. 편지에는 “가을바람에 몸과 마음이 평안하신지 안부를 여쭙습니다. 뵈온 지가 오래되어 섭섭하고 그리웠는데, 어제 봉서를 받고 든든하고 반가우며 할아버님께서도 평안하시다고 하오니 기쁘옵니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어린 나이에 편지 형식을 갖춰 쓰면서도 외숙모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잘 드러나 있다. 정조의 한글 편지를 통해 정조가 어린 나이지만 할아버지의 건강에도 마음을 쓰는 효심이 깊은 손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Young King Jeongjo Writes a Letter in Hangeul to His Maternal Aunt When King Jeongjo was still a young prince (between the ages of five and eight, during the period 1756–1759, around the 32nd to 35th year of King Yeongjo’s reign), he wrote in Hangeul to unc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1727년(영조 3년), 김만중의 딸이자 신임옥사 때 죽임을 당한 이이명의 처인 김씨 부인은 손자와 시동생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영조에게 한글 탄원서를 올렸다. 탄원서의 크기는 가로 81.5cm, 세로 160cm에 달할 정도로 크다. 정자로 정성 들여 쓴 글에서는 정치적 격변기에 집안의 위기를 맞은 사대부 여성의 절박한 심정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김만중은 한글을 나랏글로 삼아 한다고 주장하고 한글 소설 〈구운몽〉, 〈사씨남정기〉 등을 직접 쓴 빼어난 한글문학가이자 평론가였다. Submitting a Petition in Hangeul for the Family’s Sake In 1727 (the 3rd year of King Yeongjo’s reign), Kim Man-jung’s daughter, the wife of Lee Im-yeong, submitted a petition in Hangeul to King Yeongjo. This petition was a desperate plea to save the lives of her grandson and brother-in-law, who were in danger of 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