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유광남 작가] “그렇다. 준사! 넌 누구보다도 용맹한 전사다. 비록 몸이 성하지 않더라도 그 점은 변하지 않는 법이다. 기억해라......준사!” 준사는 괜히 콧등이 찌릿한 느낌을 받았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전율이 두 다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내게 다시 기회가 존재할까?” “물론이지.” 김충선은 그의 의혹이 채 끝나기도 전에 준사를 두 팔로 꼭 껴안으며 장담했다. 이번에는 작은 위안이라도 되었는지 준사는 묵묵히 김충선을 받아 드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불쑥 준사가 입을 열었다. “해안에 왜병들이 집결하고 있어.” 사야가 김충선의 시선이 해안가로 향하였다. 어쩌면 지금쯤 구루시마가 사태를 파악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영악한 구루시마야.” “우리의 도주로에 의문을 지녔군.” “당연하지. 어떤 바보가 뻔히 잡힐 수 있는 부산 앞바다로 도주를 감행 했겠어. 구루시마라면 의문을 지니는 것이 당연해. 우리의 행방을 추적할 거야.” “어쩌지?” “싸워야지.” “자네 혼자서?” “무슨 소리야. 우린 둘이다.” “우리 둘이 저 많은 적들과 싸운다?” “그리고 도망가야지.” “도망? 어디로? 이 섬 안에서 도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리
[우리문화신문=유광남 작가] 무라야마는 중얼거리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동쪽으로부터 활활 타오르는 태양의 불길이 장엄하게 바다를 뒤엎으며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바다 전체가 햇빛으로 출렁이는 광경은 황홀하였다. “봐라,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 사야가 김충선은 준사를 품에 안고 가덕도의 산마루에서 동이 트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준사의 두 눈은 붉게 충혈 되어 금방이라도 피눈물을 흘려 내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살아야 한다는 건가?” 김충선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만일 구루시마가 너의 두 눈을 상하게 했다면 오늘 이런 감격스러운해돋이를 마주할 수 있었겠냐? 두 다리 쯤은 던져줘도 더 소중한 생명은 건진 것이니까.” “위로가 되지 않아. 난 이제 병신이 되었다.” 김충선은 바위에 비스듬히 준사를 앉혔다. “저 아래 해안에 너의 원수가 되어버린 구루시마가 있다. 그는 우리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방금 전 두 대의 세키부네를 부산 앞바다로 출항 시켰다. 아마 구루시마와 같이 영악한 전술가라면 금방 자신의 실수를 눈치 채고 가덕도 내륙으로 군사를 파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김충선은 무라야마에게 부산으로 방향을 잡은 것처럼 위장하고 실
[우리문화신문=유광남 작가] 무라야마는 한 시진(=2시간)이 넘어서야 겨우 구루시마의 함대가 운집해 있는 가덕도의 해안에 도달할 수 있었다. 기진맥진한 그를 발견한 보초병이 놀라면서 화승총을 겨냥했다. “바다에서 귀신이 올라왔다!” 무라야마가 손을 높이 치켜들면서 소리쳤다. “빠가야로! 난 구루시마 함대소속의 무라야마다. 적에게 납치되어 끌려가던 중에 탈출했다. 어서 구루시마 장군에게 보고해라.” 보초병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무라야마?” 무라야마는 힘없이 바닥에 넘어지면서 기었다. “장군을 어서 불러다오!” 임시막사에서 취침 중이던 구루시마가 보고를 받자 미처 갑옷도 걸치지 못하고 뛰어 나왔다. “어찌된 영문이냐?” 구루시마는 그때까지도 대장선에 잡아 둔 준사의 탈출에 대하여 까마득히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무라야마는 사실대로 아뢰었다. “침입자가 있었습니다. 대장선의 포로를 구해서 도주했습니다.” “무엇이라고? 이런 대담한 작자가 있나? 감히 우리 진영으로 뛰어 들었단 말이냐? 어떤 놈이었냐?” “이름은 알 수 없고, 건장한 체격에 힘이 장사였습니다. 무술 솜씨 또한 비범하여 단숨에 우리 병사 세 명을 베어 넘겼습니다.” 구루시마의 눈에서 형연하기
[우리문화신문=유광남 작가] “항왜가 되겠다는 것이냐?” “그렇소이다. 장군을 따르겠소.” “돌아가도 어차피 적장의 손에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로군. 하지만 널 받아줄 수 없다. 내게는 살아남기 위해서 투항하는 부하들은 소용없다.” 김충선의 담담한 얼굴을 바라보면서 무라야마가 문득 물었다. “목숨보다도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요?” “신념(信念)이다. 진리(眞理)이다. 그리고 도리(道理) 즉 의리(義理)라고도 할 수 있지.” 무라야마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우리같이 무지한 자들은 모르오. 우린 살아남는 것이 의리요. 그것이 부모와 자식에 대한 마지막 도리외다.” 김충선은 그럴 수 있다고 이해했다. “고향에 부모님과 아이들이 있는가?” 무라야마 수병의 눈에서 금세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가족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소? 부모님과 처자식이 모두 합하여 일곱이오.” 김충선 역시 일본 땅에 남겨졌던 부모에 대한 회한(悔恨)이 가슴을 할퀴고 지나쳤다. “무라야마라고 했나?” “네.” “적장이 누군가? 내 친구의 다리를 자른 자가 누군가?” “구루시마 미치후사 장군입니다. 그는 명량에서 두 다리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보복을 가한 것이로군.”
[우리문화신문=유광남 작가] “소생이 어찌 알겠습니까? 살려만 주십시오.” “내 친구의 다리를 네가 봉합해줬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그러기에는 아직 이르다. 내 친구를 끝까지 도와줘야겠다.” 김충선은 가덕도로 올라온 직후, 운이 좋게도 구루시마의 함대가 집결해 있는 해안을 발견하고 가장 호화찬란한 대장선에 잠입했던 것이다. 김충선은 준사를 무라야마라는 일본 수병에게 업게 하고는 이동을 시작했다. 이미 시각이 자정이 넘은 축시(새벽 1~3시) 경이라배 안은 고요했다. 간혹 보초병을 만나기는 했으나 일본군으로 위장한 사야가와 준사를 업고 있는 무라야마에게 별로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이제 어찌할 생각이쇼?” 상판으로 올라온 무라야마가 물었다. 해안으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사다리를 이용해야 한다. 하지만 해안에는 임시막사가 설치되어 있었고 보초병 역시 다수가 서성거리고 있기 때문에 여의치가 않았다. “이 사람은 부상이 심해서 안정을 취해야 하오. 무리하여 출혈이 발생하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소.”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사다리를 이용한다는 것은 자살행위요. 해안에 닿은 즉시 보초병들이 달려올 것이요.” 김충선은 그를 데리고 해안의 반대쪽으로
[우리문화신문=유광남 작가] 후회가 엄습했다. 늙은 어부의 충고를 마음에 새기는 게 아니었다. 그냥 화총을 입에 물고 격발 했다면 이런 고통은 없었을 것이다. 준사는 처절한 통증을 잊기 위해서는 다시 죽는 방법을 떠올렸다. 하지만 두 팔은 묶여있었고 입에는 혀를 깨물어 자결하지 못하도록 재갈을 물려 놓았다. 원한다고 자결을 시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왜적들의 말소리가 들리더니 네 명의 일본 수병이 나타났다. 그들은 잠시 정신을 차린 준사를 목격하고는 혀를 찼다. “정신력을 높이 살만하구나. 그러나 깨어난 것을 후회하게 될 거다.” 준사는 입을 열어서 대꾸를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다만 눈빛으로 항의하는 정도였다. 그들은 즉각 준사의 다리에 감겨진 붕대를 들척였다. 그들의 손이 준사의 절단되어 버린 다리에 닿자 엄청난 고통이 뼈마디를 통하여 엄습했다.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아프지만 참아라. 죽는 것보단 낫겠지.” 수병들은 준사의 몸과 다리를 각기 붙들어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고 봉합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갈고리처럼 생긴 바늘이 너널거리는 살점을 파고들어서 어떤 형식도 없이 피부와 피부를 누비고 다녔다. “왁!” 준사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다시 혼절
[우리문화신문=유광남 작가] 김충선은 더 이상 서아지를 상대로 대화를 잇지 않고는 군관에게 가덕도로 귀선을 항해 하도록 주문했다. 서아지의 끈질긴 고집을 받아주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귀선이 가덕도에 거의 접근하자 김충선의 태도가 돌변했다. “서아지, 너의 상관으로 명령한다. 하선은 나 혼자 단신으로 한다. 따라오지 마라” “엥? 무슨 소리야?” 김충선은 이미 결정한 모양이었다. 눈빛에 신념이 흘러 넘쳤다. “준사는 내가 구한다. 그대는 즉각 통제사에게 일본 함대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라. 무모한 부산 공격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 어서 떠나라!” “이런 법이 어디 있소?” “법 보다 빠른 것이 너무 많다. 친구, 부탁한다.” 사야가 김충선은 그 말을 끝으로 바닷물로 뛰어 들었다. 섬과는 지척이기에 사야가 김충선의 수영 실력으로는 충분한 거리였다. “대장? 사야가 김충선 장군!” 서아지가 놀라면서 소리쳤지만 이미 김충선의 모습은 바다를 헤엄치면서 저만치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귀선 위의 관군들과 수병들은 눈 깜박할 사이에 벌어진 상황이라 당황하는 모습들이었다. “격군들은 어서 하판으로 내려가 노를 잡는다!” 서아지의 명령에 따라서 우르르 격군들이 몰려갔다.
[우리문화신문=유광남 작가] “세상에, 이런 신기한 일도 있군.” “배가 물속에 가라앉아 있다가 다시 떠오를 수 있다니! 이게 말이 되는 건가?” “하여간 정도령은 사람이 아니라니까.” 서아지는 혀를 차면서 정도령의 반잠수정 귀선에 대한 놀라움을 표시했다. 김충선 역시 위기의 순간에 사용하라는 정도령의 설명을 들었지만 이렇게 완벽할 줄은 전혀 예상 못하고 있었다. “정도령은 이순신의 제국을 완성하라는 뜻으로 하늘이 내려주신 선물일세.” “장군의 지적이 맞는 것 같소. 그런데 준사는 어찌 되었을까요?” 사위는 이미 어둠이 찾아 들었으나 바다 위는 달빛 물결이 찰랑였다. 저 멀리 가덕도 해안가에 일본 관선들로 보이는 불빛이 점등처럼 깜박이고 있었다. 서아지는 본래부터 곱지 않은 인상이었으나 잔뜩 얼굴을 찌푸리자 더욱 괴기한 인상으로 변하였다. 김충선은 바다 주위를 들러보았다.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군.” “필경, 대낮처럼 밝았어도 준사의 행방을 알아내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저 무사하기를 기원할 수밖에는 방도가 없어.” “하지만 준사는 시시한 놈이 아닙니다. 알고 있죠?” 김충선은 인정했다. “물론이지. 일본에 있었어도 일만 오천 석의 영
[우리문화신문=유광남 작가] 준사의 일신이 무섭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일본 수병 여덟 명이 달려들어서 준사의 몸을 움쩍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래, 이것은 작두이다. 앞으로 날 마주치게 될 조선의 장수들은 나의 예법을 거쳐야 한다. 준사, 그대가 처음으로 나의 예법에 감동하는 영광을 갖게 될 줄은 몰랐다.” 준사는 이를 악물었다. “진작 죽어야 했다. 지독히도 운이 나빴다.” “무슨 소리냐, 굉장히 운이 좋은 것이다. 구루시마의 첫 제물이니.” 구루시마는 잔인한 미소를 머금으며 손바닥을 펼쳐서 자신의 절단 되어버린 다리를 재고 있었다. “날 그냥 죽여 다오.” 준사가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 그의 다리는 작두 아래로 놓이게 되어 있었다. 이것은 애초부터 구루시마가 준비해둔 저주였다. “두 다리를 자른다. 나와 똑같은 부위가 되어야 할 것이다. 더 많아도 아니 되고, 적어도 안 된다. 정확히 무릎 아래 두 치다. 시작해라.” 일본 수병들은 구루시마의 명령에 따라서 작두날 위에 준사의 다리를 올려두고는 절단 시킬 부위를 겨누었다. 준사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하지만 그는 결코 애원하지 않았다. 단지 그의 눈가에는 생사의 맹서를 했던 친구들의 얼굴이 하나,
[우리문화신문=유광남 작가] “놈을 잡아 산 채로 찢어 죽이리라!” 오늘의 구루시마는 어제의 구루시마가 아니었다. 두 다리가 절단되어 불구자가 되어버린 그는 정신적으로 피폐되어 있는 형국이었다. 평소 지니고 있던 예리한 분별력과 사리판단이 흐려져 있는 상태였다. 평소의 구루시마라면 냉철하게 판단하여 결코 조급해 하지도 서두르지도 않을 일이었다. 바다는 넓고 적의 배는 고작 한 척의 포작선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러나 하치스카에게 지시를 내리고도 그는 위엄을 상실하고 있었다. “배를 몰아라! 내 손으로 잡아야겠다.” 부관은 대장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는 법. 갑자기 구루시마의 함선이 전 속력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하치스카의 관선이 그것을 포착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뭐야? 이번에는? 우리 배는 정지한다.” 역시 붉은 색 적기를 펄럭이며 구루시마의 대장선이 달려오자 하치스카의 관선은 정지 명령을 내리고 대기하였다. 준사는 혼자서 포작선의 노를 저으며 관선과 대형 아타케부네(安宅船)의 출몰에 대하여 궁리를 하고 있었다. “나를 노리고 아타케부네가 직접 떴다면? 이것은 대형 사고로구나.” 준사는 화승총을 점검하고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예상대로 아타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