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오랍드리 풀섶에서 들려오는 여치소리를 자명종 삼아 첫 새벽 여명을 온몸으로 안으며 밭으로 나간다. 밤이 아직 다하지 않은 까닭에 소쩍새와 휘파람새 같은 밤새의 울음소리와 종달새라든가 뱁새 같은 낮 새의 지저귐을 섞어 들으며 감자를 캔다. 호미가 지날 때 마다 하얗게 웃으며 드러나는 감자의 얼굴! 도연명이 관직의 유혹을 버리고 손에 괭이를 잡은 참뜻은 바로 이런 맛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나 이제 돌아가려네 논밭이 묵어 나는데 어찌 아니 갈손가 여태껏 몸이 마음을 부렸다 하여 어찌 탄식만 할손가 (후략) 젊어서 떠난 고향 늙어서 돌아오니 고향 사투리는 그대로되 머리만 희어졌구나 아이들과 마주치니 서로를 몰라보고 어디서 오는 객이냐고 웃으며 묻는다 (전문) 나는 감자를 캐는 내내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와 하지장의 회향우서(回鄕偶書)를 흥얼거렸다. 과연 인간에게 있어서 고향이란 어떤 존재일까? 나는 그동안 정주민족에게만 향수병이 있는 걸로 알았는데 얼마 전 유목민들도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죽하면 여우도 죽을 때는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머리를 두고 죽는다. 하지 않던가. 그러고 보면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우리네 인생은 내일에 속으며 살아가는 것이라 한다. 내일이 되면 좀 나아지겠지 하지만 내일이 오늘이 되어도 별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래도 우리는 내일에 기대를 걸고 또 다시 속으며 살아간다.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우리에게 아직 그럴 능력은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복술에 기대어 미래를 알고 싶어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점술은 토정비결과 사주로 둘 다 사람이 태어난 때를 기본정보로 하여 점을 친다. 사주는 인간을 하나의 집으로 보고 태어난 년 월 일 시를 네 개의 기둥이라 여겨 사주(四柱)라 한다. 그 사주를 간지로 바꾸면 여덟 글자이기 때문에 팔자라 한다. 토정비결은 사주에서 시(時)를 뺀 세 기둥을 바탕으로 하여 주역의 64괘중 48괘를 풀어 점을 친다. 그런데 사주건 토정비결이건 시간이 언제 시작되었느냐를 알 수 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시간의 시작과, 우주가 태어난 날은 고사하더라도 지구가 생겨난 날 정도는 알아야 사람의 생년월일을 입력시켜 운세를 점칠 것이 아닌가? 비단 사주와 토정비결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점술은 다 마찬가지이다. 미래를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인간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어머니 어서 들어가세요. 꼭 성공해서 모시러 올게요. 가더라도 비 그치면 내일 가거라. 아닙니다. 마음먹었을 때 떠나야지요. 어머니 옆에서 눈물을 훔쳐내는 동생들에게 집안일을 당부하고 스물한 살 청년 박창오는 그렇게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 고향을 떠났다. 차창에 기대어 밖을 보니 떠나가는 그가 미웠는지 고향 산천들도 고개를 등지며 돌아앉았다. 종가의 장남으로서 쇠락한 집안을 일으켜 보겠다는 신념으로 타관 길에 오르긴 하였으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없지 않았다. 그럴수록 박 청년은 이를 악물며 마음속으로 성공을 다짐했다. 어스름해서야 청주역에 내린 그는 주소 하나만 달랑 들고 물어물어 숙부님 댁을 찾아갔다. 전신국 기술자로 근무하는 숙부와는 이미 자신의 출향의사를 서신으로 상담하였고 숙부도 도움을 주겠노라 약속한 상태였다. 네 편지를 받고 고민해 보았는데 너는 손재주도 좋고 하니 양복기술을 배워보는 게 어떻겠느냐? 청년 박창오의 첫 타향살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 불렀던 그는 견습생 일이 고달플 때면 노래로 노곤을 달랬다. 그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가 곧 청주 일대에서는 노래하는 양복쟁이로 통하게 되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우리 강토는 70% 이상이 산악지형으로 되어 있다. 그런 까닭에 대부분의 고을은 크고 작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고, 각 지방 지명에 뫼 산자가 들어가는 곳이 가장 많은 이유가 되었다. 필자가 태어난 곳 역시 깊은 산골이어서 지평선이 무엇인지 상상으로만 그리며 자랐다. 우리 학급에서 내가 가장 먼저 기차도 타보고 도회지 구경을 한 아이일 정도였다. 시집 온 후로 장터 외에는 한 번도 바깥세상을 구경해보지 못한 부녀자들이 수두룩하였다. 그러한 지리적 여건들이 우리 민족을 좁은 고을 안에 정주하게 만들었고,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고개는 내부세계와 외부세계를 구분 짓는 경계가 되었다. 외부의 이방인이나 신문물이 고개를 통해 들어왔고 야망을 품은 남정네들이 고개를 넘어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기도 하였다. 고개를 넘어간 남정네 가운데는 다시 고개를 넘어오지 못 한 이들도 많았고 그로 인하여 고개는 한(恨)과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나아가서는 고개 안쪽은 현실세계요, 고개 너머는 영(靈)의 세계로까지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갯마루에 장승을 세우거나 서낭당을 짓고 외부로부터의 잡귀를 막거나 고개를 오가는 이들의 무사안녕을 빌었다. 그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우리 아 여 왔어요? 아니요, 우리 아도 없는데요 쇠죽 쒀야 하는데 어델 기 갔나 고요한 산골 새벽은 장닭 횃소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집집마다 아들 찾는 소리가 물결처럼 번져 나갔다. 이럴 수가! 잠결에 들려오는 어른들의 웅성거림에 나는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십리길 차부를 향해 안개 속을 달렸다. 닳아빠진 고무신은 자꾸만 벗겨졌다. 눈물이 흘렀다. 나도 데리고 서울로 도망가겠다고 약속 하고선 자기네끼리 가버린 동네 형아들이 야속하고 야속했다. 땀에 내복이 흠뻑 젖고 나이롱 양말이 너덜너덜 해 져서야 겨우 도착한 차부엔 그 형아들은 먼지 하나 안남기고 떠나고 없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쇠똥만 신작로에 줄지어 있었다. 나의 열 한 살의 봄은 그렇게 배신과 함께 찾아왔다.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 땅의 처녀 총각들은 아지랑이 타고 오는 꽃소식에 마냥 마음이 설렐 수만 없었다. 범보다 무섭다는 지긋지긋한 농사가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 무작정 상경은 봄마다 치르는 연례행사요 전염병이기도 하였다. 오늘 감상할 노래는 당시 농촌상을 희화화(戱畵化)한 작품으로 1956년에 발표되어 라디오 전파를 타고 경향각처로 퍼져 나갔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봄은 진작 와 있었건만 그날도 오늘처럼 바람이 쌀쌀했다. 하늘에선 시멘트가루 같은 짙은 황사가 싸락눈처럼 내려앉았고, 얼마 전 피어난 자목련 꽃잎이 허옇게 배를 드러낸 채 사선으로 궤적을 그으며 떨어지는 1974년의 봄이었다. 정초부터 발표되는 긴급조치는 4월에 이미 4호째를 맞고 있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천명도 넘는 학생들이 연행되어 갔다는 소문으로 장안이 술렁거렸다. 인혁당 사건 때보다 훨씬 센 회오리바람이 불어닥칠 거라고들 했다.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걸어가는 행인들 사이에서 춘래 불사춘(春來 不似春)이란 탄식도 터져 나왔다. 나는 막연한 불안감과 혼란스러움으로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왔다. 솔직히 그때 나는 유신을 왜 해야 하는지 왜 유신을 반대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무지렁이였다. 그랬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머리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방에 틀어박혀 천장만 바라보고 있다가 안방으로 건너가니 텔레비전에서 초원의 집이라는 미국 드라마가 나오고 있었다. 처음엔 심드렁했으나 보다보니 재미가 붙었다. 우리나라에선 볼 수 없는 광활한 초원의 풍광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비록 흑백화면이지만 상상으로 채색을 해가며 대자연의 경이로움에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그 때도 사월이었다. 강가의 조약돌 같이 옹골차게 생긴 그녀가 내게 처음 오던 날이. 세상은 어지러웠다. 철옹성 같던 유신체제가 무너진 자리에 더 단단한 성을 쌓으려는 세력들의 이름이 연일 대중매체를 장식하던 때였다. 나는 그 시절 서울의 한 음악 감상실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유채 밭이 노란 물결로 출렁인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날, 근무를 마치고 휴게실에서 쉬고 있는데 솔깃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형, 제가 여자 소개해 드릴까요? 형 하고 잘 통할 것 같은 친구예요. 나는 그때 그 후배의 소개로 한 여성과 평생 지울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된다. 그녀를 처음 볼 때부터 왠지 낯설지가 않았고, 그녀 역시 어디서 나를 많이 본 듯하다며 친근감을 나타냈다. 첫 만남부터 마음이 통한 우리는 머잖아 금병산으로 봄맞이 산행에 나섰다. 진달래꽃이 무더기로 피어난 산풍경은 동화책 삽화 같았다. 그녀는 세상에서 봄이 가장 아름다운 산이라며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김유정이 이런 곳에서 태어났으니 봄봄 같은 가작들이 나오지 않았겠느냐며 환히 웃었다. 그녀는 음악도 많이 알고 있었지만 문학에 대한 식견도 대단했다. 이상(李想)을 논하더니 소월을 논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봄의 전령사 얼음새꽃(복수촌)이 피었는가 싶더니 어느새 매화가 만발이다. 멀리 청옥산은 아직 하얀 솜두루마기를 걸치고 웅크리고 있는데 삼화벌판엔 벌써 청보리가 한 뼘이다. 온갖 멧새 때 소리에 아침이 앞당겨져 양달 쪽 목련은 나발을 불고, 복사꽃 망울 속엔 연지가 가득하다. 여기저기서 먼저 피려고 꽃잎들이 다투는 소리에 밤마다 들뜬 잠을 잔다. 이미 남녘에선 벚꽃 개화소식이 들려오니 머잖아 상춘객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다닐 것이다. 누구나 꽃을 보면 기분이 좋아져 얼굴이 환해지지만, 꽃잎을 보면 떠나간 연인이 생각나 슬퍼진다고 노래하는 여인이 있어 소개한다. 나는 그룹 에드 포의 운영에 한계를 느껴 해산을 하고 미8군 무대 복귀를 결정 하였다. 새로운 밴드 결성에 있어 실력자들을 쉽게 영입할 수 있었으나 여성 보컬이 필요했다. 마땅한 적임자를 구하지 못해 애태우던 중 우연히 한 신인여가수의 무대를 보게 되었다. 나는 그녀의 실력에 반해 즉석에서 발탁하여 팀에 합류 시켰다. 그 여가수가 바로 이정화이다. 그때가 1966년으로 팀 이름은 덩키스였다. 우리는 8군 무대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이정화의 노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 이현 잘 있어요 음반 표지 잘 있어요 잘 있어요 그 한마디였었네 잘 가세요 잘 가세요 인사만 했었네 달빛 어린 호숫가에 앉아 내 님 모습 나 홀로 새기며 또 다시 오겠지 또 다시 오겠지 기다립니다 잘 있어요 잘 있어요 그 한마디였었네 잘 가세요 잘 가세요 인사만 했었네 잘 있어요 가운데중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返) 불가의 말이다. 참말로 그럴까?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진다는 말은 맞는 것 같은데, 과연 떠나간 자가 반드시 돌아올까?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많이 걸리긴 해도. 지금 나와 만나는 모든 이들이 과거에 내가 만들어 놓은 인연일 수도. 육도윤회(六道輪廻) 삶이 진정 윤회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얼마 만에 다시 만난 것일까? 사방 사십 리 되는 성에 세상의 씨앗 가운데 가장 작은 씨앗인 겨자씨를 산더미로 쌓아놓고, 사십년 만에 가서 한 알씩 다 가져오는 게 일 겁(劫)이라 하는 데. 사방 사십 리나 되는 바위를 사십년 마다 한 번씩 얇은 옷으로 스쳐서 다 닳으면 일 겁이라 하던데. 세상을 먼지로 바수어서 그 먼지를 다 헤아리면 일 겁이라 하던데. 우리는 몇 겁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이 비 그치면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 짙어오것다 이수복 시인은 왜 풀빛이 서럽다고 읊었는지 모르겠으나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으면 서럽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음이 착 가라앉고 우울해 지는 건 사실 인 것 같다. 착잡하면 생각이 많아지는 걸까? 창밖 화초에 맺힌 빗방울이 바람에 흩어졌다 다시 맺히는 그 순간에도 기억의 편린들로 제작된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지금이야 흔한 게 우산이지만 1960년대와 70년대엔 비닐우산도 귀했다. 그 시절엔 보슬비 정도는 맞으며 걸어가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었고 우산을 든 사람은 비를 맞고 가는 사람에게 우산 씌워주는걸 당연하게 생각 했었다. 그때 나는 귀밑솜털이 채 벗겨지지 않은 중학생이었다. 벚꽃낙화가 거리를 하얗게 색칠하던 봄비 내리는 날, 난생처음 사랑의 열병이란 걸 경험하게 된다. 하교 길에 버스에서 내린 나는 우산이 없어 종종걸음으로 걷고 있는데 누군가가 다가와 우산을 씌워주었다. 돌아보니 내가 가끔 들르던 문방구집 딸이었고 그녀는 이미 여고생이었다. 심장은 마구 뛰었고 머릿속은 텅 빈 듯하였다. 한 가지 분명한건 그녀는 자기 집을 훨씬 지나쳐 우리 집까지 나를 바래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