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사가독서는 조선 시대 젊은 문신들이 임금의 명으로 직무를 쉬면서 글을 읽고 학문을 닦던 제도다. 세종은 국가의 지식확대와 전문가 양성을 위해 문신들에게 출근하지 않고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했다. 글을 읽던 곳을 독서당(讀書堂) 또는 호당(湖堂)으로 불렀기 때문에 독서당 제도 또는 호당 제도로 부르기도 한다. 세종 2년(1420) 3월에 집현전을 설치한 뒤 집현전 학사들 가운데 재행(才行)이 뛰어난 자를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와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하고 그 경비 일체를 나라에서 부담하도록 하였다. 사가독서(賜暇讀書) 세종 8년(1426)에 문신 가운데서 덕과 재주가 있는 사람을 뽑아 사가(賜暇 : 휴가를 줌) 하도록 하여 집에서 공부하게 한 것이 그 시초로, 집현전의 대제학 변계량이 임금의 명령을 받고 이를 행하였다. (집현전 부교리 권채 등을 불러 집현관으로서 독서에만 전념하라고 명하다) 집현전 부교리(集賢殿副校理) 권채(權綵)와 저작랑(著作郞) 신석견(辛石堅)ㆍ정자(正字) 남수문(南秀文) 등을 불러 명하기를, "내가 너희들에게 집현관(集賢官)을 제수한 것은 나이가 젊고 장래가 있으므로 다만 글을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회보소민 : 태종공정대왕 휼추선지 회보소민(太宗恭定大王, 遹追先志, 懷保小民), 《세종실록》 9/3/16) 세종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백성 통칭 소민(小民)을 품고 가야 한다고 말한다. 어린 백성에 대하여 소인, 평민, 우민 등의 호칭이 있다. 소인(小人) : (양녕이 밤에 담을 넘어 도망가다) 신의 들은 바로 미루어 보면 경사대부(卿士大夫, 영의정ㆍ좌의정ㆍ우의정 이외의 모든 벼슬아치의 아우른 말)부터 여염집 소인[서민]들까지도 모르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세종실록》 1/1/30) 평민(平民) : 양녕(讓寧)이 항상 말하기를, 평민들과 더불어 같이 살고, 사냥으로써 스스로 마음 즐기기를 원한다.(《세종실록》 즉위년 11/7) 정신적으로 하위에 있다는 뜻으로는 우민(愚民)이란 호칭이 있다 민(民)에서 신민(新民) 그리고 생민(生民)으로 민은 약하다. 이러한 민을 세종은 자기 일을 하는 신민(新民), 항심을 갖고 일을 의식할 줄 아는 생민(生民)이 되기를 바랐다. 민(民)은 백성 민이라 하고 사람을 가리킨다. 뜻으로는 ① 사람 ② 잠을 자다의 眠(면)과 통용된다. 자식을 낳아 기르는 母(모) 자나 女(여) 자의 상하에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任賢使能(임현사능) : 어진 이를 임명하고 유능(有能)한 인재를 일 시키다.(《세종실록》 14/4/28) ... 이것은 대체로 엎드려 〈성대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신성(神聖)하신 우리 임금께서는 문(文)도 마땅하게 하시고 무(武)도 마땅하게 하시는 나라의 큰 법과 기율을 세우시어 태평성대(泰平盛代)의 기초를 더할 수 없이 높였으며, 어진 이를 임명하고 유능(有能)한 인재를 부리시어 널리 문무를 겸하여 걷어 들이시는 길을 열었습니다. (《세종실록》 14/4/28) 任賢使能, 廣開兼收之路。 급제한 문과 김길통, 무과 조석강 등이 사은의 전문을 올리는 데서 나온 말이다. 여러 기록을 보면 대략 세종 11년부터 ‘오곡(五穀)이 모두 풍년이고 온 백성이 함께 즐거워합니다.’ 등 ‘태평성세(太平盛世)의 모습’(《세종실록》 11/8/24) 나오고, 14년경부터는 안정된 승평(昇平, 나라가 태평함) 그리고 30년에는 융평(隆平, 갈등 없이평온함)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조선왕조실록》 원문 기록 건수 (세종/전체). 균평(均平) 6/98, 승평(昇平) 90/1227, 태평(太平) 100여/375, 풍평(豊平) 5/7, 융평(隆平)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사람 찾기와 인재 살리기 세종의 인재에 관한 명제는 사람 찾기와 사람의 재능 살리기이다. 다시 말해 재능 있는 사람을 찾아 그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게 해주는 정치를 펴려고 한다. 가) 의부(절개가 굳고 의로운 여자)ㆍ절부(절개가 굳은 부인)ㆍ효자ㆍ순손(조부모를 잘 받들어 모시는 손자)은 의리상 표창해야 할 것이니, 널리 방문하여 사실을 자세히 적어 아뢰어 표창하게 할 것이다. (《세종실록》 2/1/21) 나) 재주와 도덕을 가지고도 초야에 숨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짐을 구하지 않는 선비는, 내가 장차 자문하여 직무를 맡길 것이니, 감사가 널리 구하여, 이름을 자세히 적어서 아뢸 것이다. (《세종실록》 즉위년 11/3) 세종은 즉위하자 효(孝)를 행한 사람과 함께 인재 찾기부터 시작하였다. 또한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의 자손과 재주 있는 사람을 찾으라 했다. 어짐을 베푸는 정치의 시작과 끝은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이치에 따른 것이다. 이런 신념은 ‘천하에 버릴 사람[재목]은 없다’(《세종실록》 5/5/17)는 믿음에 근거한다. 천하무기인야 : (박연이 아뢰다) 옛날의 제왕은 모두 시각장애인을 악사로 삼아서 현송(絃誦, 거문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 때에는 계층이라 할 수도 없는 계급적 사회였다. 신분적으로는 하민, 소민에서 정착못하는 란민(亂民, 무리를 지어 다니며 안녕과 질서를 어지럽히는 백성), 난민(難民, 전쟁이나 재난으로 곤경에 빠진 사람), 부민(浮民, 일정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니는 백성), 류민(流民, 고향을 떠나 이리저리 떠도는 백성), 유민(遊民, 직업이 없이 놀며 지내는 사람) 등이 있고, 경제적으로는 가난한 궁민(생활이 어렵고 궁한 백성), 빈민, 소민(小民, 상사람), 하민(下民, 서민) 등이 있고, 떠돌이 부랑민, 천민(賤民, 지체가 낮고 천한 사람)등의 부류가 있고, 정신적으로는 무지한 우민, 평민, 서민, 소민, 시기적으로는 휼민, 요민(饒民, 살림이 넉넉한 백성), 되살려야 할 화민(化民, 일반 백성) 등이 있다. 이런 모든 부류의 백성을 교육해 ‘자각하는 생민(生民)’으로 만들려 하는 것이 세종의 생각이었다. ㆍ 백성[民]에서 생민으로 병이(秉彝) : “내가 생각건대, 하늘이 준 바른 덕과 진심 그리고 의젓하게 타고난 천성은 생민이 똑같이 받은 것이라, 인륜을 도타이 하여 풍속을 이루게 하는 것은 나라를 가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이위항식(以爲恒式)’ : 이렇게 함을 항식(恒式)으로 삼으라. (세종실록 즉위년 9/3) 세종에게서는 새 제도와 고쳐서 바꿈을 자신의 생생화의 특성으로 삼고 이를 법과 제도로 정착화하려는 의지를 볼 수 있다. 조선 건국 초기여서 토의를 거친 안건은 항구적인 법칙으로 체계화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이위항식以爲恒式’(‘이로써 항상 따라야 하는 형식으로 삼다’) 곧 정례, 규례, 법식, 제도, 법 등으로 나타나는 ‘항식’이 있는데 이는 시행 규칙을 만들어 가는 일이다. 《조선왕조실록》 전체 394건 가운데 많이 출현하는 임금은 태종 77건, 세종 225건, 성종 72건 순이다. 세종은 항식을 제도화하려는 ‘이위항식’의 임금이었다. 참고로 그 밖의 연관어는 다음과 같다. ------------------------------------------------- ‘恒式’ 원문 모두 810건, 태종 112건, 세종 304건, 성종 59건 ‘以爲恒式’ 모두 394, 태종 77, 세종 225, 성종 4 ‘永爲恒式‘ 모두 201, 태종 31, 세종 65, 성종 16 ’永以爲式‘ 모두 26, 태종 3, 세종 9, 성종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민보어신(民保於信) 백성을 보호하고 사랑하는 마지막 단계는 나라의 정치 제도가 백성에게 믿음[信]을 주는 일이다. 신(信)은 민본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신(信) : 임금이 말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법은 믿음을 보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처음에는 저화(종이돈)를 보물로 삼아 그것을 쓰게 하였다가, 인제 와서 오로지 돈만을 쓰게 하고 그것을 헛되이 버리게 된다면, 백성 가운데 저화를 가지고 있는 자가 어찌 근심하고 한탄하지 아니하랴.(세종 7/4/14) 처음에는 저화를 쓰게 하다가 지금에 와서 못 쓰게 한다면 이는 백성들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 강조하고 “민간에 돈을 주고서 저화를 거둬들이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고 한다. 백성이 정부의 시책을 따르게 하려면 국가가 먼저 믿음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믿음/신(信) : 그윽이 생각하건대 나라는 백성에게서 보전되고, 백성은 믿음에서 보전되는 까닭으로, 임금님의 정사(政事)는 반드시 믿음을 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세종 9/1/26) 가뭄으로 그만두기로 한 강무를 병조의 계로 다시 강무하는 데 관해 정지시키자는 상소가 올라온다. 강무를 해야 하는 것, 백성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을 도와 세종르네상스를 만든 인물(집단)을 살피고 있다. 집현전과 집단 지성② 세종 시대 이루어진 연구 집단으로 한국 첫 ‘집단지성’이라 할 집현전이 있다.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 集團知性]이란 다수의 개체가 서로 협력하거나 경쟁을 통하여 얻게 된 집단적 능력을 일컫는 용어다. 이는 개체의 지적 능력을 넘어서는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전회에 이어 집단 지성으로서의 집현전의 몇 활동을 이어가 보자. (영돈녕 유정현이 사직하고자 청했으나 허락하지 아니하다.) 유정현이 사직하는 글을 올려 아뢰기를, “신이 용렬한 자격으로 오랫동안 높은 벼슬을 더럽히고, 많고 후한 녹을 받으면서 처리하고 다스리는데 보람이나 효과가 조금도 없고 오히려 가물의 재앙을 부르게 되었나이다. 신은 나이 7순이 넘어 여러 가지 병이 몸에 얽혀서 기거하기도 불편하오니, 비옵건대, 신의 관직을 파면하시어 어질고 능한 이를 기다리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고, 직집현전(直集賢殿) 정인지(鄭麟趾)를 시켜 정현의 집에 가서 사표를 도로 주고, 말하기를, " ... 경은 사양하지마는, 나는 늙지 않았다고 생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을 도와 세종르네상스를 만든 인물을 살피고 있다. 집현전과 ‘집단 지성’ ① 지금까지 2021년 6월 황희 영상을 시작으로 세종의 시대를 꾸민 50여 명 학자와 문인들을 다루어 왔다. 인물 탐구는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기로 하며 마지막으로 조력자들의 집단이었던 두뇌집단인 집현전을 다루어 본다. ‘집현전’이란 세종 시대 이루어진 연구 집단으로 한국 으뜸 ‘집단지성’이라 할 것이다.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 集團知性]이란 집단적 지성이나 지적 능력의 결과로 얻어진 집단적 능력을 일컫는 말이다. 다수 개체가 서로 협력하거나 경쟁을 통하여 얻게 되는 지적 능력의 결과로써 개체의 지적 능력을 넘어서는 집합적인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집현전은 세종 때 궁중에 설치한 학문연구 기관이다. 고려 시대에도 있었지만 이름뿐이었고, 세종 2년(1420)에 세종이 실질적인 학문연구 기관으로 만들었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를 도왔고, 여러 가지 종류의 책을 만들어 내는 등 세종 때의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집현전의 기능 1392년(조선 태조 1) 7월에 제정된 관제에 따르면 고려의 제도를 따라 보문각(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정도전 (1342, 충혜왕 복위 3~ 1398, 태조 7) -② 정도전은 조선전기 정치인이자 학자이다. 조선의 정신적 기틀을 세운 인물이다. 호는 삼봉(三峰)이다 활동사항 정도전은 문인이면서 동시에 무(武)를 겸비했고, 성격이 호방해 혁명가적 소질을 지녔으며,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의론(議論)이 정연했다고 한다. 그는 오랫동안 유배ㆍ유랑 생활을 보내면서 곤궁에 시달렸다. 더욱이, 부계혈통은 향리(鄕吏)의 후예로서 어머니와 아내가 모두 연안 차씨(延安車氏) 공윤(公胤)의 외가 쪽의 서자였다. 특히 모계에 노비의 피가 섞여 있었다. 이러한 혈통 때문에 권문세족이나 명분을 중요시하는 성리학자들로부터 백안시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조선시대에도 3대 종 집안의 하나라는 세인의 평을 받았다. 그가 청ㆍ장년의 시기를 맞았던 고려 말기는 밖으로 왜구ㆍ홍건적의 노략질로 나라 안이 어수선했고, 안으로는 권문세족의 횡포로 정치기강이 무너지고 민생이 몹시 고단하였다. 이러한 때에 9년 동안의 시련에 찬 유배ㆍ유랑 생활은 그에게 나라를 사랑하고 백성 사랑 의식을 깊게 만들었으며, 그의 역성혁명(왕조가 바뀌는 일) 운동은 이러한 개혁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