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끌과 흙에 묻혔던 창극조가 바로 예술

2024.04.23 12:32:11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676]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판소리 동편제 명창, 송흥록과 대구 감영(監營) 소속 명기(名妓) 맹렬(猛烈)과의 사랑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맹렬은 송흥록의 소리를 듣고, 후원자 겸 연인 관계가 되어 동거하게 되었으나 자존심이 강한 두 남녀는 자주 다투고, 헤어지는 상황을 연출했다는 이야기,《조선창극사》에는 “맹렬이 떠난다는 소리에 송흥록은 슬프고, 외롭고, 애달프고, 사랑스러우나 미운 감정을 여지없이 발로하게 되었고, 이때 문밖에서 듣던 맹렬도 동감의 정을 이기지 못했으며 이것이 그 유명한 자탄가(自歎歌)로 진양조의 완성을 이루게 되었다”라는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조선창극사》라는 책은 일제의 폭거가 마지막 기승을 부리던 1940년, 1월, 조선일보 출판부에서 펴냈으며 저자는 정노식이다. 이 자료를 펴내기 2년 전인 1938년에 저자는 《조광》에 「조선광대의 사(史)적 발달과 그 가치」라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을 보완하고 증보하여 1940년, 조선일보에서 2년 전인 1938년에라는 이름으로 책을 펴냈다고 한다. 이 책의 간기(刊記 판권지)에는 저작 겸 발행자가 방응모(方應謨)로 되어 있는데, 이는 아마도 발행인을 저자로 기록하는 관례에 따른 것으로 보고 있다.

 

 

정병헌이 교주한 《조선창극사》에는 이러한 내용이 보인다.

 

“1930년대에는 판소리와 창극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때였다. 조선성악연구회가 결성되고 각 신문사에서 명창대회를 열게 된 것도 이 때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30년대 활동했던 김창환, 이동백, 정정렬, 김창룡과 같은 명창들을 중심으로 25명의 약전(略傳)을 작성한 것이 「조선광대의 사적 발달과 그 가치」라는 글이다. 이 글은 당시 명창들과의 면담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이어서 많은 오류와 함께 체계가 잡히지 않은 결점이 드러나 있다. 이를 바로 잡으려는 노력이 약 1년 반의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 결과로 《조선창극사》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25명의 명창 중심으로 약전에서 더욱 확대되어 그 중심 내용은 조선시대에 연행되던 판소리와 관련된 이야기라든가, 또는 명창들의 특장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어서 이 분야 연구에 귀중한 자료집이 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1964년에는 <동문선>에서 복각본이 출판되었고, 1974년에는 <형일출판사>에서, 그리고 1988년에는 <대제각>에서 영인본이 나왔다. 얼마 전, 2015년에는 태학사에서 정병헌 교수가 교주(校註, 문장 따위를 교정하여 주석을 붙임)한 《조선창극사》도 발행되었다. 정 교수의 교주본은 자세하고 친절한 각주를 포함, 판소리를 비롯한 창극 분야 연구에 귀중한 자료들을 제공해 주고 있어서 이 분야 연구나 판소리 확산 운동이나 발전에 활력소가 되고 있다. 글쓴이에게 귀중한 자료집을 제공해 준 정병헌 교수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

 

본문을 열기 전, 원본 《조선창극사》나 교주본에는 5인의 귀한 서문(序文)이 실려 있는데, 이 글을 읽어보면, 당시의 사회상이나 일제의 폭정, 특히 조선의 예술인들이 겪던 실상을 실감 나게 표현하고 있어서 공감은 물론이고, 당시의 선배 예술인들이 어떠한 환경에서 얼마나 힘들게 전통음악을 지켜 왔는가, 하는 점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참고로 이 책의 서문을 기고해 준 5인은 교육자인 이훈구를 비롯하여 독립선언서를 일본 정부 요로에 전달했다고 하는 문인 임규(林圭),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소설가 춘원 이광수(李光洙), 국제적 반일단체인 <신아동맹단> 활동과 함께 신간회 제주지회장을 지낸 김명식(金明植), 그리고 조선어학회 재정담당으로 옥고를 치르고, 해방 후에 원자력원장을 역임한 김약영(金若嬰) 등이다.

 

 

이들이 남긴 서문은 우리가 잘 모르고 있는 당시 사회의 실상이라든가, 문화예술계의 현상이나 현황, 특히 판소리를 비롯한 전통예술계의 참담했던 사정들을 구체적으로 확인시켜 주고 있어서 당시의 실상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간단하게 이들의 서문 가운데서 몇 대목을 소개해 보기로 하겠다. 먼저, 나라 밖에서 교수를 지낸 뒤, 귀국하여 조선일보 주필, 단국대, 성균관대 총장을 지낸 교육자이며 언론인이었던 이훈구의 서문 가운데 한 부분이다.

 

“창극조의 본질은 ‘소리’라고 하는 것으로 중부 조선 이남에서 발달되었다, 또한, 소리를 부르는 사람을 광대라 하였고, 이 광대는 일종의 직업화한 음악가로 구 사회제도 하에 재인(才人)이라는 특수 계급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잘못된 유가(儒家)관념과 그릇된 사회제도 하에서 이 재인은 극도의 천대를 받았다. 그러나 이들의 예술인 창극조는 대중음악으로 대중을 울리고 웃기고 하여 조선 사람의 심금을 울리고 조선 사람의 정서를 자아내었다. 그러함으로써 창극조는 완전히 조선 문화의 일부(一部)면으로 찬연한 광채를 발휘하였던 것이다."<중략>

 

형산의 박옥(璞玉)도 화씨(和氏)가 아니면, 전(傳) 국보(國寶)가 될 수 없고, 사막에 묻힌 금강석도 주인을 못 만나면 다이아몬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티끌과 흙에 묻혔던 창극조와 천대를 받은 광대도 예술이요. 예술가로 드높일 때가 왔고, 이 드높일 임무를 맡은 주인공은 누구인가? (다음 주에 계속)

 

 

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suhilkw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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