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우옥주(禹玉珠, 본명 李順愛, 여)는 황해도 옹진군 북면 화산동리에서 경신년(庚申年)인 음력 1920년 11월 17일 태어났다. 무남독녀로 태어나 무엇 하나 부족함 없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 우 씨 할아버지는 고위 관직에 올랐고 증조부는 한의로 명성을 떨쳤다. 끝까지 가르쳐 보자는 어른들 욕심에 우옥주는 어린나이 6살 때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여고 2학년 때인 17살 때 갑자기 마를 때로 마르면서 폐병 3기에 들어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병석에서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 즈음 집안에 갑자기 우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비 내리던 여름날 밤, 느닷없이 힘이 솟구친 우옥주는 옹진 진수대로 나가 죽은 송장을 파왔다.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집에서는 신이 들려 그렇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지만 끝까지 무당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무당 될 거면 집안 망신시키지 말고 칼이라도 물고 죽으라는 전주 이씨 가문의 저주에 아무런 인연도 없는 단양 우씨로 바꿨다. 그리고 무당이 되었고 병은 낳았다.
이때부터 이순애는 성과 이름을 갈아 우옥주가 되었고 나이 또한 다섯 살이나 늦도록 호적이 만들어졌다. 오갈 데 없는 우옥주는 최일리 만신을 어머니처럼 따르며 5달 동안 함께 살았다. 최일리 만신은 황해도 황치 무당으로 유명한 김기백 박수와 동갑이었지만 시집가 살다 25살 먹던 해 신이 내려 쫒겨 나와 김기백으로부터 신내림을 받고 무당이 되었다. 그리고 동갑내기였지만 배울 것 많은 김기백 박수의 신딸이 된 것이다.
최일리 만신은 싹수가 있었던 우옥주를 장차 큰 만신이 될 것으로 생각하며 우옥주의 일가친척과는 멀리 떨어져 살고 있었던 신아버지 김기백에게 줬다. 우옥주는 최일리 만신 도움으로 17살에 김기백 박수 밑으로 들어가 허주굿(내림굿을 받을 무당이 허튼 신을 받지 않고 옳은 신을 받았는지를 가리기 위해 행하는 굿)을 받았다. 해를 바꿔가며 내림굿과 소슬굿(황해도 지역 내림굿의 마지막 거리)도 치렀다.
영검하였던 우옥주는 마을을 돌며 쇠걸립(만신의 내림굿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걸립 행위 가운데 하나)도 하고 광대산에 올라가 광대신도 모셔왔다. 처음에는 최일리 신당에서 점사를 보다가 6달쯤 지난 뒤 독립하였다. 그리고 점사(점을 치는 일)를 보면서 굿일을 냈다. 그때마다 신아버지 김기백 박수와 최일리 만신이 함께 하였다. 우옥주의 영검함이 주위에 알려지자 칼만신이라는 별호도 얻었다.
김기백 박수는 우옥주를 끼고 돌면서 만구대택굿을 비롯한 여러 황해도굿을 가르쳤다. 그럴 때마다 최일리 만신이 늘 옆에서 도왔다. 우옥주는 직업 군인과 결혼하여 인애와 인순 딸 둘을 낳고도 굿일을 하였다. 1943년 8월 스승 김기백 박수가 작두 위에 올라서서 ‘왜놈’이라는 공수를 내리자 숨어 살피던 일본 순사가 끌고 간 광경도 지켜보았다. 그리고 통곡하였다. 그 뒤로 우옥주는 스승 김기백 박수를 다시는 보지 못하고 말았다. 그때 우옥주의 나이 만 23살이었다.
우옥주는 한국동란이 일자 신아버지 김기백 박수로부터 떠온 산구애비(신의 영험)를 갖고 월남하였다. 남으로 내려오면서 남편과 작은딸은 숨지고 큰딸 인애는 저녁거리 하러 나간 사이 없어지고 말았다. 혼자 방황하다 홀연 단신으로 월남하였다. 우옥주는 한 때 남편과 두 딸을 못 잊고 방황하면서 신벌이라고 생각하고 죽을 맘도 먹었다. 그러다 3년 뒤, 인천에서 우연히 최일리 만신과 상봉하였다. 그리고 다시 삶의 활기를 되찾고 무업을 재개하였다. 이때에도 최일리 만신은 우옥주 만신을 도왔다.
1960년대 초, 굿판에서 피리 부는 박동신에게 반해 재혼도 하였다. 그리고 인천, 서울, 이천 등지에서 활동하며 만구대탁굿 전승을 본격화하였다. 이때부터 수많은 제자를 거느리게 되었고 스승으로부터 배운 만구대탁굿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황해도 만구대택굿의 명수였기에 수많은 내림무당들이 그의 문전에 발을 디뎠다. 황해도굿 연행 주체 계보 변화와 의미를 연구한 무속학자 홍태한에 따르면 우옥주는 머리가 영리하여 굿 문서도 유장하고 치밀한 내용 또한 많았다. 이러한 까닭으로 우옥주는 많은 제자를 거느릴 수가 있었다.
우옥주 만신은 1982년에 스승 김기백으로부터 산구애비를 떠온 신도(神圖)와 신복 그리고 신구 일부를 양종승에게 넘겨줬다. 양종승이 우옥주 만신으로부터 물려받은 삼불제석 2점, 용궁부인, 칠성, 성수장군, 삼태성보별씨 등 6점의 신도(神圖)는 《금성당 샤머니즘박물관 도록-신도》 (2018)에 실렸다. 그리고 나머지 귀물은 평생 신불림을 하다 1993년 세상을 뜬 뒤 양종승에 의해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되었다.
한편, 1999년 독일 루어재단 주최 <한국 미술전>에 대한민국 국립민속박물관이 대여한 큰무당 우옥주 유품 일부가 출품되었을 때 독일의 유명 여성 조각가 바바라(Barbara)가 우옥주 만신 흉상을 제작하였다. 똑같은 흉상 두 개를 제작하였는데 하나는 큰무당 우옥주 유품 전시에 사용되었고, 나머지 하나는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관으로 재직하고 있던 조현종 선생을 통해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되어 보관되어 있다.
월남한 뒤, 우옥주 만신은 1993년 세상을 뜰 때까지 만구대탁굿 전승에 많은 힘을 썼다. 우옥주가 남한에서 함께 활동하였던 인물로는 김기백의 제자 최일리 만신, 우옥주 만신의 남편이었던 해주 출신 피리 연주자 박동신(1909-1992, 남, 국가무형문화재 강령탈춤 보유자 및 해서 연희의 명인, 일명 박곰보) 등이다.
그밖에 황해도 연백 출신의 환쟁이(화공) 배문일(1900-1991, 남, 환쟁이 및 소놀이굿 전승자), 황해도 연백 출신의 피리 연주자 지관용(1909-1986, 남, 국가무형문화재 강령탈춤 보유자 및 서도소리 명창), 황해도 재령 출신의 큰무당 송순복(1905-1985, 여), 황해도 해주 출신 상할머니 정기호(1910-1986, 여, 해주 권번 출신, 일명 깜둥이), 황해도 황주 출신 김경복(1915-1997, 남, 만구대탁굿 소놀이굿 전승자 및 서도 명창) 등이다.
우옥주 만신의 만구대탁굿은 그의 제자 정학봉(鄭學鳳, 1931년생, 여)에게 전해졌다. 정학봉 만신은 황해도 안악군 대행면 풍곡리 상교동에서 출생하여 한국동란 때 인천으로 월남하여 인천광역시 남구 숭의동 438-67번지에 살고 있다. 고향 안악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님을 따라 옹진으로 이주한 후 열두 살 되던 해인 1943년 우옥주 만신으로부터 내림굿을 받고 제자가 되어 만구대택굿, 소놀이굿 등 황해도 굿을 배웠다.
당시 김기백 만신이 세상을 뜬 직후여서 정학봉은 김기백 만신의 명성은 알고 있었지만, 얼굴은 보지 못했다. 그리고 정학봉 만신은 내림굿을 받은 지 2년 뒤, 해방되던 해인 1945년 평안도 출신 박수득(1918-1960)과 혼인하면서 우옥주와 헤어졌다. 1951년 1.4 후퇴 때 인천으로 피난 나온 정학봉 만신은 자신의 집에 신당을 차리고 무업을 재개하였다. 남편 영향으로 평안도 출신의 무당과도 활동하였다.
정학봉 만신이 굿을 배우면서 활동을 하고 있을 때, 네 살 먹은 아들이 아프게 되어 평안도 출신의 쑤오리 만신을 불러 병굿을 하였다. 그런데 쑤오리 만신은 황해도굿 만세바지(굿을 할 때 한 사람이 소리하면 다른 사람이 따라서 같은 소리를 받아 하는 일)를 못하는 처지여서 황해도 사리원 출신의 이구 만신을 불러 왔다.
이 자리에서 정학봉은 굿을 배우려는 욕심에 이구 만신에게 어머니라고 부르고 굿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1956년 우연히 굿하러 간 굿당에서 신어머니 우옥주 만신과 상봉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우옥주 만신을 따라 다니며 다시 만구대택굿 및 소놀이굿 학습을 하면서 공연 활동에 참가하였다.
2005년 만구대탁굿이 황해도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면서 정학복 만신이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2015년에는 정학봉 큰만신이 명예보유자가 되자, 그의 제자 김계순(1952년생, 여) 만신이 2대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그리고 김계순 만신과 함께 활동해 오던 임혜경(1968년생, 여) 만신 그리고 이동균(1967년생, 남) 상장구가 이수자를 거쳐 전수교육조교로 인정되었다. 이로써 황해도 만구대탁굿 전승은 밝혀진 계보만 보아도 강박수(1대)-김기백(2대)-우옥주(3대)-정학봉(4대)-김계순(5대)-임혜경(6대) 및 이동균(상장구) 등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