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이 부끄러운가?

2021.03.03 11:37:19

스스로 버림으로써 영원한 명예를 얻는 동백꽃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87]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읍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읍니다

 

                              ... 서정주, '선운사 동구'

 

선운사를 찾아간 미당 서정주 시인이 보고 싶었던 것이 동백꽃인지 주막집 노래하는 아주머니인지가 헷갈리기는 하지만 선운사 하면 선운사 입구 오른쪽 비탈에서부터 절 뒤쪽까지 군락을 이루고 있는 수천 그루의 동백꽃을 빼놓을 수가 없다. 한창 꽃을 피웠을 때 복스럽게 꽃이 피다가도 질 때가 되면 후두둑 송이째 떨어져, 우리의 가슴에 담아있던 눈물도 후두둑 떨어지며 가슴이 텅 비어버린다. 선운사 동백은 동백 자생지의 최북단이라고 하니 꽃 피는 시기가 늦은데 그보다 훨씬 남쪽에서는 지금쯤이면 벌써 꽃이 피고도 활짝 피었을 것이다.

 

 

십여 년 전 부산에 지역책임자로 근무하게 되면서 알게 된 동백꽃, 나는 물어보았다.​

 

"도대체 싱싱한 이 꽃은 시들지도 않았는데도 왜 땅에 뚝뚝 떨어지는 것인가요?“

 

처음에는 아주 조그맣게 시작된 그 궁금증은 점점 진폭이 커지면서 빨리 답을 얻지 않으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큰 병이 날 것만 같았다. 그것도 작은 꽃이 아니라 어른 주먹만 하거나 손바닥만 한, 그리고 물론 더 큰 그런 꽃들, 그 색깔에 잡티 하나 섞이지 않은 새빨간 꽃이, 암술이나 수술이 뭐 어디 덧나거나 시들지도 않았는데도, 갑자기 땅으로 ‘툭’하고 누구 눈물보다도 더 무겁게 땅으로 떨어지는 것인가? 부산에서의 첫 겨울은 그 고민에 대한 해답을 구하느라 나도 모르게 지나갔다.

 

“♪ 꽃피는 동백섬에 봄은 왔건만~ ♬”​

 

제주 남원읍, 여수 오동도와 거제 지심도 등등 남해안 지방 곳곳에 이 꽃이 멋지게 핀다지만 이 노래가 대표하는 도시 부산의 동백섬도 이 꽃의 천지다. 부산에서 이 꽃을 시화(市花)로 지정한다고 해도 다른 도나 시군에서 항의하기가 어려울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해운대 앞의 그 섬에 가면 겨울과 봄 사이 이 꽃이 땅에 쌓여 지나가는 말발굽에 밟히는 것이 서너 치나 될 정도라고 옛 문헌에서 말하지 않던가?​

 

한겨울 국토 대부분이 추워서 꽁꽁 얼을 때도 해운대 동백섬 양지바른 비탈에는 아기의 얼굴만큼 큰 꽃들이 사나운 겨울바람을 맞이해서 조금도 굴하지 않고 늠름한 자세로 높은 지조를 과시한다. 어느 틈엔가 아파트단지의 정원을 독차지한 이 꽃들은 거의 전국이 다가올 겨울에 대한 공포로 막연한 두려움을 느낄 12월부터 빨간 꽃잎과 노란 꽃술들로 우리에게 활짝 웃는다. 그 꽃들이 금방 질 줄 알았는데, 1월이 가도, 2월이 가도, 3월이 가도 아직도 핀다. 봄을 알린다고 우리가 반기는 매화나 산수유, 벚꽃들이 지고 난 뒤에도 여전히 그 꽃은 곳곳에서 웃음을 잃지 않고 시민들에게 인사한다. 길가에도, 산비탈에도, 주택가의 마당에도 길옆에도 이 꽃은 피어있다. 과연 부산을 대표할만한 꽃이다.

 

부산에서 첫 겨울을 지내면서 가까이서 본 이 꽃은 과연 고고하기가 이를 데 없다. 요즈음에는 얼굴색이 노란색, 흰색으로 바꾸기도 하지만 원래 이 꽃은 진한 빨간색뿐이었다. 윤이 자르르 흐르는 얼굴에, 짙은 루즈를 칠한 훤한 미인의 입술 같은 그 색, 정열과 사랑을 상징하는 이 색, 뜨거운 심장의 내용물처럼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뭔가 뭉클하게 하는 이 색, 그런 빛깔을 가지고 언제까지나 고고한 자태를 뽐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아무도 보지 않는 사이에 갑자기 스스로를 던진다.​

 

시인들은 이 꽃에서 사랑의 배반과 버림받음을 연상하고 대신 울어준다.

 

“다시는 울지 말자

다시는 울지 말자

눈물을 감추다가

동백꽃 붉게 터지는

선운사 뒤안에 가서

엉엉 울었다.”

 

                      ... 김용택

 

“그대 위하여

목 놓아 울던 청춘이 이 꽃 되어

천년 푸른 하늘 아래

소리 없이 피었나니”

 

                         ... 유치환

 

시인 서정주에 이어 김용택이 선운사의 동백숲 안에서 처음 엉엉 목 놓아 운 다음부터 사람들은 이 꽃만 생각하면 눈물을 흘리려 하고 맥없이 울려 한다. 그러나 도대체 과연 이 꽃은 실연과 배반의 꽃인가? 이 꽃이 한창때 스스로 그렇게 한 치의 미련도 없이 버리는 것을 실연으로만 볼 수 있을까?? 한겨울에 붉은 꽃을 피우는 것만 해도 대단한 데 왜 꽃잎 하나 시들지 않은 채 꽃송이 그대로 툭 떨어지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절개를 지킨 여인네가 죽어서 이 꽃이 되었다는 전설이 그 이유를 설명하는가? 가톨릭에서 말하는 ‘순교자’라는 노랫말이 그 이유를 말해주는가? 진정 이 꽃은 사랑하는 이에게서 버림받은 꽃인가?

 

아니다. 이 꽃은 버림받은 꽃이 아니라 스스로 버려서 살아나는 꽃이다. 모든 생명체는 기운이 다해 말라죽은 다음에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 자연의 철리이지만 이 꽃만은 말라죽기도 전에 땅으로 떨어지며, 그것은 그 자신의 선택으로 이뤄진 고귀한 결정이다. 누가 강요를 했던가? 아니다. 가장 아름다울 때 미련 없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울 수 있다는 잠언을 가르쳐주기 위해 그는 그러한 아픈 선택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꽃을 순교자로 보는 가톨릭의 인식이야말로 지극히 정당하고도 아름다운 것이다.​

 

歲寒和氣獨胚胎 추운 겨울에도 화기받아 홀로 꽃망울 맺어

却殿群芳恰半開 뭇 꽃보다 뒤늦게야 꼭 절반을 피웠는데

調格自高霜始見 격조는 절로 높아 서리 온 뒤에 나타나고

風流無伴雪同來 풍류는 짝할 자 없어 눈과 함께 어울리네

 

                                                                ... 서거정, 산다화(山茶花)​

 

꽃잎이 완전히 마르기 전에 떨어지는 것으로 벚꽃도 있지만, 벚꽃은 아무 생각도 없이 우루루 한꺼번에 떨어진다는 데서, 그리고 그 꽃 하나하나의 아름다움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데서 자기의 얼굴을 걸고 떨어지는 이 꽃과는 사뭇 다르다.

 

1년에 한 번, 아주 잠깐만 미친 듯이 현란하게 피었다가는 한꺼번에 사르르 지는 벚꽃, 그 꽃잎에 사무라이의 혼이 새겨져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무라이처럼 질 때, 곧 목숨을 버릴 때 의연하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아직 나무에 꽃을 남긴 채 바람에 흔들리며 흩어져 내리는 벚꽃들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관념은 정직이나 결백을 우선하는 일본적인 사고의 영향 때문이라지만 그들은 벚꽃을 통해 개인의 얼굴이나 인격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결백을 보는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가 좋아하는 이 꽃은 스스로 얼굴을 그대로 갖고 땅으로 자신을 과감히 버리는 것이어서, 작은 잎으로 나뉘어 물고기 비늘처럼 흩어지는 벚꽃과는 그 의연함이나 그 지조나 비교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굳이 비교하자면 일본인들은 스스로가 그러하기에 그 꽃을 좋아하는 것이요, 우리는, 아니 우리라고 하는 것은 좀 그렇고 부산이나 이 남부지방, 이 꽃이 많이 자라는 곳의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얼굴을 내걸고 명예와 자존심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이 꽃과 이 꽃의 그 처절함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일본 사무라이들이 셋부쿠(切腹)를 할 때 흰옷을 입고 그 위에 자신의 피를 물들인다고 하지만, 이 꽃은 흰 눈이 덮인 대지 위에 피 보다도 더 붉은 자신의 몸을 툭 던지며 참다운 버림의 미학을 완성한다. 가장 아름다울 때 미련 없이 세상을 버릴 줄 아는 위대한 버림의 미학자이다. 그 버림으로써 동백은 영원한 명예를 얻는다. 그러기에 진정으로 도덕과 염치와 의리와 정직을 아는 군자들은 자존심을 지키는 이 꽃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최근 우리 사회를 보면 정치인이나 장관 혹은 남을 심판하는 사람들도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탄식이 이어진다. 옳음을 추구하려는 의지도 없고 양심도 체면도 없이 오로지 손에 쥔 것을 놓지 않으려는 것 같다. 왜 지도자들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일까? 왜 자기가 잘못을 했으면 동백꽃처럼 자신의 얼굴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과감히 자신을 버리지 못하고 구차하게 자리를 보존하려는 모습을 보이는가? 옳고 그름을 다 알고 있을 텐데 왜 그것을 지적하는 것 자체를 비판하고 말을 못 하게 막으려 하는가?​

 

그런 지식인들은 스스로 버림으로써 영원한 명예를 얻는 동백을 어찌 바라볼꼬? 동백처럼 남의 눈치도 보지 않고 때를 맞춰 활짝 피었다가 갈 때가 되면 매끈한 얼굴, 기품있는 얼굴로 자신의 명예를 지키며 가는 지식인들의 모습, 그것을 보고 싶다. 그것이 옳은 길이라는 칭찬을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세상을 보고 싶다.

 

 

이동식 인문탐험가 lds@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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