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글 박계업 시인, 사진 양인선 기자]
지난 6월 27일부터 7월 2일까지 (사) 탄운이정근의사기념사업회(회장 김겸, 아래 '기념사업회')에서는 부회장 이호헌 선생을 단장으로 정한나 (수원여대 식품영양과) 등 기념사업회 이사 및 대학장학생 22명이 '백두산 및 고구려 유적 답사'를 다녀왔다. 탄운 이정근(灘雲, 李正根 1863-1919) 의사(義士)는 1919년 3월 31일 화성군(현 화성시) 향남면 발안 장날을 기해 제자들과 지역민들을 포함한 1천여 명을 이끌고 만세 시위에 앞장서다 일경의 총검에 복부를 난자당하자 흐르는 피를 손에 움켜쥐어 일경의 얼굴에 뿌리며 숨이 끊어질 때까지 ‘조국의 독립’을 외치다 장렬히 순국의 길을 걸은 독립투사다. 이번 기념사업회와 답사일정을 함께한 박계업 시인이 답사기를 보내와 싣는다. 박 시인은 시집 《안개를 걷어올리는 그물처럼≫ 등의 책을 쓴 중견 시인이다. -편집자- |
아쉬움 가득한 만주 기행
이번 여행은 3·1운동 당시 순국한 탄운 이정근 의사를 기리기 위한 기념사업회 주최 5박 6일(6월 27일~7월 2일) 백두산ㆍ서간도 답사 여행이었다. 모두 22명이 참가한 이 여정에서, 나는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부채감을 조금이나마 덜고, 고구려 유적지를 둘러보며 천지에서 우리 민족의 근원을 되새기고자 했다.
첫날,
서해 단둥 크루즈 뱃속에서 요람 속 꿀잠 같은 하룻밤을 지내고 만주벌판 옥수수와 함경도 잣 조각을 씹으며 압록강 이천리를 달려 한반도를 되짚어보았다. 구름 속으로 희미해진 압록강과 그리움 가득한 북녘땅을 아래 두고 천혜 요새 졸본성 999계단을 올라 광활한 만주벌판 광개토 대륙을 밟고서 고구려의 옛 영광을 상상하며 깊은숨을 들이켰다. 성을 내려와 환인을 뒤로하고 3시간 30분을 달려 서파, 송강하 아래 여장을 풀고 내일 천지를 꿈꾸며 잠자리에 들었다.

둘째 날,
아침부터 찌뿌둥한 날씨, 불길한 예감에 불안했지만, 점심 무렵 언뜻언뜻 보이는 해를 보며 안도했다. 끈적끈적한 날씨 속에서 수많은 기다림, 기다림은 짜증이 아닌 설렘 그 자체였고 들뜬 내 마음이었다. 그러나 도대체 몇 굽이를 더 올라야 천지에 당도할 수 있을까? 끝없는 수목의 바다, 자작나무 숲길을 달려 지천으로 깔린 야생화 꽃밭 사이 콘크리트길 위에서 지프차가 헐떡거릴 즈음 도착한 천지, 이번 여행에 제일 큰 기대였고 바람이었지만 천지에서 천지를 분간할 수 없었고, 안개와 구름이 뒤섞여 비까지 내린다.
이대로 주저앉아 천지가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고 싶은 마음
저 구름과 안개 걷히고 천지의 낯바닥 보려면 얼마나 많은 기도와 함성이 필요한 걸까? 이대로 주저앉아 천지가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다 배고픈 짐승들의 서러운 울음소리를 들으며 천지에 틀어박힌 은하수 향해 고개 숙인 채 밤을 지새우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산을 내려서며 흐르는 장백폭포 물줄기, 얼음처럼 차가운 폭포수에 손을 담그며 그 모든 물을 퍼부어도 이 아쉬움 씻어낼 수 없을 것 같아 몸서리치면서 어둠의 길을 타고 통화로 떠난다.


셋째 날,
고구려 두 번째 수도 집안(集安)에 자리 잡은 동방의 피라미드 거대한 석곽, 찾는 이 드문 장수왕릉은 한가하여 쓸쓸했다. 가까운 거리에 광개토대왕 비로 이동하여 유리창에 갇혀있는 대왕비를 올려다본다. 뻗쳐오른 비석 위에 꼿꼿하게 새긴 필체들, 해독하기는 어렵지만 대왕비의 웅장함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바로 옆 도굴로 파헤치고 허물어진 광개토대왕릉을 분한 마음으로 오르며 중국산 막걸리와 오이 한 조각 올리고 더위를 식히는데 강 건너 만포 제련소 굴뚝의 회색 연기와 말없이 흐르는 압록강은 침묵으로 역사를 전하고 있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집안까지 걸어와 대왕비를 보려 했지만 끝내 관람료가 없어 돌아섰다는 일화가 떠오르며 천지를 보지 못한 내 아쉬움은 생각조차 사치스러웠다. 분지에 자리 잡은 국내성의 외곽성이었던 환도 산성, 수많은 돌무덤 고분군에 비가 내린다. 광막한 폐허 앞에 가슴 먹먹하다. 산성을 오르는 길은 막혀있고 찾는 이도 흔치 않아 고요만 가득한데 여전히 환도 옛터는 침묵한 채 화려한 한때를 꿈결처럼 간직했다.


국내성을 바라보며 점심을 먹는다지만 성은 볼 수 없었고 널따란 식당 안 둥근 테이블에 손님 서너 팀, 포만감에 차에 오르니 빗줄기가 거세다. 공사로 차단된 고속도로를 포기하고 좁은 길을 돌아 압록강 하구섬 선착장으로 향하지만 길은 멀고 화장실을 찾을 수 없어 참다못한 서너 명, 차를 세우고 옥수수밭으로 들어갔다. 도착한 하구섬 선착장은 안개 속에 비가 내리고 꽁꽁 잠긴 개찰구 옆으로 거친 물결이 다가온다. 출렁이는 남쪽 강물의 그리운 파문, 내 온기가 저곳에 닿기를 소망하며 조심스레 손을 담가 지문을 찍어보지만, 함께 꿈꾸던 바다는 멀기만 하다. 강변을 따라 의주와 위화도에 그럴듯한 껍데기 집과 화려한 치장, 물안개 너머 북녘 하늘 칠흑 같은 산골 마을과 풍요한 남쪽의 미안함을 안고 그날이 빨리 오기를 고대해본다.
단둥에서 마지막 아침, 강변 진주도강판호텔 옆으로 압록강이 흐른다. 연일 계속되는 비로 물은 불어있고 아침 강물 위에 물안개 자욱하다. 이곳에도 우리 사는 곳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새가 지저귀고, 나무가 자라고, 꽃이 핀다. 떠나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아침을 먹고 멀지 않은 거리, 고구려 박작성에 오른다.
중국인들이 역사를 왜곡하여 만리장성 동쪽 끝이라 주장하는 호산장성이다. 수직 벽돌 계단, 땀 흘리며 오른 정상에서 바라본 북한 땅에 수천의 북한 동포들이 삽을 들고 무너진 압록강 제방 둑을 쌓고 있었고 강변 모래밭에는 푸른 풋콩을 구워 먹는지 모닥불 연기가 간간이 피워 올랐다.

손에 잡힐 듯 지척에 있는 북한땅
산 아래 철조망 한 줄을 경계로 조선과 중국의 국경선, 지척에서 눈을 돌리니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가장 멀리 있는 땅, 한발만 뛰면 닿을 듯한 북한 초소에 앳된 병사 한 명 보초를 서며 경계하고 있다. 성을 내려와 후덥지근한 더위와 끈적끈적한 등을 식혀보려 대동강 맥주를 병째 들이키고 강변을 달려 압록강 철교로 향한다. 신의주 높은 빌딩과 놀이공원, 둥글고 커다란 붉은 색 건물에 일심단결을 외치며 풍요를 자랑하지만, 속내를 알 수 없어 여전히 궁금하기만 한데 끊어진 다리 위쪽으로 이어진 옆다리, 신의주로 향하는 중국 화물차들을 바라보며, DMZ 거대한 감옥 한쪽 벽을 허물고 가슴속 좁은 길이라도 내어 다음 여행은 북한 땅에서 단둥을 내려다보고 싶다.
자주 소통하고 드나들기를 소원하면서 점심은 한족이 운영하는 북한식 냉면집에서 물냉면을 먹었다. 꿩고기 육수에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가 조금씩 들어있고 육수는 슴슴하나 양은 풍성했으며, 인조고기 주먹밥과 반가운 배추김치가 나왔다. 오후에 타지 못한 유람선에 다시 연락했지만, 여전히 압록강에 안개 자욱하고 출항 대기 중인 배들이 굵은 밧줄에 결박당한 채 맺힌 매듭 풀지 못한 마음처럼 그 자리를 맴돌 뿐이다. 인천을 향하는 배 시간은 멀었고 여유시간은 길었다. 남은 시간 채우려고 단둥 시내 금강산공원에 올라 부슬비 맞으며 시간 보내다가 여객선 터미널에 도착해 배에 올랐으나 바다 안개로 출항은 알 수 없었고 계속해서 대기 중이다.

이번 여행은 기약 없는 통일과 중국의 왜곡된 역사관, 폐허의 고구려 유적지와 보지 못한 천지로 아쉬움 가득한 답사 기행이었지만 궂은 날씨에도 꽉 찬 하루 속에 반가운 만남으로 보람된 시간이었다.
<끝내며>
가이드 아버지는 압록강 건너 서간도 옥수수밭에서 태어나 강냉이죽을 먹으며 6.25 전쟁에 중국 지원군으로 참전하고도 살아남았다. 한족이었음에도 부족한 북한 청년을 대신해 북한 여자와 결혼 후 평양에 살면서 1남 6녀를 낳았다. 그가 태어난 서간도 초가집은 옥수숫대에 둘러싸여 바람도, 짐승도, 흉흉한 소식도 막아주었지만, 전쟁을 피하지 못하고 평생 고향을 등져야 했다. 그 아들 왕서방은 중국 국적으로 평양에서 태어나 역사를 전공한 후 중국어와 한글을 안다는 핑계로 만주 땅 가이드가 되었다, 버스 안 관광객을 상대로 여행안내보다는 북한산 참깨, 잣, 능이, 목이버섯, 들쭉술, 고사리, 땅콩, 명태 중국 귀주성 모태주와 차마고도 보이차를 열심히 팔고 있으며, 북한 여자와 결혼한 것을 후회하며 살고 있다. 그의 꿈은 남한 땅을 밟아보는 것이지만 평양의 가족을 생각하면 엄두가 안 난다고 하소연한다. 오늘도 버스 트렁크에는 관광객 캐리어보다, 가이드가 팔아야 하는 농수산물이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