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말이 없지만 그 침묵은 가장 오래된 위로

  • 등록 2025.08.09 10:5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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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빛》, 박노해, 느림걸음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296]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박노해 시인이 이번에 일곱 번째 사진 에세이집 《산빛》을 펴냈습니다. 2019년에 첫 사진 에세이집 《하루》를 냈으니, 해마다 한 권씩의 사진 에세이집을 냈군요. 책 표지에는 제목 《산빛》 밑에 앙증맞게 산봉우리 두 개를 표시하고 그 밑에 이런 글귀가 보입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산, 산이 있다. 산은 말이 없지만 그 침묵은 가장 오래된 위로이다. 산은 위대한 사랑의 수호자, 위대함은 ‘힘’이 아니라 ‘품’이다.”

 

품? 뭘 품는다는 것인가? 이에 대해 박 시인은 서문에서 좀 더 자세하게 말합니다.

 

“산은 위대한 사랑의 수호자, 위대함은 ‘힘’이 아니라 ‘품’이다. 그 산의 품에서 모든 것이 자라나고 살려지고 주어진다. 산의 품에 깃들기만 하면, 그저 바라보고 그려보기만 하면, 생생지기(生生之氣)의 산빛은 나를 맑게 하고 치유하고 일깨우고 다시 일어서 나아가게 한다.”

 

그렇군요. 그래서 박 시인은 사람들 속에서 나를 잃어버린 것만 같은 날, 소란과 속도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날에는 높은 곳으로, 더 높은 곳으로, 내 안의 가장 높은 산정으로 올라가 볼 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상과 시대를 정면으로 내려다보면 마침내 새로운 빛이 비쳐오고 나만의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산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적극 공감합니다. 저는 조용히 산속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산의 숨결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산 위에 서면 땀을 흘리고 올라온 만큼 내 자신이 정화되는 것 같고, 그러면서 저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노라면 박 시인 같지는 않지만, 뭔가 새로운 빛이 비쳐오는 듯도 합니다.

 

그런데 내 기억에 박 시인이 이렇게 산빛을 강조하며 책을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습니다. 박 시인은 서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세상은 급진하고 인간은 급변하고 있다. 세대와 세대 사이는 다른 행성의 존재만큼 낯선 ‘단절’을 겪고 있다. 우주에서 단 하나뿐인 고유성의 나는, 평지의 세계 속에서 똑같은 목표 정렬과 끝없는 비교 경쟁에 쫓기며 피로와 무력감, 불안과 우울증의 내밀히 번져가는 심리적 전염병을 앓고 있다. 그렇게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강인한 생명력, 그 빛과 힘이 사라지고 있다.”

 

그렇습니다. 요즘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단절을 심하게 느낄 때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요즘같이 언론이 활발하고, 사회관계망 서비스로 시간, 공간적 제약 없이 모든 사람이 연결되는 시대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단절을 느낀다는 것이 아이러니합니다. 소통의 공간은 활짝 열려있지만, 그런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와 맞는 사람들의 울타리에만 머물며 그 울타리 너머의 사람들과 소통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니! 소통하지 않으려고 할 뿐만 아니라 적대시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요즈음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극우가 확산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은 사람들이 박 시인이 말하는 심리적 전염병을 앓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나라가 이번에 시민들의 힘으로 내란을 극복했지만, 앞으로도 이러한 전염병이 창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에게 산빛을 보이는 박 시인의 사진에세이는 적절한 때에 세상에 나온 것 같습니다. 《산빛》은 박 시인이 직접 세상의 산을 돌며 찍은 모두 37장의 사진 옆에 시인이 그때 그 사진의 현장에서 느꼈던 영성과 지혜를 풀어놓은 것입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만 보여드리겠습니다. 먼저 <산빛의 품에서>라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에 대해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 아래 저 높은 만년설산을 품은 나라.

이 추운 곳에서 사람들은 층층의 계단밭을 일구고

나무를 심고 집을 짓고 아이를 기르며 살아왔다.

산정의 흰빛과 대지의 푸른빛.

사람들은 날마다 지상에서 천상을 오르듯

두 세계 사이를 걸어 오르며 삶을 일군다.

산은 위대한 사랑의 수호자,

위대함은 ‘힘’이 아니라 ‘품’이다.

내 안에도 위대한 사랑의 품이 있으니,

아, 나는 무엇을 품어주는 생인가.”

 

사진을 보며 저도 네팔의 히말라야 산길을 갈 때 본 층층의 계단밭이 생각납니다. 박 시인의 사진에 나오는 계단밭보다 위, 아래로 더 많이 올라가고 내려간 계단밭을 보면서, 입이 벌어졌었지요. “저기 농부들은 농사를 짓기 위해 매일 산 하나를 오르내리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둘러보는데, 절벽 바로 위에까지 이어진 계단밭도 보이더군요. 그러면서 밭을 일구다가 자칫 미끄러지면 절벽에서 추락할 수 있는 그런 계단밭에서 삶을 이어가는 농부들에 경외심도 생겼었지요.

 

 

안데스 산정의 높고 깊은 콜카 계곡 위를 날고 있는 콘도르입니다. 사진을 보노라니, 나도 모르게 사이먼&가펑클의 노래 ‘엘 콘도르 파사’가 흥얼거려지는군요. 안데스 사람들은 콘도르가 억압받는 자들의 슬픔과 분노를 그 날개에 실어 전하는 ‘하늘의 전령’이라고 믿어왔답니다. 박 시인은 이 사진 에세이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랜 식민 지배 속에서도 안데스인들은 아이들과 함께

이곳을 찾아와 산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노래했다.

마침내 콘도르가 계곡에서 하늘을 향해 솟구쳐 날아오면

‘정의는 독수리처럼!’ 다시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는다. ”

 

마지막으로 사진 작품 하나만 더 보겠습니다. <야생화 핀 콜카 협곡>이라는 작품입니다.

 

 

박 시인은 안데스 고원 해발 4천 미터에 있는 콜카 협곡은 깊이 3천 미터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협곡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엄청나군요. 그러나 이곳은 깎이고 파인 상처의 자리가 아니라고 합니다. 콜카 협곡은 그 모든 시간과 사건을 품고 다시 잉태하는 신비로운 ‘대지의 자궁’이라고 합니다. 저는 협곡 사진을 보며 그저 감탄만 하는데, 역시 시인의 감성은 다릅니다. 박 시인은 에세이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생명의 물줄기가 실핏줄처럼 뻗어 흐르고

아스라한 영토에 뿌리박은 야생화는

말없이 수억 년을 피고 지며 향기를 전한다.

고귀함이란 높이만큼의 깊이를 품은 것,

상처의 자리마다 꽃을 피우는 것이다.”

 

3천 미터 깊은 협곡 위에서 하늘하늘 꽃을 피우고 있는 들꽃. 현장에서 그런 들꽃을 바라보는 느낌은 어떨까? 이렇게 37편의 사진에는 하나하나 박 시인의 깊은 혜안에서 길어 올린 영성의 에세이들이 실려있습니다.

 

에세이집에 나오는 박 시인의 더 많은 사진과 에세이를 소개하고 싶지만, 직접 에세이집을 사서 감상을 하고 싶은 분들을 위해 여기서 멈추렵니다. 이러한 박 시인의 사진은 에세이집에서뿐만 아니라, 전시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라 카페 갤러리에서 <산빛> 사진전(https://www.nanum.com/site/board_nanum/32232210)이 열리고 있지요. 사진전은 내년 3월 29일까지 열립니다. 어떻습니까? 오래간만에 서촌 나들이하면서 서촌에 있는 라 카페 갤러리에서 전시회도 보고, 전시회장에서 직접 사진에세이집도 사보는 것은요?

 

에세이집 끝에는 그동안 박 시인의 저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사진에세이 시리즈도 소개하고 있는데, 그 소개의 글이 눈에 들어오네요. 마지막으로 이 소개의 글을 인용하면서, 박노해 시인의 7번째 사진에세이집 《산빛》을 본 제 감상을 마칩니다.

 

“박노해 시인이 20여 년 동안 지상의 멀고 높은 길을 걸으며 기록해 온 ‘유랑노트’이자 길 찾는 이에게 띄우는 두꺼운 편지. 권마다 37점의 흑백 사진과 설명문이 담겼다. 인생이란 한 편의 이야기이며 ‘에세이’란 그 이야기를 남기는 것이니, 삶의 화두와도 같은 주제로 해마다 새 시리즈가 출간된다.”

 

 

양승국 변호사 yangaram@lawlog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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