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255)
승정원은 ‘목구멍과 혀(喉舌)’에 해당하는 부서로, 왕명 출납을 맡아 옳은 것은 아뢰고, 부당하다고 여기는 것은 거부하였으니, 그 임무가 막중하다. 개국 이래로 승지에 임명된 경우 사람들이 신선처럼 우러러 보았으며, 세속에서는 은대학사(銀臺學士)라고 일컬었다. 시중드는 하인들도 모두 은패(銀牌)를 차고 자색 옷을 차려 입고 스스로 영광스럽게 여겼다.
순암집》-
승정원. 오늘날로 말하면 비서실과 같은 관청이다. 임금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할 수 있어 소속 관원들의 자부심과 권한도 대단했다. 승정원은 관원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면서도, 세속에 휩쓸리지 않고 올곧게 왕명을 전달하는 청렴함과 과중한 업무를 이겨낼 수 있는 체력이 요구되는 곳이기도 했다.
한국고전번역원의 승정원일기번역팀이 펴낸 이 책, 《후설》은 승정원일기와 승정원에서 일하던 관원들을 자세히 보여준다. 조선왕조실록보다 덜 알려져 있으면서도 분량이나 내용에서 뒤지지 않는 승정원일기를 조명하는 책이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던 승정원에서 작성한 일종의 ‘국정일기’였다. 오늘날로 말하면 부처별 보고와 이에 대한 임금의 업무지시를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승정원을 설치한 조선 초기부터 기록하기 시작했으나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각종 화재 때 많은 부분이 소실되고, 현재는 1623년(인조 1년) 3월부터 1910년 8월까지 모두 288년 동안의 일기가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승정원일기》 작성은 주로 승정원의 실무 관원인 주서가 담당했다. 업무 수첩인 초책(草冊)과 붓을 들고 임금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말과 행동을 기록했다. 주서는 임금의 최측근으로 왕명을 전달하고 국정 현안을 기록하는 자리였던 만큼 관원의 신망이 두터운 사람이 주로 임명되었다.
주서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임금과 신료 사이에 주고받는 대화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온종일 한 사람이 기록을 맡기에는 무리가 있었기에 상번과 하번으로 나누어 교대로 배석했다. 배석한 자리에서 적은 기록은 그 뒤 따로 정리해서 《승정원일기》를 작성하는 데 활용했다. 주서가 하는 일이 승지와 워낙 연관이 깊어 ‘주서는 장래의 승지’라고 불릴 정도였다.
주서는 이처럼 촉망받는 관직이었지만 업무강도가 높아 고되기로 소문이 났다. 임명된 지 10일만 지나면 언제 주서를 벗어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관원도 많았던 듯하다. 너무 힘들어 병이 자주 났던 탓인지,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주서들의 근무 현황을 보면 병을 사유로 자리를 비운 경우도 꽤 많았다.
일이 고되었던 것은 대화를 실시간으로 계속해서 한문으로 적어야 하는 고강도 번역작업을 온종일 해야 했던 까닭이다. 주서의 한문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빠르게 주고받는 대화를 우리글도 아닌 한문으로 기록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어려움에도 임금의 말과 행동이 고스란히 기록된 288년간의 일기가 남아있다는 것은 우리 역사의 자랑거리라 할 만하다.
승정원의 주요 업무 가운데는 조정의 소식지 조보(朝報)를 작성하는 것도 있었다. 승정원에서 배포하는 조보를 통해 하급 관료나 유생들까지도 조정의 돌아가는 소식을 알 수 있었다. 조보에 낼 자료 작성도 주서가 담당했는데, 그날 기록한 《승정원일기》의 주요 내용을 요약해 정리하면 승지가 검토하고 확정했다.
승정원에서 확정된 자료를 내놓으면 여러 관서에서 필사를 담당하는 관원들이 이를 필사하고, 전날의 조보를 다음 날 아침에 공식적으로 역로(驛路)를 통해 전국에 배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조보의 영향은 꽤 커서 조보에 낼 사안들을 철저히 확인하라는 임금의 명이 있기도 했고, 내지 말아야 할 사안을 낸다거나 잘못된 글자가 있을 때는 처벌을 받기도 했다.
승정원일기를 보면, 임금이라고 해서 감정 절제를 특별히 잘하거나 완벽한 모습만 있지는 않았다. 영조의 심기를 상하게 한 상소를 올린 성균관 유생 정유는 임금 앞에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할 말을 다 했다. 이에 크게 노한 영조가 문진을 들어 책상을 내리치고 상소장을 밀어 계단에 던지자, 신하들이 성균관 유생의 기개를 꺾으면 안 된다며 말리기도 했다.
(p.140)
영조: 사람의 자식으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계속 제기하니, 이 어찌 된 일인가?
정유: 성상의 하교가 매번 이와 같으시니, 이것이 바로 아랫사람들이 답답해하는 이유입니다. 성상의 하교에 매번 차마 제기할 수 없는 말이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며 이 뒤로는 악역이 있어도 문제를 제기하여 아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난신적자가 이리저리 날뛰더라도 이를 징토하는 자가 없어 나라가 반드시 망할 것이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줄임)... (상이 서진을 들어 책상을 치니, 서진의 중간이 부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또 소장을 밀어 계단에 던졌는데, 음성과 안색이 매우 엄하였다.)
이처럼 《승정원일기》는 임금과 신하가 나누는 대화가 때로는 바로 시나리오나 극본으로 써도 좋을 만큼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1994년부터 번역이 시작되었으나, 아직도 번역률이 저조할 만큼 방대한 기록이다. 지금보다 더 번역이 진행되면 우리 문화의 거대한 보물창고로 수많은 역사물 창작에 소중한 참고가 될 자료다.
조선시대 비서실, 승정원.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임금을 보좌하는 것은 권력도 따르지만, 무거운 책임도 따른다. 격무를 마다하지 않고 끊임없이 국정을 기록했던 승정원 관료들 덕분에 오늘날 수백 년 전의 국정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승정원의 근무 모습과 승정원일기가 궁금한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