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경상량(予更商量, 내가 다시 생각하여 보겠다)

  • 등록 2025.08.14 11:5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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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성어(四字成語)로 보는 세종의 사상 42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이 정치를 하며 신하들과 대화를 많이 하려 하고 일을 처리함에 신중히 하려는 노력은 여러 곳에서 보아왔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의론 끝에 결론에 이루지 못하는 경우다. 이때 몇 가지 대안이 나올 것이다. 다시 생각하여 훗날 재론하든가 아니면 그 안건을 일정기간 연기하든가 아니면 파기하든가 일 것이다.

 

먼저 ‘여경상량’을 실록에서 보면 전체적으로 많은 횟수는 아니나 세종 때 8번 나와 빈도수로는 조선시대 임금 가운데 가장 많다.

 

<세종실록>에 보이는 내용의 개요를 보자.

 

1. 세종 7년 5월 14일: “장리 최맹온의 부정을 징계하자는 집의 김타 등의 상소문이다.”

2. 세종 7년 6월 2일: “좌의정 이원 등과 관리의 승급·수령 파면의 일을 의논하다.”

3. 세종 10년 5월 26일: “김효정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범하는 것을 엄히 다스려야 한다고 하는 상소를 올리다.”

4. 세종 11년1월 4일: “중국 황제가 구하는 석등잔의 헌납 방법과 학문진흥책을 의논하다.” 5. 세종 12년 8월 13일: “현재 강경법의 《육전》에 기재를 허락지 않는다.”

6. 세종 14년 3월 15일: “상장소 제조 맹사성ㆍ권진ㆍ허조ㆍ정초 등을 불러 의논하다.

7. 세종 14년 5월 3일: ”집의 조서강이 신호의 치죄를 아뢰다.“

8.. 세종 21년 4월 11일: ”사간원 우헌납 황보공이 불법의 흥함을 우려하는 글을 올리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몇 ‘여경상량’의 경우를 살펴보자. 먼저 세종 10년의 예다.

 

(김효정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범하는 것을 엄히 다스려야된다고 하는 상소를 올리다.) 좌사간 김효정(金孝貞) 등이 상소하기를," ... 우리 전하께서는 정성을 다하여 다스리기를 꾀하시어서 법과 제도는 크게 갖추어지고, 은택은 생명에 미치어 태평한 세월이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심정(心情)이 안일(安逸)에만 익숙하여져서, 도리어 분수에 안정하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교만하고 사치하여져서 풍속이 날로 경박(輕薄)하여지더니 그 조짐은 진실로 자라게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 세상의 교화에 도움 됨이 있어서 우러러 전하의 형벌 없기를 기대하시는 본의(本意)에 맞기를 바랄 뿐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유의(留意)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들의 말이 옳도다. 그러나 작은 일이 아니므로 급자기 시행할 수 없으니, 내가 다시 생각하여 보겠다." 여경상량(予更商量) 하였다. (⟪세종실록⟫ 10/5/ 26)

 

세종 12년의 일이다. 강경과 제술에 관한 일이다.

 

상정소(詳定所)에서 아뢰기를, 지금 편찬하는 《육전(六典)》 안에 ‘문과(文科)에는 강독하고 제시나 글을 번갈아 쓴다.’라는 조문을 그대로 싣고 삭제하지 말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법을 시행하려고 할진대, 모름지기 금석(金石)같이 굳어야 하고 분분히 변경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현재의 강경법(講經法)은 이미 문신들과도 의논하였고, 기필코 거행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번거롭게 법전에 실어 무엇 하겠는가.”

 

권근(權近)이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을 시험해 뽑는 마당에서 그 낯을 직접 보고 경서(經書)를 강독하여 고하의 등급을 매긴다는 것은 실로 온당치 않다.’ 하여, 어찌 강경에서만은 본인의 얼굴을 직접 보고 질의응답을 해도 무관하단 말입니까. 참으로 이는 좋지 않은 법입니다.’ 하기에, 내가 문신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던 것인데, 강경을 불가하다고 하는 자가 많아서, 내가 비로소 이 말을 따른 것이다." 하였다... 찬성 허조(許稠)가 아뢰기를, “강경(講經)의 법을 행하지 않으면 선비들이 모두 시가와 문장만을 힘써 결국은 가르칠 만할 만한 자가 없게 될 것입니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경서의 강의를 행하지 않으려는 것은 혹 사정(私情)이 있지나 않을까 해서 하는 것이다." 하였다. 허조가 다시 아뢰기를,“ 어느 누가 사정을 준다 해도 그저 한두 명에 불과할 것이오며, 한두 명이 요행히 합격한다 치더라도 나머지는 모두 성실한 학자일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다시 검토해 보겠노라." 하였다. (⟪세종실록⟫ 12/8/13)

 

직접 관리를 뽑을 때 직접 대면이냐 시;가와 문장이냐 하는 논란이 주제다.

 

세종 14년에는 노비 자녀들의 신분 문제에 관한 일이다.

 

(상정소 제조 맹사성ㆍ허조 등을 불러 의논하다) 상정소의 제조 맹사성ㆍ권진ㆍ허조ㆍ정초 등을 불러 의논하기를, “내가 즉위(卽位)한 이래로 조종께서 이미 이루어 놓은 법은 고치지 않으려고 마음먹었으며, 만약 부득이한 일이 있을 때만 여러 번 고친 일이 있다. 그러나 노비에 대한 법은 아직 고친 일이 없다... 어떻게 하면 위로 태종께서 이루어 놓은 법에 위배되지 아니하고, 아래로 인륜(人倫)의 바른길을 파괴하는 일이 없게 할 수 있을 것인지 각기 충분히 의논하여 보고하라." 하니, 사성 등이 아뢰기를,”.., 그가 낳은 자식은 다만 어미만 알 뿐 아비는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노비는 어미를 따른다는 법이 생기게 한 까닭입니다.

 

이제 그 〈계집종의 자식이라도 아비가 양민이면〉 아비를 좇아 양민이 된다고 한 현행법(現行法)을 폐지하고, 다시 어미를 좇아 천민이 되게 하는 법을 세운다면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만약 조종의 기성 법령(旣成法令)을 그렇게 변경하여 고칠 수 없다고 한다면, 마땅히 공·사비(公私婢)로 하여금 양민인 남편에게 시집갈 때는 각기 본디 주인에게 신고(申告)하여, 시집가는 것을 허가한다는 증서를 작성하여 받은 뒤에 시집가게 한다면 거의 조종께서 이루어 놓은 법에도 맞고, 아비와 자식의 인륜도 또한 분명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 “다만 〈공ㆍ사비(公私婢)의 자녀를〉 아비를 따라 양민(良民)으로 한다는 것과 영전을 폐지하는 문제는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대하니, 내가 다시 깊이 헤아려 보겠다."라도 하였다. (⟪세종실록⟫ 14/3/15)

 

 

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kokim9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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