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실록을 보려 했다가 참은 세종

2021.05.27 10:22:59

[‘세종의 길’ 함께 걷기 71]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사초(史草)

 

임금이 되는 순간 두 가지 규율 속으로 들어간다. 그 하나는 경연을 이어가야 하고 다른 하나는 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임금의 말과 행위는 사관의 기록으로 역사에 남겨져야 한다. 임금은 현재에 사는 게 아니고 미래에 사는 것이고 평가도 현재에서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받게 된다. 임금은 개인이지만 가문(家門)이고 가문이지만 국가가 되어 있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살해한 직후, 이성계 일파는... 공양왕에게 이방과를 보내어 정몽주의 죄를 따질 것과... 결국 공양왕의 굴복을 받아 내어(《태조실록》 총서 131번째 기록) 곧이어 ‘화가위국(化家爲國, 집안이 변하여 나라가 됨)’하였다.”

 

한 가문이 변하여 나라의 기초가 된 것이다. 조선이 시작되고 역사기록은 이어진다. 개인에게 족보와 문집이 남겨지듯 마치 이의 연장선에 사초가 있는 듯하다. (왕가의 어진과 족보는 선원전-璿源殿에 보관한다.)

 

사초(史草)란 좁은 의미로는 전임사관인 예문관 봉교ㆍ대교ㆍ검열이 남긴 역사기록의 초고(草稿)며, 넓은 의미로는 전임사관과 춘추관 사관이 남긴 기록을 포괄하는 말이다. 사초는 두 부로 작성되는데 하나는 사관들이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서 작성하여 집에 보관한 가장사초(家藏史草)이고, 또 하나는 예문관(춘추관)에서 보관하는 사초다.

 

사초를 두 부로 구분하여 작성하고 나누어 보관한 것은 그 가운데 한 부가 어떤 이유로든 분실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장사초는 사초와는 달리 조정이나 민간에서 듣는 어떤 정책이나 인물에 대한 세평(世評) 등을 종합하여 자신의 의견을 적을 수 있었다.

 

사초는 비공개로 관리되었다가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할 때 모두 거두어들였다. 이를 위해 평시 사초 기록을 소홀히 하면 그에 따른 벌도 중하였다. 선조 때 시작한 《승정원일기》도 사초가 된다. (승정원은 임금의 말씀을 전하는 요즘의 비서실에 해당한다.)

 

기록유지

 

만일의 경우 사초를 유실한 자에 대한 처벌을 논한 일이 있다.

 

“상정소에서 아뢰기를, ‘사초(史草)를 잃어버린 사람에게는 은(銀)을 징수하고 옥에 가두는 법은...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옥에 가두는 법은 너무 무거우니, 정부에 내려 다시 의논하게 하라.’ 하였다. 황희ㆍ맹사성ㆍ권진 등이 아뢰기를, ‘본인이나 자손이 사초를 잃어버린 사람은 가두어 두는 것은 면제하고 은 20냥(兩)을 징수하며 죽을 때까지 다시 등용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입법(立法)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세종실록》 14/6/16)

 

 

만일 사관의 직책을 가진 사람이 사초를 훔치거나 누설하면 어찌 될까. 세종 31년 때 관련 기록이 있다.

 

“춘추관에 소장한 사초(史草)는 모두 군신의 선악(善惡)을 기록하여 후세에 가르쳐 보이는 것이오매, 관계됨이 지극히 중하여, 다른 문서에 견줄 것이 아니오니, 엄하게 막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사관(史官)이 자기에게 관계되는 일을 싫어하거나, 혹 친척과 친구의 청을 들어서, 그 사적(事迹)을 없애고자 하여 책을 완전히 훔친 자는 ‘제서(制書, 임금의 명령을 일반에게 알릴 목적으로 적은 문서)를 도둑질한 율(律)’로써 논죄하여 참수하고, 도려내거나 긁어 없애거나, 먹으로 지우는 자는 ‘제서(制書)를 찢어 버린 율’로써 논죄하여 목을 베며, 동료 관원으로서 알면서도 고하지 아니하는 자는 율에 의하여 한 등(等)을 내리고, 사초(史草)의 내용을 외인에게 누설하는 자는 ‘근시관(近侍官)이 기밀(機密)의 중한 일을 남에게 누설한 율’로써 논죄하여 머리를 벨 것입니다. 위의 사건은 비록 죄를 용서하여 주었을지라도 정범인(正犯人)은 직첩을 빼앗고 영영 쓰지 못하도록 하며, 범인이 죽었으면 또한 추탈(追奪, 죽은 사람의 죄를 논하여 살았을 때의 벼슬 이름을 깎아 없앰)을 행하고, 알면서도 고하지 아니한 자와 누설한 자는 직첩만 거두게 하여, 금방(禁防, 금하고 방지하는)을 엄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31/3/2)

 

사초를 지켜야 할 중요성이 나오고 있다. 가) 자기에게 관계된 것 나) 친척과 친구의 청을 듣거나 다) 도려내거나 지우는 일은 책을 찢는 일과 같고 라) 동료 일을 알면서 고하지 않거나 마) 사초의 내용을 일반에게 누설하는 일은 그에 따른 벌을 받게 된다. 다시 관리가 되지 못하고 목이 베이기에까지 이른다.

 

사초는 언제 수집하는가가 문제

 

그렇다면 이런 사초는 어느 때 수집하느냐가 문제가 된다. 임금이 살아 있는 동안 공개되면 자칫 화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춘추관에서 사관의 사초를 당대에 거두는 일이 없게 해달라 주청한 일이 있다.

 

”춘추관에서 아뢰기를, "사관(史官)의 사초(史草)는 임금의 잘잘못과 재상들의 어질고 어질지 않음과 현시 정치의 아름다운 것과 악한 것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만약 당대에서 그 사초를 거두어들인다면 착하고 밝으신 임금의 시대에 있어서 비록 의심할 만한 것은 없을지라도, 그러나 펴 보실 때에 혹은 사초 때문에 죄를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사관이 드디어 직필(直筆)로 일을 기술(記述)하는 자가 없을 것이니, 마땅히 당대에서 거두는 일이 없게 하소서. 하니 곧 상정소에 내렸다.“ (《세종실록》 14년 5월 17일)

 

그런데 우리가 성군으로 부르는 세종도 당대에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 당대에 부왕인 태종의 행적이 궁금했던 것이다. 그래서 《태종실록》을 보려 했다. 그 전말이 실록에 잘 나와 있다.

 

 

”임금이 도승지 신인손에게 이르기를, ‘옛날 제왕은 친히 조종의 실록을 본 사람이 제법 많았고... 그러나 이것은 모두 당시 사기를 보려고 한 까닭에 신하들이 불가하다 한 것이나, 조종의 실록을 보는 것이야 무엇이 해로우랴. 옛날 우리 태종께서 《태조실록》을 보고자 하니, 변계량(卞季良) 등이 이르기를, ‘《태조실록》은 편수하기를 매우 잘하여 사실을 모두 바르게 썼는데, 이제 전하께서 나아가 보신 뒤에 내려 주신다면, 후세 사람들은 모두 믿지 못할 사기라 하여 도리어 의심할 것입니다.’ 하므로, 태종께서 보시지 못하였다...

 

당 태종이 사기를 보고자 하니, 저수량과 주자사(朱子奢) 등이 ‘폐하께서 혼자서 본다면 일에 손실이 없지마는, 만약 사기를 보는 이 법이 자손에게 전해지게 되면, 후세에 그른 일을 옳게 꾸미고 단점(短點)을 장점으로 두둔하여 보호하며, 사관이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면 여러 신하는 임금의 뜻에 순응하여 제 몸을 완전하게 하려 하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이니, 천년 뒤에는 무엇을 믿겠습니까.’ 하였으니, 신 등의 논의는 바로 이 말과 같습니다. 이 두 신하는 모두 명신이라고 이름난 사람이니 그의 말은 반드시 본 바가 있을 것이고... 역대 사기가 갖추어져 있는데 어찌하여 반드시 지금의 실록을 보아야 하겠습니까. 하물며 조종의 사기는 비록 당대는 아니나 편수한 신하는 지금도 모두 있는데, 만약 전하께서 실록을 보신다는 것을 들으면 마음이 반드시 편하지 못할 것이며, 신 등도 또한 타당하지 못하다고 여깁니다." (《세종실록》 20/3/2) 하니, 임금은 마침내 보지 아니하였다.

 

역사의 한 예를 들어 세종이 부왕의 기록을 보려고 하였으나 황희나 신개와 같은 충직한 신하들이 있어 결국 세종은 뜻을 거두게 되고 사초의 본 정신은 유지된다. 후대에 역사적으로 사초에 손대어 고치거나 하면 그에 따른 옥사가 일어나게 되기도 했다. 유가정신과 역사기록정신은 조선을 지킨 큰 두 기둥이 되어 있다.

 

 

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kokim9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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