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정벌과 이종무

2021.07.22 11:13:04

큰일을 치르노라면 크고 작은 일이 많고
[‘세종의 길’ 함께 걷기 75]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 시대의 인물을 살피고 있다. 세종 때는 작은 전쟁이라 할 이민족과의 전투로는 대마도 정벌과 파저강 전투가 있었다. 전투에서는 영웅 내지 관심받는 사람이 나타난다. 그 가운데 하나로 대마도 정벌의 이종무가 있다. 이종무는 고려, 태종 때부터의 인재라 할 수 있다. 대마도 정벌은 태종의 지휘로 이루어졌으나 세종대에 이루어진 일이라 세종의 치적으로 이어진다.

 

오늘날에는 일본과의 마찰 연장 선상에서 왜구정벌이라는 상징적 공적 때문으로 대마도가 자주 논의되기도 한다.

 

이종무(李從茂, 1360년~1425년)는 공민왕 때 태어났고 기록에 따르면 어려서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다고 한다. 조선 건국 뒤에도 태조에서 세종에 걸쳐 조선 초기 4대 임금을 모셨다. 2차 왕자의 난 때에는 이방원의 편에 가담하여 이방간의 군사를 전멸시켰다.

 

대마도정벌

 

 

일본 왜구는 고려 말부터 자주 조선반도를 침입하고 있었다. 세종 1년 5월에 충청도 비인현(서천)에 수백 척의 왜인 배가 침입해 피해를 주고 있었다. 그들은 중국과 교역을 한다는 핑계를 대고 있었다. 이에 세종 1년 마침내 태종이 주관하여 6월 19일 그들이 비어 있을 대마도 정벌이 이루어진다. 이종무의 선단이 대마도에 이르자 주민들은 자기들의 상선이 돌아온 줄 알고 맞을 준비를 했다. 6월 29일에 군대를 뭍으로 내렸다.

 

“이종무 등이 배를 두지포(豆知浦)에 머무르게 하고 날마다 편장(褊將)을 보내어 육지에 내려 수색하여 잡고, 다시 그 집 68호와 배 15척을 불사르고, 도적 9급(級)을 베고, 중국인 남녀 15명과 본국인 8명을 구했다. 적이 밤낮으로 우리 군사를 막으려 하므로, 26일에 종무가 전진하여, 이로군(尼老郡)에 이르러 3군에 명령하여, 길을 나누어 육지에 내려, 한 번 싸우고자 좌우 군사들을 독려하여 먼저 뭍에 내리게 하니, 좌군 절제사 박실(朴實)이 적과 서로 만났다. 적이 험한 곳에 모여 복병하고 기다렸다가, 실이 군사를 거느리고 높은 곳에 올라 싸우려 할 그 순간에, 졸지에 복병이 일어나 앞으로 돌격해 와서, 우리 군사가 패전하여, 편장 박홍신(朴弘信)ㆍ박무양ㆍ김해ㆍ김희들이 전사하였으므로, 실이 군사를 거두어 다시 배에 오르니, 적이 추격하여 왔다. 우리 군사 중에 전사하거나 언덕에서 떨어져 죽은 자가 백 수십 인이나 되었다. 우군 절제사 이순몽과 병마사 김효성들이 또한 적을 만나 힘껏 싸워 막으니, 적이 그제야 물러갔고, 중군은 마침내 뭍에 내리지 아니하였다. 도도웅와는 우리 군사가 오래 머물까 두려워서 수호(修好)하기를 빌면서 말하기를, "7월 사이에는 항상 풍파의 변이 있으니, 오래 머무름이 옳지 않습니다." 하였다.(《세종실록》 1/6/29)

 

전투에서는 적병 114명을 베고 포로로 잡힌 중국인 남녀 131명을 구했다. 그리고 왜적선 129척, 왜구 집 1,940여 호를 불태웠다. 이 전투에서 선군은 왜구 세력 약화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러나 180여 명이 죽은 걸 전투에서 실패했다고 할 수도 있으나 중국인과 조선인들을 구출한 공도 있었다. 사실 이때 200척이 넘는 배에 1만 7천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간 것이다.

 

 

문제는 제비뽑기

 

문제는 버티고만 있어도 이기는 국면을 괜히 대마도 깊숙이 들어갔다가 백 수십여 명의 피해를 입었다. 이는 모두 박실의 책임이 되었으나 여기서 반전이 일어나게 된다.

 

의금부 제조 변계량 등이 수강궁에 가서 아뢰기를,

"어제 박실의 패군한 죄를 국문하오니, 실이 공술하기를, ‘이종무가 처음에는 삼군 삼절제사에게 명령하여, 다 뭍에 내려서 싸우라고 하더니, 뒤에 명령을 변경하여, 삼군 절제사 각 한 사람만이 뭍에 내리라고 하여서, 실이 제비를 뽑게 되어서 내렸던바, 적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여서, 두 번이나 보고하여 구원하기를 청하였으나, 종무가 들어 주지 아니하고, 유습과 박초 등도 역시 내려와 구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패전하게 되었다.’ 하오니, 특별히 박실의 죄뿐이 아니고, 이종무와 유습과 (박)초도 다 죄가 있아오니, 모두 국문함이 옳은가 합니다." 하니, 상왕 태종이 말하기를,

 

"박실이 패군한 죄는 모두가 아는 바이지만, 유정현이 도통사가 되어서 즉시로 실을 구속하고 벌을 줄 것을 청하지 아니하였으니, 그것은 역시 죄 되는 일이므로, 여러 장수를 상주었다가, 또 다시 정현과 종무를 하옥한다면, 나라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이 있지 않겠는가. 하물며 동정할 때에는 승리가 많았고 패전은 적지 않았는가. 뒷날의 일도 역시 생각하지 않을수 없는 것이니, 만약 크게 일할 계획을 한다면, 또한 권도(權道)를 써야 할 것이나, 내 어찌 그런 일로 하여, 끝까지 그 죄를 치죄하지 않을 수야 있겠는가. 이제 박실은 공신의 자식이라 하여, 면죄시키게 하라." 하였다. (《세종실록》 1/8/16)

 

며칠 뒤 다시 불거졌다. 우정언 이견기가 이종무 등도 치죄할 것을 수강궁에 청하려 하니 허락치 않았다.

 

사간원 우정언 이견기(李堅基)가 나아와서 아뢰기를,

"이종무가 여러 장수로 제비를 뽑아 뭍에 내리게까지 하였고, 유습이나 박초도 실과 같이 좌군의 장수가 되었으며, 나아갔다가 싸우려 들지 않았으니, 마땅히 법으로 치죄하여야 할 것이온데, 상왕이 종전에 하교하시기를, ‘군과 나라의 중대한 일은 내가 보고 들어서 결정하겠다.’ 하였사오니, 신들이 수강궁에 나아가 청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전대에는 왜적을 정벌하여도 한 모퉁이나 치다가 돌아오는 데 지나지 않았었는데, 이번 종무 등은 한인(漢人) 1백 40여 명을 잡고, 왜적을 죽인 것이 백여 명이나 되니, 공이 적지 않은 것이거늘, 사간원 사람들의 마음에는 공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하므로, 원숙이 가만히 견기에게 이르기를,

"그 사람의 공이 전혀 없다고 한다면, 나라의 체모는 어찌 될 것인가. 좀 생각할 일이다."라고 하니, 견기가 말하기를,

"종무 등이 모두가 다 신자 된 직분에 당연히 하여야 할 일인데, 무엇이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부상자를 내게 하였으니, 죄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세종실록》 1/8/22)

 

문제는 대마도에 상륙한 병력을 제비뽑기로 뽑았다는 것인데 공격에 나가게 된 것이 박실부대로 이 때문에 운이 나빠서 상륙대가 된 병사들의 사기가 좋을 리가 없어서 180명이나 되는 군사들을 잃었다. 그동안 나머지 병력은 박실이 2번이나 구원 요청을 했음에도 모두 무시하고 그대로 배 안에서 대기하다가 패전이 확인된 뒤에 그대로 귀국했던 것이다.

 

이 한심한 제비뽑기 사건 등이 알려지면서 이종무의 책임이 거론되었지만, 패전 책임으로 처벌할 수는 없었다. 대마도 정벌은 세종대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병권을 쥐고 있었던 태종의 명령으로 일어난 일이었으며 태종은 대마도 정벌의 성공을 대대적으로 홍보한 뒤였다.

 

이 때문에 다른 핑계를 찾아냈다. 김훈이라는 인물이 죄를 지었다 풀려났는데 이 사람을 허락도 받지 않고 대마도 정벌에 종군시킨 것이 잘못이라는 궁색한 논리였다. 결국 이종무는 작전 잘못이 아니라 인사 책임으로 귀양을 간다. 이후 이종무를 죽이라는 상소가 빗발쳤으나 넘어갔고 뒤에 관직에 복귀하게 된다. 큰일을 치르노라면 크고 작은 일이 많고 통치자는 이 조절을 잘 관리해야 한다.

 

대마도의 한국식 산성

 

대마도는 일본 이키섬(壹岐島)에서는 73킬로 부산에서는 49킬로다. 섬이 바위가 너무 많아 역사적으로는 버리다시피 한 곳이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는 대마도 미쓰시마마치(美津島町) 성산(城山) 꼭대기의 금전성(金田城)은 한국역사 유적지이다. 안내 책자에 “백촌강(白村江) 해전(663)에서 패배한 덴지(天智)천황이 나라를 지키는 최전선에 쌓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성터”라고 적혀 있는데 한국식 산성이다. 이밖에도 이즈하라(嚴原)의 유명산 꼭대기에도 한국식 산성의 흔적이 있다. 백제계 유민들이 이주해 쌓은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역사적으로 인연이 있고 지금도 경제적으로 연관이 깊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고기로에 바라산 방면 고기동 산79번지에 ‘이종무로’가 있고 이종무 장군 묘소(경기도 기념물 제25호)가 남아있다.

 

 

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kokim9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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