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동하 작가]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 교회에 다니는 것을 반대하지 않으셨다.
별 종교가 있으시던 분은 아니었지만, 그 시대는 누구나 그러하듯이
아무런 종교가 없으면 다들 <유교>라고 대답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10대조 할아버지 때부터 종가인 우리 집안은, 뭐 대단한 인물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요즘 말하는 근자감은 무진장 가지고 계신 어른들이 다수 계셨다.
그런 집안에서 외아들로 태어난 내가 기독교를 종교로 가지는 것에 대해서는
아버지의 묵인이 없었다면 사실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버지가 기독교에 대해서 친화적인 생각을 가지신 이유는 아버지가
열 살 때부터 시작한 장사에 그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내 아버지가 열 살이 되시던 해,
산에 가서 잔가지나 주워 와서는 집안 살림에 큰 도움이 안 된다고 여기셨던지,
내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떡이나 엿을 담아서 목에 걸고 판매를 할 수 있는
엿판을 만들어 주셨단다.
그 엿판을 목에 걸고 열 살 먹은 아이가
<신령역>에서 <경주역>까지 가는 기차에서 엿과 떡 등을 팔기 시작하셨단다.
때로는 상품성이 좀 떨어지는 사과를 아주 싸게 떼다가 팔기도 하셨는데,
그 장사는 무게만 많이 나가고, 자꾸 시빗거리가 생겨서
차라리 엿이나 떡 종류가 더 나았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당시 일제강점기였지만, 아버지 기억으로는 신사들이 기차를 타고 많이 다니셨는데,
항상 당신에게 엿이나 떡을 사 주시면서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셨다고 한다.
학교도 못 다니고 생업에 종사하는 어린아이에게
좋은 말이나 용기를 주시던 신사들이
거의 하나같이 교회를 다니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때 아버지는 교회는 선진화된 교육을 하는 곳이라는 믿음을 가지셨단다.
나중에 아버지께서 나이가 들어 사귀신 친구들 가운데
교회 목사나 장로들도 더러 계셨던 것을 보면,
기독교에 대한 아버지의 사상은 상당이 열려계셨던 것 같다.
한 번은 그런 아버지에게 내가 물었던 적이 있다.
“아버지는 왜 교회를 안 다니시냐고….”
그러면 늘 아버지는 ,
“교회 가면 자꾸 머 하라, 머 하라 시키는 게 너무 많아서 싫다.”라고 하셨다.
그러던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몇 주 전 세례를 극적으로 받으시고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열 살 때부터 기차 위에서 장사하실 때 만났던 많은 신사들은,
하나같이 아버지에게 공부하라고 하셨단다.
학교에 안 나가더라도 공부를 꼭 하라고,
그래서 아버지는 거의 독학으로 공부를 하셨다.
한문과 일본어는 그 시대를 사셨으니 다른 사람들보다는 좀 더 잘하시는 편이었고,
영어공부를 하라는 여러 신사들의 충고에 이런저런 단어도 꽤 외우셨단다.
그래서 한국전쟁이 터지고,
아버지는 한문과 한글 그리고 영어로 간단한 문서를 읽을 줄 아는
몇 안 되는 재원이시라, 단박에 보급계 이등중사로 진급을 하셨단다.
한국전쟁은 어쩌면 아버지에게 여러 가지 기회의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나중에 하시던 말씀이셨지만,
집에 동생들만 없었어도, 아버지는 군에서 좀 더 계시고 싶으셨다고 하셨다.
체질에 잘 맞으셨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