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때 황희와 황금시대를 연 맹사성(孟思誠) ①

2022.02.10 11:39:01

[‘세종의 길’ 함께 걷기 86]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 시대 황희와 더불어 황금시대를 연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맹사성(孟思誠)이다. 맹사성은 고려 공민왕 때인 1360년(공민왕 9)부터 세종 20년(1438)까지의 문신으로 태종과 세종 시대 사이 6조를 두루 걸치며 참판과 판서를 지냈고 세종 9년(1427)에 우의정에 올랐다. 이때 좌의정이던 황희와 한 팀을 이루었고 이후 세종 13년(1431) 황희가 영의정이 되자 좌의정에 올라 조정을 관장했다. 76살이 되던 세종 17년(1435)에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났지만 세종은 주요 정사에 대하여서 자문했다.

 

온양 출신으로 아버지는 고려의 맹희도(孟希道)이며 고려 말기 최영(崔瑩) 장군의 손녀 사위이기도 하다. 우왕 12년(1386)에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춘추관검열이 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태조 때 예조의랑(禮曹議郎)이 된 이래, 정종 때 간의우산기상시가 되었다. 태종 초에 동부대언(同副代言)ㆍ이조참의를 두루 역임하였다. 1407년(태종 7) 진표사(進表使)로 명나라에 가는 세자를 시종관으로서 수행하여 다녀왔다. 그는 여러 가지 업무를 수행했으나 특히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그의 연대기를 음악 중심으로 살펴보자.

 

음악에 깊이 연관

 

1411년(태종 11) : "관습도감 제조(慣習都監提調) 맹사성은 음률에 정(精)하여 거의 선왕(先王)의 음악을 회복할 수 있는데, 근일에 판충주(判忠州)를 제수하였습니다. 신 등은 생각건대 한 고을의 정무는 사람마다 능한 이가 많지마는 선왕의 음악은 사람마다 능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청컨대, 맹사성을 머물게 하여서 정악(正樂)을 가르치소서." (《태종실록》 11/ 윤12/ 7)

 

1411년(태종 11년) : 판충주목사로 임명되었다. 그러자 예조에서 관습도감제조인 맹사성이 음률(音律)에 정통하므로 선왕(先王)의 음악을 복구하기 위하여 서울에 머물게 하여 바른 음악을 가르치도록 건의하였다. 그 이듬해에도 풍해도도관찰사(조선 시대의 초반인 태조 4년-1395년에 서해도의 이름이 풍해도-豊海道가 되었다가, 태종 18년-1417년에 황해도-黃海道가 됨)에 임명되자, 영의정 하륜(河崙)이 음악에 밝은 맹사성을 서울에 머물게 하여 악공(樂工)을 가르치도록 아뢰었다.

 

1412년(태종 12년) : "우리나라의 악보(樂譜)가 다 훼손되었는데 오직 맹사성만이 악보에 밝아서 오음(五音)을 잘 어울리게 합니다. 지금 감사의 임명을 받아 장차 풍해도로 가게 되었는데, 바라건대, 머물러서 악공(樂工)을 가르치게 하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교대되기를 기다려서 바야흐로 악곡을 가르치도록 허락하겠다." (《태종실록》 12/5/3)

 

1416년(태종 16년) : 이조참판에 이어 예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생원시에 시관(試官)이 되어 권채(權採) 등 100인을 뽑았으며, 임금이 친림한 문과 복시에 독권관(讀卷官, 과거 응시자가 제출한 답안을 임금 앞에서 읽고 그 내용에 대하여 설명하는 업무를 담당)이 되었다. 그 해 늙은 아버지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을 원했으나 윤허 되지 않고, 역마(驛馬)와 약을 하사받았다.

 

이어 호조판서가 되어서도 고향의 아버지를 위해 다시 사직을 원했다. 그러나 임금은 충청도관찰사로 삼아 아버지를 봉양하게 하였다. 1418년 공조판서가 되어 또다시 아버지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하려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419년(세종 1년) ~ : 이조판서와 예문관대제학이 되었다. 세종 3년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지내고 세종 9년에 우의정이 되었다. 우의정 재임 때 《태종실록》 편찬 감관사(監館事)로서 감수하였다.

 

《태종실록》의 편찬이 끝나자 세종이 한번 보고자 하였다. 그러자 맹사성이 “임금이 실록을 보고 고치면 반드시 후세에 이를 본받게 되어 사관(史官)이 두려워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 하고 반대하니 세종이 이에 따랐다.

 

1421년(세종 3년) : (이조 판서 맹사성이 아버지의 병환으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조 판서 맹사성이 아버지의 병으로 사직하려 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고 역마를 내어 약을 내려보냈으니, 이때 사성의 아버지 맹희도(孟希道)는 충청도 온수현(溫水縣)에 살았다. (《세종실록》 3/2/5)

 

1425년(세종 7년) : (당상악과 당하악을 일시에 함께 연주하는 일ㆍ향악 연주 문제 등을 상의하게 하다.) 임금이 이조 판서 허조에게 이르기를, "《시경(詩經)》에 ‘생황을 부는 사이사이에 시경의 편명을 노래한다.’ 하였고 《서경(書經)》에 ‘생황과 용(鏞, 큰 종)을 서로 교대하여 연주한다.’라고 하였으니 당상악(堂上樂)과 당하악(堂下樂)을 번갈아 연주하는 것이 명백한데, 지금은 일시에 함께 연주하니, 나는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또 우리나라는 본디 향악(鄕樂)에 익숙한데, 종묘의 제사에 당악(唐樂)을 먼저 연주하고 삼헌(三獻)할 때 이르러서야 겨우 향악을 연주하니, 조상 어른들의 평시에 들으시던 음악을 쓰는 것이 어떨지, 그것을 맹사성과 더불어 상의하라." (《세종실록》 7/10/15)

 

1429년(세종 11년) : 우의정 맹사성ㆍ여천 부원군 민여익(閔汝翼)ㆍ찬성 권진(權軫)에게 궤장을 내렸다. (《세종실록》 11/ 6/ 24)

 

1430년(세종 12년) (정척이 평양 기자묘 신위의 이름에 대해 아뢰다.) 산천단 순심 별감(山川壇巡審別監) 정척(鄭陟)이 아뢰기를, "평양 기자묘(箕子廟) 신위(神位)에 쓰기를, ‘조선후(朝鮮侯) 기자(箕子)’라고 하였사오니, 청하건대 ‘기자’ 두 글자를 삭제하옵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기(箕)는 나라 이름이고 자(子)는 작(爵)인데, 이를 칭호로 부르는 것은 불가하다. 그러나 그저 조선후라고 일컫는 것도 미안한 듯하니 ‘후조선 시조 기자’라고 하는 것이 어떠할까. 상정소(詳定所)가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 하니, 좌의정 황희ㆍ우의정 맹사성ㆍ찬성 허조 등은 ‘후조선 시조 기자’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고, 총제(摠制) 정초(鄭招)는 ‘조선 시조 기자’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는데, 희(喜) 등의 의논에 따랐다. (《세종실록》 12/4/8)

 

이전까지 기자조선이라 불린 데 대한 조선이 자주 의식을 갖게 되는 인식의 변화다.

 

황소 타는 맹사성

 

 

맹사성에 대한 야사가 몇 있다. 그 가운데 황소를 타고 수수한 차림으로 다녔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고향인 온양에 내려갈 일이 있었던 맹사성에게 한 현감이 잘 보이기 위해 그가 지나갈 길을 닦고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맹사성은 나타나지 않고 웬 소를 탄 노인이 길을 떡하니 지나갔다. 어이가 없어진 현감이 하인들을 시켜 그 노인을 잡아오려 했지만, 노인은 하인들에게 "온양 사는 맹꼬불이(그의 호, 고불을 살짝 비틀어서 등이 꼬부라졌다는 뜻의 언어유희를 구사) 제가 제 소 타고 제 갈 길 가는데 어찌 바쁜 사람을 붙잡는가?"라고 허허 웃으며 받아치고는 제 갈 길을 갔다. 한참 지난 다음에서야 부랴부랴 맹사성을 따라가던 하인들에게서 보고를 받고서야 그 노인이 맹사성이었다는 것을 안 현감이 사죄하기 위해 달려가다가 인수(관인)를 연못에 빠뜨려 버려서 그 연못을 '인침연(印沈淵: 도장 빠진 연못)'이라고 했다는 일화도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침인연이라고 불리는 판본도 있으며 참고로 조선시대에 이렇게 공인(公印)을 잃어버리는 건 익직이라 하여 파면을 면치 못하는 중죄에 속했다.)

 

 

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kokim9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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