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 차례 왜국에 다녀오며 활약한 전문외교관 ‘이예’

2022.03.24 12:05:16

[‘세종의 길’ 함께 걷기 89]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 시대의 인물을 탐구하고 있는데 조선 대일외교의 기틀을 세운 이예(1373, 공민왕 22∼1445, 세종 27)가 그 한 사람이다.

 

원래 울산군 관아의 중인(中人) 아전 출신인데, 태조 5년(1396) 왜적에게 잡혀간 지울산군사 이은(李殷) 등을 구하기 위해 자진하여 대마도까지 잡혀간 뒤 외교력을 발휘하여 군수와 함께 돌아왔고, 그 공으로 아전의 역에서 면제되고 벼슬을 받았다. 25살의 젊은 나이에 군수를 구하겠다는 신념으로 목숨을 걸고 왜구의 배에 올라탄 일이 외교관으로서 첫발을 내딛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의 생애와 활동을 보자.

 

 

 

생애와 활동

 

∙ 정종 2년(1400) : 어린 나이로 왜적에게 잡혀간 어머니를 찾기 위해 자청해 회례사(回禮使) 윤명(尹銘)을 따라 일본의 삼도(三島)에 갔으나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 태종 1년(1401) : 처음으로 이키도[壹岐島]에 사신으로 가 포로 50명을 데려온 공으로 좌군부사직에 제수되었다.

 

∙태종 6년 윤7월(1406) : 일본 회례관(日本回禮官)으로 사로잡혀 갔던 남녀 70여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 태종 10년(1410) : 해마다 통신사가 되어 삼도에 왕래하면서 포로 500여 명을 찾아오고, 벼슬도 여러 번 승진해 호군이 되었다.

 

∙ 태종 16년(1416) 유구국(琉球國)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포로 44명을 찾아왔다.

 

∙ 세종 1년(1419) : 중군병마부수사(中軍兵馬副帥使)가 되어 삼군도체찰사 이종무(李從茂)를 도와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기도 하였다.

 

∙ 세종 4년 이후(1422ㆍ1424ㆍ1428)에는 각각 회례부사(回禮副使)ㆍ통신부사 등으로 활약했다.

 

∙ 세종 14년(1432)에는 회례정사(回禮正使)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그런데 당시 부사였던 김구경(金久冏)이 세종에게 사무역(私貿易)을 했다고 조정에 아뢰어 한때 논란이 되었으나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 세종 15년(1433)에 또 일본에 다녀와서 그 공로로 상호군(上護軍, 정3품의 무직)에 오르고, 드디어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조선 시대 중추원의 정이품 벼슬)에 임명되었다.

 

∙ 세종 20년(1438)에는 다시 대마도경차관(임시벼슬)이 되어 대마도에 다녀왔다.

 

∙ 세종 23년(1441) : 일찍 20살에 진사, 같은 해 문과에 급제하여 군기시(병기를 만드는 관아) 직장을 거쳤다.

 

∙ 세종 25년(1443)에는 왜적에게 잡혀간 포로를 찾아오기 위해 자청해, 대마주체찰사(對馬州體察使)가 되어 포로 7인과 도절직한 왜인 14인을 찾아서 왔다. 그 공으로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중추원의 정이품 벼슬)로 승진하였다.

 

이예는 여러 차례 교토, 큐슈, 오키나와, 대마도 등에 파견되었는데, 노년에도 대마도에 붙잡혀간 조선인 귀환 협상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나이 들어 건강을 걱정하는 세종에게 “다만 성상께서 신을 늙었다 하여 보내시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신이 성상의 은혜를 지나치게 입었으므로 죽고 삶은 염려하지 않습니다.”라며 대마도행을 자청할 만큼 깊은 충성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예가 대마도의 사신으로 갈 것을 자청하다)예조 참판 허후(許詡)가 아뢰기를,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이예(李藝)가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이제 대마도(對馬島)에 사신을 보내어 잡혀갔던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오게 하려고 하시는데, 신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이 섬에 출입하여 이 섬의 사람과 사정을 두루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신이 가면 저 섬의 사람들이 기꺼이 만나볼 것이며, 누가 감히 사실을 숨기겠습니까. 다만 성상께서 신을 늙었다 하여 보내시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신이 성상의 은혜를 지나치게 입었으므로 죽고 삶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이제 종사(從事)할 사람을 가려서 소신(小臣)을 보내도록 명하시면 피로된 사람들을 죄다 찾아서 돌아오겠습니다.’라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예는 전일의 공로도 작지 않은데, 이제 이 말을 들으니 매우 가상(嘉尙)하게 여긴다. 종사관(從事官)은 경 등이 정부와 더불어 선택하여 아뢰라" 하고, 드디어 예에게 의복 일곱 벌과 사모(紗帽)를 하사하였다. (《세종실록》 26/6/22)

 

이때 이예의 나이가 71살이었다. 대단한 충성, 봉사정신의 소유자다.

 

훌륭한 외교관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전문지식과 유창한 외국어 능력 그리고 외교협상력을 겸비해야 할 것이다. 이예가 1401년에 50명, 이후 1410년까지 해마다 일본을 왕래하며 500여 명, 1416년 40여 명 등 15차례에 걸쳐 667명의 조선인을 귀환시킨 사례는 대일외교에 대한 경험과 전문지식에 기반한 그의 지략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조일 통교의 근간이 된 ‘계해약조’ 체결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태조~세종 시대 60년 동안 184회의 왜구의 침입이 있었다. 이중 조선 초기 18년 동안에는 모두 127회(연평균 7회)의 침입이 있었으나, 그 이후로는 연평균 1회 정도에 그치고 있다. 그마저도 개해조약을 맺은 이듬해인 세종 26년(1444) 이후로는 왜구의 침입이 한 차례도 없었다. 이 시기는 고려말(공민왕 22년)에 출생하여 세종 27년(1445)에 별세한 이예의 활동시기와 겹쳐 있다.

 

왜구의 침입을 잠재울 수 있었던 것은, 대일 강경책과 함께 이루어진 긴밀한 일본에 대한 외교의 결과였으며, 그 핵심에는 이예가 있었다. 때로는 원칙과 강경책을 앞세우고 때로는 회유책을 동원하여 대일외교 일선에서 맹활약하였다. 이러한 이예의 노력은 1443년(세종 25년)에 조일 통교(通交)체계의 바탕을 이루는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함으로써 열매를 맺게 된다.

 

계해약조는 대마도의 세견선(왜인의 교역을 허락하여 해마다 일정 수의 배를 우리나라에 보내게 한 일종의 무역선)을 해마다 50선으로 한정하고, 조선으로의 도항(渡航)선은 문인(文引, 도항 허가증)을 의무적으로 받도록 명시함으로써 조선초 대일관계 안정화에 이바지했다. 또한 이예는 왜인의 체류 문제, 입국 허용 조건 등을 지속해서 협상해 나감으로써 대마도 중심의 대일 통교체제 수립을 주도했다. 이로써 울산을 비롯한 남해안 일대와 유구, 대마도 등지에서의 평화와 안정을 지킬 수 있었다.

 

이예는 외교관으로 활약한 오랫동안 지략과 협상을 통해 667명의 조선인을 일본으로부터 귀환시켰다. 8살에 왜구에 의해 어머니를 납치당한 이후 평생동안 어머니를 찾아다닌 그는 고려 말부터 횡행했던 왜구로 인한 백성의 고통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에게는 가족과 멀리 떨어져 낯선 섬나라에서 고생하는 백성의 일이 남의 일 같지 않았을 것이다.

 

이예는 43년 동안 외교관으로 왜국에 사명(使命)으로 가기가 무릇 40차례가 넘게 일본을 왕래하였으며 향년이 73살에 죽었다.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

 

2010년 6월 외교통상부는 2010년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로 조선 세종 시대 이예(李藝)를 꼽았다. 이예의 가장 두드러진 공적 가운데 하나는 조선 건국 초기, 왜구의 침입으로 불안정하였던 일본과의 관계를 안정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근대 이전 우리 외교사에 있어 대일외교를 주도한 전문 외교관이었다.

 

이예는 나라에 대한 충(忠)과 어머니에 대한 효(孝), 그리고 백성에 대한 사랑(愛)의 마음을 갖고 있었던, 굳은 의지와 용기를 가진 진정한 외교관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kokim9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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