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지막 왕녀, 덕혜의 비극

2022.05.09 11:18:00

《동시와 함께하는 조선의 마지막 공주, 덕혜》, 글 최모림, 박물관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비오는 날 저녁에 기왓장 내외

잃어버린 외아들 생각나선지

꼬부라진 잔등을 어루만지며

쭈룩쭈룩 구슬피 울음 웁니다.

 

대궐 지붕 위에서 기왓장 내외

아름답던 옛날이 그리워선지

주름 잡힌 얼굴을 어루만지며

물끄러미 하늘만 쳐다봅니다.

 

(p.8)  <기왓장 내외> 윤동주

 

윤동주 시인의 시에 나오는 기왓장 내외. 이 내외는 나라 잃은 임금이 사는 대궐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름답던 옛날을 그리워하며, 주름 잡힌 얼굴을 어루만지며 물끄러미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 일상이었을까?

 

이런 기왓장 같은 사람이 있었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그야말로 허울뿐인 임금이 되어 덕수궁에 갇히다시피 한 사람, 바로 고종이었다. 45년 동안 조선의 임금으로 재위하면서, 끝내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책임을 통감할 수밖에 없던 고종은 덕수궁에서 통한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유일한 기쁨을 주는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자신이 환갑 때 얻은 딸 덕혜옹주였다. 1912년 5월, 조선이 일본에 나라를 완전히 빼앗긴 지 2년 뒤에 태어난 덕혜는 고종 임금과 붕어빵처럼 닮아 있었다.

 

이 책 《동시와 함께하는 조선의 마지막 공주, 덕혜》는 조선의 마지막 왕녀, 덕혜옹주의 이야기를 서정적이면서도 차분하게 풀어놓는다. 책 중간중간에 곁들여진 시 역시 나라 잃은 왕녀로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던 덕혜의 마음을 보여주는 듯, 아련하고 처연하다.

 

 

고종과 복녕당 양씨 사이에서 늦둥이 딸로 태어난 덕혜옹주는, 태어나면서부터 갖은 관심과 사랑을 받은 금지옥엽이었다. 나라를 잃고 수심에 잠겨 있던 고종은 마음의 안식처를 늦둥이 딸에게서 찾았고, 함녕전에 들러 옹주가 잠든 모습을 늦게까지 보다가 돌아가는 일이 잦았다.

 

덕혜를 위해 고종은 덕수궁 안에 유치원까지 만들었다. 덕혜가 유치원에서 뛰어노는 모습을 보는 것이 고종의 거의 유일한 기쁨이었다. 다만, 조선 왕실에서 더는 아들, 딸들이 태어나지 않길 바랐던 일본은 좀처럼 덕혜를 왕녀로 인정하지 않았고, 덕혜는 꽤 오랫동안 이름 없이 ‘아기씨’로 불려야 했다.

 

그러나 어느 날, 데라우치 총독이 덕수궁을 찾은 틈을 타 고종이 유치원에서 뛰어노는 덕혜를 보여주며 왕녀로 입적해줄 것을 거듭 간청했고, 마침내 덕혜는 고종 임금의 막내딸로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덕수궁의 꽃’이란 뜻으로 ‘덕혜’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비록 망국의 왕녀였지만, 고종과 복녕당 양씨의 사랑 아래 부족함 없이 자라던 덕혜의 앞날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바로 덕혜의 나이 불과 일곱 살 때 고종이 승하한 것이다. 당시 독살설이 널리 퍼졌을 만큼, 고종은 잠들기 전 궁녀가 가져온 홍차를 마시고 갑자기 죽고 말았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갑작스레 잃은 덕혜는 크게 슬퍼했지만, 창덕궁으로 옮겨 어머니 복녕당 양씨와 오라버니 순종 임금과 살면서 점차 안정을 되찾아갔다. 그러나 점차 조선 왕실의 마스코트와 같은 존재로 조선 백성의 사랑을 받는 덕혜를 부담스럽게 여긴 일본은 덕혜가 열세 살이 되자, 강제로 가족과 떼어놓으며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 버렸다.

 

어린 나이에 홀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아이들의 냉대와 놀림 속에서 살아가던 덕혜는 너무 외로움이 사무쳤던 탓인지 ‘조발성 치매(정신분열증)’라는 병을 얻고 말았다. 일본에 오라버니 영친왕이 있었지만, 일본이 만남을 방해한 탓에 별로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

 

책은 일본에 의해 강제로 혼인한 남편 소오 다케유키와의 갈등,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사라져버린 하나뿐인 딸 마사에의 실종 등 그 뒤에 이어진 덕혜의 불행에 대해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다만 광복 뒤에도 한참 시간이 지난 뒤인 1962년, 38년 만에 귀국해 78살을 일기로 삶을 마감한 덕혜의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p.127-128)

1989년 4월 21일에 한일강제병합이라는 치욕스런 역사가 낳은 슬프고 가련한 황녀는 78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덕혜옹주가 1983년에 쓴 낙서 한 장이 대한제국 마지막 공주의 슬픈 운명을 더욱 가슴 아프게 기억하게 합니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영친왕) 비전하(이방자 여사) 오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덕혜옹주는 지금 그녀에게 ‘덕수궁의 꽃’이란 이름을 지어준, 경기 남양주시 아버지 고종의 묘소 바로 뒤편에 잠들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녀가 그래도 조선의 왕녀로 태어나, 일본의 지원을 받으며 호의호식하며 살지 않았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생활도, 덕혜옹주가 어린 나이에 겪어야 했던 정신적 고통과 허기를 채워주진 못했다.

 

덕혜옹주 역시 아버지의 석연찮은 죽음, 생모와의 강제이별 등 나라 잃은 아픔을 슬픈 가족사로 견뎌내야 했던 불행한 사람이었다. 어린 나이에 마주한 거대한 외로움은 결국 조발성 치매를 불러왔고, 그녀의 삶은 어린 시절에만 잠깐 행복했을 뿐 고통의 연속이었다.

 

오늘날 덕혜옹주가 영화로, 소설로 다양하게 각색되는 이유는 그녀의 삶이 그만큼 극적이면서도 기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어린이들에게도 ‘덕혜옹주’라는 인물이 겪었던 비극에 대해 알려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다소 지나치게 서정적으로 묘사된 느낌도 있지만, 덕혜옹주의 인생이 궁금한 이라면 한 번쯤 펴들 만하다.

 

 

우지원 기자 basicfo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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