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약해’, 임금에게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2022.12.08 11:22:48

고집이 센 문신 고약해- ①
[‘세종의 길’ 함께 걷기 106]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고약해(高若海, 1377년, 우왕3 ~1443년, 세종 25)는 세종 때 형조참판, 개성부유수 등을 지닌 문관이다.

 

세종대왕 아래에는 유독 고집 센 신하가 있었다. 바로 고약해로 한자는 ‘같을 약(若)‘, ‘바다 해(海)’ 자로 ‘바다 같은 인물’이 되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그는 형조참판으로서 태조, 정종, 태종, 세종까지 모두 4명의 임금을 섬겼다. 도 관찰사, 사헌부, 인수부 등 중직 등을 두루 거친 명재상이다. 그는 세종에게 사사건건 직언하는 신하였다. 오죽하면 그의 이름을 빗대 “이런 고약해 같으니”라는 말이 나온 것으로 전해진다. ‘고약해 같다’라는 말은 비위나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을 표현할 때 쓰는 ‘고약하다’라는 말로 발전했다고 한다.

 

흔히들 세상에서 ‘고약하다’라는 말을 쓰는데 국어사전의 뜻은

 

가) 괴악(怪惡)하다의 의미고 나) 정태륜의 ‘한국인의 상말 전서’(고요아침 2016)에 나오는 《세종실록》에 고약해라는 인물에서 비롯했다는 설인데 국립국어원에서도 이 질문에 확인하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설이라 하겠다.

 

세종은 고약해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다른 신하들이 직언하지 못할까 봐 고약해에게 벌은 내리되 이어 거두어들이며 별다른 조처를 내리지는 않았다. 세종의 소통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1440년 3월, 세종이 고약해를 갑자기 관직에서 파면시켜 세간의 놀라움을 산 일도 있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 태조 2년(1393) :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고, 태종 초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가례(家禮)』를 준수한 일과 어머니에의 효행으로 사간원의 천거를 받아 공안부주부(恭安府注簿)에 제수되었다.

 

· 태종 18년(1418) : 형조정랑으로 있을 때 무녀(巫女) 치죄에 대한 잘못으로 외방에 부처(付處)되었으나 세종 초에 복직되었다. 그 뒤 장령ㆍ경창부 소윤을 거쳐 예조참의ㆍ이조참의ㆍ충청도관찰사ㆍ한성부윤ㆍ형조참판ㆍ대사헌을 지냈다.

 

· 세종 16년(1434) : 민신(閔伸)과의 상핵사건(相劾事件)으로 파직되었으나 곧 복직되어 황주목사ㆍ인수부윤(仁壽府尹)ㆍ형조참판을 지냈다. 1442년 개성부유수로 나갔다가 임지에서 죽었다. 시호는 정혜(貞惠)다.

 

고약해의 몇 사건

 

이 고약해라는 인물이 왜 ‘고약하다’라는 말의 어원으로 지목되고 있을까. 단순히 이야기로만이 아니라 그 근거가 되는 소문이나 행동이 있었을 것이다. 고약해는 간언을 서슴지 않았고 때로 그 태도에 있어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잊은 듯한 어투와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상당히 강직했고 신념과 원칙에 충실한 사람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몇 가지 사건을 보자.

 

첫째, 명나라 사신의 뒷거래를 막다가 곤장형에 처해졌다.

 

태종 재위 시절의 일이다. 당시 명나라 사신이 왔는데 고약해가 이를 응접하기로 되었다. 그들은 온갖 요구를 해왔고 조선은 들어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예조 좌랑 김효정이 황엄의 후운의 일을 아뢰다) 예조 좌랑 김효정(金孝貞)이 아뢰기를, "신이 각색 종이를 가지고 사신관(使臣館)에 이르러 먼저 황엄(黃儼)에게 고하니, 황엄이 말하기를, ‘종이 수가 너무 많으니, 그대가 전후를 통해 계산하여 총수(總數)를 1만 장으로 하고, 그 나머지는 그대가 도로 싸가고 해수(海壽)에게는 알리지 말라.’ 하였습니다. ...두터운 종이 각 40장을 두 사신에게 주니, 사신들이 심히 기뻐하였다. 황엄 등이 사사로 저자[市]를 두어 장사에서 얻는 이익을 얻으려 하고, 또 오늘에 아무 물건을 요구하고, 명일에 또 아무 물건을 요구하며, 관사람까지도 또한 그러하여 초피(貂皮)ㆍ마포(麻布)ㆍ석자(席子)ㆍ지지(紙地)ㆍ인삼, 심지어는 초(酢)ㆍ젓[醢]까지도 요구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유사(有司)가 견딜 수 없었으나 임금이 관곡(款曲)하게 이를 따랐다. 운반하는 인부가 1천여 명에 이르렀다. 영접 도감 판관(迎接都監判官) 고약해(高若海)가 사람들이 사사로이 통하여 매매하는 것을 금지하니, 사신이 크게 노하여 고약해에게 매를 때렸다. (《태종실록》17/8/3)

 

명 황엄의 부하들이 선물로 받은 물품을 시장에 내다 팔아 사적 이익을 취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에 고약해는 사신들의 사적 무역을 금지했다. 그러자 이 일로 명나라 사신들의 심기를 건드린 고약해는 곤장형에 처하게 되었다. 고약해의 성품을 알 수 있는 일화라 할것이다.

 

둘째, 세종이 좋아했던 격구(擊毬)의 폐지를 주장하다.

 

무관의 핏줄이 흐르는 집안이어서인지 세종은 격구를 좋아했다. 그런데 세종 7년에 고약해는 이 격구의 폐지를 주청한다. 세종이 물리었음에도 다섯 번이나 주청한 고약해는 격구는 군사 훈련에도 도움 되지 않는 놀이이기에 임금은 그런 놀이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격구를 보는 시각이 달랐다. 격구는 신체 단련과 함께 군사들에게는 말타기 훈련도 되었기 때문이다. 오락을 겸하는 것은 물론이다.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아 책만 읽는 선비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운동이 될 것이었다.

 

(격구를 폐하자는 사간원의 청을 윤허하지 않다.) 사간원에서 계하기를, "신 등이 가만히 병조의 공문서를 보니, 무과(武科)의 시험과 봄가을의 도시(都試, 무과의 특별시험)에 모두 격구(擊毬)의 재주를 시험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졸들로 하여금 무예(武藝)를 연습하게 하려는 깊은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격구(擊毬) 유희는 고려가 왕성하던 때에 시작된 것으로서, 그 말기(末期)에 이르러서는 한갓 놀며 구경하는 실없는 유희의 도구가 되어, 호협(豪俠)한 풍습이 날로 성(盛)하여졌으나, 국가에 도움 됨이 있었다는 것은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무예를 훈련하는 데에 있어 이미 기사(騎射, 말 타는 일과 활 쏘는 일)와 창(槍) 쓰는 법이 있으니, 어찌 격구(擊毬)의 유희를 하여야만 도움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법은 다만 지금에 유익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뒷세상에 폐단을 끼칠까 두렵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격구의 법을 정지(停止)하여 장래의 폐단을 막으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격구하는 일을 반드시 이렇게까지 극언(極言)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니, 지사간(知司諫) 고약해(高若海)가 대답하기를,

"신 등이 〈격구를〉 폐지하자고 청한 것은 다름 아니라, 뒷세상에 폐단이 생길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어 옛 시[古詩] 한 귀절을 외우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것을 설치한 것은 유희를 위하여 한 것이 아니고, 군사들이 무예를 익히게 하고자 한 것이다. 또 격구하는 곳이 성 밖에 있으니, 무슨 폐단이 있겠는가." 하였다.

 

의정부ㆍ육조ㆍ사헌부ㆍ사간원의 관원들이 나간 뒤에, 임금이 대언(代言)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일찍이 이 일을 시험하여 보았는데, 참으로 말타기를 익히는 데에 도움이 되므로, 태종(太宗) 때에 하고자 하였으나, 마침 사고가 있어서 실행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세종실록》7/11/20)

 

셋째 왕실의 수륙재를 비판했다.

 

정사를 보고, 기신제(忌晨祭. 사람이 죽은 날에 제사)와 수륙재(水陸齋, 물과 땅에서 떠도는 혼령 위로)에 밀초[蠟燭]를 쓰는지를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초의 밀은 벌을 죽이고 취하는 것이라 수륙재에는 쓸 수가 없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기름불[油燈]을 쓰는 것이 옳겠다."라고 말하니, 참의 고약해(高若海)는 말하기를,

 

"수륙도량(水陸道場)은 성인의 법이 아니어서 백성들에게 보고 느끼도록 하는 것은 진실로 불가하오니 없애는 것이 옳습니다. 어찌 구구하게 등촉(燈燭)이나 다과(茶果) 등을 논의하오리까."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전일에 글을 올려서 역설하였고, 이제 또 이렇게 면대하여 간하니 뜻은 매우 옳다. 그러나 조종께서 다 없애지 아니하신 일이니 아직 약례(略禮)대로 행할 따름이다." 하니, 약해가 대답하기를, "만약 옳은 도리가 아니면 속히 고치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세종실록》9/12/21)

 

이 행사에 대해서도 고약해는 임금에 반대하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계속)

 

 

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kokim9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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