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창제에 공이 큰 신숙주 그리고 신인손

  • 등록 2023.03.23 10:56:47
크게보기

세종시대를 만든 인물들 - ⑥
[‘세종의 길’ 함께 걷기 113]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을 도와 세종르네상스를 만든 인물들을 살피고 있다. 몇몇 신료들을 요약ㆍ정리해 본다.

 

 

신숙주(申叔舟 태종 17, 1417~ 성종 6년,1475)

 

조선 전기 문신이다. 저서(작품)에 《보한재집》, 경력으로는 집현전응교, 우부승지, 도승지, 병조판서, 대사성, 좌의정 등을 지냈다. 아버지는 공조참판 신장(申檣)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세종 20년 (1438) : 사마양시에 합격하여 동시에 생원ㆍ진사가 되었다. 이듬해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농시직장(典農寺直長)이 되고,

세종23년 (1441) : 집현전부수찬을 지냈다.

세종 24년(1442) : 나라에서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게 되자 서장관으로 뽑혔다.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참가하여 공적이 많았다. 중국음을 훈민정음인 한글로 표기하기 위하여 왕명으로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유배 중이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의 도움을 얻으러 요동을 열세 차례나 내왕하였는데, 언어학자인 황찬은 신숙주의 뛰어난 이해력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세종 29년(1447) : 중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집현전응교가 되고,

문종 1년(1451) : 명나라 사신 예겸(倪謙) 등이 당도하자 왕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시 짓기에 나서 동방거벽(東方巨擘)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 해 직제학을 지냈다.

 

문종 2년(1452) : 수양대군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갈 때 서장관으로 추천되어 수양대군과의 유대가 이때부터 특별하게 맺어졌다. 다음 해에 승정원동부승지에 오른 뒤 우부승지·좌부승지를 거쳤다.

같은 해 수양대군이 이른바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외직에 나가 있었으며, 수충협책정난공신 2등에 책훈되고, 곧 도승지에 올랐다.

 

세조 1년(1455) : 수양대군이 즉위한 뒤에는 예문관대제학에 초배(超拜)되고 이어 주문사(奏聞使)로 명나라에 가서 새 임금의 고명(誥命: 임명장)을 청하여 인준을 받아온 공으로 논밭ㆍ노비ㆍ안마(鞍馬, 등에 안장을 얹은 말)ㆍ의복을 함께 받았다.

 

세조 2년(1456) : 병조판서로서 국방에 필요한 외교응대의 일을 위임받아 사실상 예조의 일을 일을 맡아서 처리했다. 곧이어 우찬성이 되어서는 대사성까지 맡았다.

세조 3년(1457) : 좌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오르고, 세조 5년(1459)에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 무렵 동북 방면에 야인(野人)의 잦은 침입으로, 강경론을 폈다.

 

세조 6년(1460) : 강원ㆍ함길도의 도체찰사가 임명되어 야인정벌을 위하여 출정하였다. 군사를 몇 개 부대로 나누어 여러 길로 한꺼번에 진격하는 전략을 펼쳐 야인의 소굴을 크게 소탕하고 개선하였다.

세조 8년(1462) : 영의정부사가 되고, 세조 10년에 지위가 너무 높아진 것을 염려하여 사직한 적이 있으며, 세조 13년에 다시 예조를 겸했다.

 

세조 14년(1468) : 예종이 즉위함에 유언으로 승정원에 들어가 원상(院相: 어린 임금을 보좌하던 원로대신)으로 서무에 참여하여 결정하였다. 같은 해 이른바 남이(南怡) 옥사를 처리하였다.

예종 1년(1469) : 겨울에 예종이 승하하자, 대왕대비에게 후사(後嗣)의 결정을 서두르자고 건의하여 왕위의 승계에 공이 컸다.

 

1470년 성종이 즉위함에 영의정에 다시 임명되었다. 노병(老病)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고, 성종 3년(1472)에는 《세조실록(世祖實錄)》ㆍ《예종실록(睿宗實錄)》의 펴냄에 참여하였다.

 

이어 세조 때부터 작업을 해온 《동국통감(東國通鑑)》의 편찬을 성종의 명에 따라 신숙주의 집에서 총관하였다. 그리고 세조 때 펴내도록 명을 받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고치고 다듬는 것을 위임받아 완성했다. 또한 여러 나라의 음운(音韻)에 밝아, 여러 역서(譯書)를 펴냈으며, 또 일본ㆍ여진의 산천(山川)의 중요한 점을 표시한 지도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리고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지어 일본 정치세력들의 강약, 병력의 다소, 영역의 멀고 가까움, 풍속의 다른 것과 같은 것, 사선(私船, 개인 배) 내왕의 절차, 우리 측 관궤(館餽: 객사로 보내는 음식)의 형식 등을 모두 기록하여 일본과의 교빙(交聘)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많은 업적을 남기고 성종 6년(1475)에 삶을 마쳤다. 세조는 일찍이 “당태종에게는 위징, 나에게는 숙주”라고 할 정도로 세조와의 관계가 깊었다. 이러한 관계는 사육신ㆍ생육신을 추앙하는 도학적(道學的)인 분위기에서는 항상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나, 당대에서의 신숙주의 정치적ㆍ학문적 영향력은 큰 것이었다.

 

신숙주를 좋게 평가하는 표현으로는 ‘항상 큰 줄거리를 생각하고 작은 절의에는 구애되지 않았다.’든가, ‘큰일에 처하여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강과 내를 자르듯 하였다.’는 것과 같은 것이 있다.

 

과거시험의 시관(試官)을 열세 차례나 하여 사람을 얻음이 당대에서 가장 많았고, 예조판서를 십수 년, 병조판서를 여러 해 동안 각각 겸임한 것은 드문 일이었다. 이렇게 특별한 배려는 외교ㆍ국방 면에서 신숙주의 탁월한 능력에 따른 것으로서, 저술 대부분이 이에 관계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대교린의 외교문서는 거의 신숙주의 윤색을 거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글씨를 잘 썼는데 특히 송설체에 뛰어났다고 한다. 전하는 필적으로는 송설체의 유려함을 보여 주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의 찬문(贊文)과 진당풍(晉唐風)의 고아한 느낌을 주는 해서체의 「화명사예겸시고(和明使倪謙詩稿)」 등이 전한다.

 

저서로는 《보한재집(保閑齋集)》이 전하는데, 1644년(인조 22)에 7세손 신숙(申洬)이 영주군수로 있을 때 교서관본 완질을 얻어 펴낸 것이다. (참고: 신숙주 졸기, 《성종실록》 6/6/1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신숙주를 요약해 보면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세종 21년(1439) 집현전 학자로 있으면서 훈민정음 창제에 큰 공을 세웠다. 문종 2년 수양대군을 따라 명나라를 방문하며 그와 친분을 쌓았다. 이때부터 수양대군을 도와 정권과 왕위 찬탈에 공을 세워 공신으로 책봉돼 많은 토지를 받는 등 훈구파로 성장했다. 또한 《국조오례의》, 《동국정운》, 《국조보감》, 《세조실록》 등 조선 전기의 국가적 편찬 사업을 감독했다. 동시에 단종을 배신하고 세조의 왕위 찬탈에 참여해 비난받기도 했다. 이런 일로 당시 사람들은 신숙주의 배신을 빗대어 녹두나물을 숙주나물이라 불렀다고 한다. 녹두나물은 잘 쉬는 특성이 있다.

 

 

신인손(辛引孫, 공양왕10년, 1384∼세종 27년, 1445) : 조선 초기의 문신

 

태종 2년(1402) 식년시에 생원으로 급제하고 태종 8년에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여 병조판서ㆍ대제학에까지 올랐다. 처음 사관(史官)에 보임되고, 태종 13년에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에 전임되어 항상 여러 대군(大君)과 함께 경전(經典)과 사기(史記)를 강론하였다.

 

임금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더욱 대우하여 친히 난죽(蘭竹) 병풍을 써서 주었다.

 

그다음 해에 내섬소윤(內贍少尹)에 제수되고, 무신년에 사헌 집의(司憲執義)에 제수되었고, 경술년에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 임자년에 사간원 좌사간 대부에 옮겼다가 ... 나가서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다음 해에 마침 흉년이 들어서 특명으로 유임하였다. 세종 16년에 병조 좌참의를 제수받고 조금 뒤에 승정원 우승지로 옮겼다가 도승지로 승진하였다.

 

세종 20년(1438)에 병조 참판에 제수되고, 세종 26년에 주문사(奏聞使)로 적 왜(賊倭)를 호송하여 경사에 갔다가 칙서를 받들고 돌아오매, 안마(鞍馬)를 주고, 판한성부사에 승진되고, 형조판서로 옮겼다.

 

세종 27년(1445) 정월에 병에 걸리매 의원을 보내어 치료하고, 예문관 대제학에 옮기었으나, 병으로 직책에 나오지 못하였고, 5월에 어머니 상사를 당하여 더욱 위독하여지매, 글을 주어 고기 먹기를 권하였으나 드디어 낫지 못하고 죽었으니, 나이 62살이었다. 조회를 이틀 동안을 멈추고, 관을 주고 조의와 부의를 의식과 같이 하고, 시호를 공숙(恭肅)이라 하였으니, 벼슬에 게을리하지 않는 것을 공(恭)이라 하고, 단단히 마음 먹고 결단하는 것을 숙(肅)이라 하였다. 신인손은 성품이 강직하여 아첨하지 않아서, 사람의 잘못하는 것을 보면 용서하고 참지 못하고 곧은 말로 배척하였다. (《세종실록》 27/7/26)

 

 

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kokim97@hanmail.net
Copyright @2013 우리문화신문 Corp. All rights reserved.


서울시 영등포구 영신로 32. 그린오피스텔 306호 | 대표전화 : 02-733-5027 | 팩스 : 02-733-5028 발행·편집인 : 김영조 | 언론사 등록번호 : 서울 아03923 등록일자 : 2015년 | 발행일자 : 2015년 10월 6일 | 사업자등록번호 : 163-10-00275 Copyright © 2013 우리문화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ine996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