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비취, “가르치는 것도 공부다”

2023.04.04 12:05:39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621]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1945년 광복 직후, 국립국악원의 전신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가 춘천에서 공연 기회를 가졌다는 사실은, 당시의 사정으로는 매우 이례적이었다는 생각이다. 그만큼 춘천지방 지역 사람들이 전통음악을 대하는 열정이 대단했음을 짐작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기실 지금도 재미없는 음악으로 치부되고 있는 정악(正樂)에 대한 반응이 이 지역에서는 생각 밖으로 뜨거웠다는 점도 이채롭다.

 

1962년에 <춘천국악회>가 창립되고, 각급 교육기관에 국악취타대나 농악대, 관현악단 등이 운영되기 시작하였으며 뒤를 이어 한국국악협회 강원지부가 탄생하는가 하면, <강원국악연구원>도 설립되어 악(樂), 가(歌), 무(舞)의 강습활동이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노래 가운데 가곡이나 가사, 시조의 경우는 지역 자체에서 또는 국악원의 협조가 이루어져 그런대로 진행되었지만, 일반 대중이 가장 바라고 원하던 민요창 분야는 전문 강사를 확보하지 못하여 협회의 운영자들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국악의 보급 활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강습활동이 우선되어야 하는데, 당시 춘천지역 내에는 민요창을 지도할 만한 전문 소리꾼이 없어서 이 분야는 뒷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교장선생님 출신으로 국악협회장을 맡고 있던 류무열씨의 고민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자신이 직접 <국립국악원>을 찾아가 지방의 국악발전을 위해, 악보자료나 음반자료, 그리고 지도강사의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는데, 정악이나, 가곡, 가사, 시조, 등은 큰 문제가 없었으나, 민속음악의 경우, 특히 경서도 민요를 지도할 강사를 확보하는 일이 예사롭지 않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 뒤에는 더더욱 고심이 깊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류 회장은 경기민요의 강사 확보를 위한 결심을 굳히고, 안비취 명창을 찾아갔다고 한다. 사전에 편지나 전화로 상황을 알리고, 만날 일시를 조정하여 만나는, 소위 약속 시간과 장소를 의논하지 못한 채, 불쑥 찾아갔다는 것이다. 당시 안비취 명창은 묵계월, 이은주 명창과 함께 국가문화재 경기민요의 예능보유자로 활동하고 있던 당대의 대명창이었다. 공연이나 방송 출연도 많아서 그에게 경서도나 강원민요를 배우러 몰려드는 제자들이 많다는 정보도 확인해 둔 참이었다.

 

류 회장은 안비취 명창을 만난 자리에서 “선생의 제자들 가운데 소리 잘하는 예비명창 한 사람을 <춘천국악원>의 민요 강사로 추천해 주시오”라고 청을 하였다고 한다.

 

강사료를 비롯하여 지도강사의 수업시간, 강습 요일, 강습 내용 등 조건이나 대우는 제시하지 못한 채, 무조건 민요강사를 보내달라고 졸랐다 하니 이것은 어린아이의 생떼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게다가 한술 더 떠 “강사를 보내주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라는 배수진을 치고 강력하게 요구했다고 한다.

 

친소(親疎)관계를 떠나, 지역의 국악발전이나 보급을 위해 민요 강사가 절실하다는 뜻밖의 요구에 안비취 명창도 매우 난감했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류 회장은 포기하거나, 돌아갈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안비취 명창은 고심 끝에 그가 아끼는 제자, 이유라를 불러 나지막하게 앞뒤 사정을 이야기하고 “열악한 조건이지만, 춘천에 가서 국악을 보급해 볼 생각이 없느냐”라며 넌지시 의향을 물었다고 했다.

 

현 <춘천시립국악단> 예술 감독 이유라의 회고담이다.

 

“선생님 말씀은 항상 지엄했지요. 그렇지만 이 문제는 따르기도, 거부하기도 어려웠어요. 얼른 대답을 못 했지요. 당시 제 나이 30대 초반이었고, 여전히 배워야 할 소리가 많았던 때였는데, 그 먼 곳에 떨어져 있으면서 남을 가르친다는 자체가 엄두가 나지 않아 한참을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그는 나지막하게 귓전을 울리는 선생님의 이 말씀 한마디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가르치는 것도 공부다!”

남을 지도하면서 소리가 늘고 좋아진다는 스승의 이 한마디는 수백 쪽의 설득용 연설문을 압도하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이 감독은 아무 연고도 없는 춘천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1991년 봄부터 10여 년 동안은 주 2~3회, 서울에서 춘천으로 오가며 어린 학생들로부터 중, 노년의 남녀 수강생들에게 경서도의 좌창, 입창, 그리고 강원도의 대표적인 민요들을 가르쳤다. 그가 가르친 어린 제자들 가운데는 현재 <경기도립국악단>의 민요 수석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함영선 명창을 비롯하여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이 감독은 제자들을 지도하면서도 안비취 선생을 모셔 소리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연습과정도 스스로 엄격하게 운영해 왔는데, 그 대표적인 결과가 바로 그다음 해인 1992년도 전주대사습대회 경기민요 부문에서 장원상을 받게 된 것이었다. 많은 경쟁자를 뒤로하고 장원에 올랐다고 하는 점은 자신에게 얼마나 엄격했는가 하는 점을 알게 한다.(다음 주에 계속)

 

 

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suhilkw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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