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재를 오르다

2023.05.10 11:26:20

이 재 위에 자동차가 다니는 길을 내지 말기를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198]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하늘재를 아세요?

 

이렇게 물어보면 대부분 그게 뭐냐고 되묻는다. "아, 충청북도와 경상북도를 연결하는 고개인데, 거 왜 수안보에서 미륵불 있는 데로 해서 넘어가는 곳이요"

 

이렇게 말해 주면 "아, 거기요, 그게 이름이 하늘재입니까?"라며 비로소 어디인 줄 대충 파악하는 눈치다.

 

다시 묻는다. "하늘재를 올라가 보셨나요?"

 

이 질문을 들은 사람 열이면 열은 올라가 보지 못했다고 할 것이다. 사실 고향이 문경인 나도 갔다고 말할 수 없었다. 전에 도자기를 하는 도예가 차를 타고 문경 쪽에서 차로 올라가 충북 쪽에서 올라오는 길을 본 적이 있지만, 차로 간 만큼 올라갔다는 느낌이 별로 없었다. 예전 주소로는 문경군 문경읍 관음리이고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을 다니던 용흥 초등학교에서부터 서쪽 태백산맥을 넘는 고개로 올라가는 것인데 길옆에 띄엄띄엄 집도 있고 깨어진 돌탑도 있고 해서 옛길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걷는 고생이 없어서 고개를 오른다는 느낌이 약했기 때문인 듯, 가본 것 같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고개(峙)건 재(嶺)건 올라가는 길은 반드시 두 개 이상이 있을 터인즉 경북과 충북 사이에 놓인 이 하늘재도 올라가는 길도 최소 양쪽으로 있을 것이고, 일단 문경 쪽으로는 올라가 본 적이 있지만 반대편 충북 쪽에서는 올라가 보지 못해서 완전히 올라가 보았다는 말도 못 하였고 그저 철들면서부터 하늘재가 어떻게 생겼는지 늘 궁금하던 터였다. 그러다가 드디어(!) 하늘재를 올라갈 기회가 왔다.

 

필자가 참여하고 있는 동아시아고대학회라는 학술모임에서 하늘재 답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충주에서의 학술행사를 마치고 이후 하늘재에 가기 위해 수안보에서부터 우선 중원미륵사터를 찾아갔다.

 

미륵사터의 거대한 부처에 대해서는 다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큰 돌을 쌓아 올린 석벽이 세 군데에서 둘러싸고 있는 한 가운데에 높이 9.8미터의 거대한 불상이 서 있다. 5개의 큰 돌로 몸체와 얼굴을 빚었고 머리엔 갓을 쓴 이 석불입상은 소박하지만 포근하고 자비로운 상호로 해서 많은 이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625 전쟁 때와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 등 국가적인 큰일이 있을 때 며칠 동안 얼굴에서 땀이 흘러내렸다는 전설로 해서 더욱 외경심을 주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전설은 그 옛날 천년사직 신라가 멸망하자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그의 누이 덕주공주와 함께 서라벌을 떠나 북쪽으로 향하다가 하늘재를 넘고 미륵리에 당도해서 이곳에 석불입상을 세웠고, 덕주공주는 조금 더 가서 월악산에 덕주사를 건립하고 이 석불과 마주 보는 작은 불상을 세운 뒤 기도하며 신라의 부흥을 기다렸으나 끝내 그들이 바라던 바는 오지 않아 마의태자가 결국엔 금강산을 향해 떠났다는 것이다.

 

그런 전설을 지닌 이 석불은 그동안 일반인들이 볼 수 없었다. ​

 

9년 전 석불이 서 있는 석굴 옆을 지나는 하천에서 지반침하현상이 일어나 석굴과 석불이 무너질 수 있다는 진단에 따라 충주시 문화재당국이 대대적인 공사에 들어가 수많은 석재를 해체했다가 다시 맞추는 작업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석불도 지반을 맞추는 작업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석굴은 가림막 뒤에 숨어서 근 10년을 서 있어야 했고 사람들은 그 앞에서 아쉬움을 안고 돌아갔다. 2019년 1월에 갔던 필자도 그랬다.

 

 

그러다가 드디어는 작업이 거의 끝나 가림막이 제거된 지 한 보름밖에 되지 않았다며 건국대 홍성화 교수님이 답사를 제안해 온 것인데, 가림막은 벗겨졌지만 공사용 비계(飛階)는 남아 있어 그 사이로 간신히 석불을 보며 사진으로 담을 수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이게 신라말 고려 초에 만든 것이라고 하면 근 천년이 넘어 석불 위에 쌓인 오래된 시간의 흔적이 있었고, 불상의 얼굴은 환한 느낌이었는데 새로 공개된 석불을 보니 어깨와 몸통이 하얗게 다 씻겨있었고 그러다 보니 얼굴에도 마치 죽은 깨처럼 뭔가가 많이 드러나 보였다 옛날 얼굴과 느낌이 달라진 것이다.

 

 

이상하다는 생각에 과거 사진들을 찾아보았다. 여러 군데에 소개된 사진을 보니 과연 크게 변했구나. 아래의 왼쪽 사진이 새로 드러난 석불이고 오른쪽이 전에 촬영된 사진인데

 

 

누가 보더라도 부처의 몸은 깨끗해졌지만, 얼굴은 환한 달덩이같은 얼굴이 죽은 깨가 앉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왜 이렇게 변했을까? 공사현장을 지켜본 미륵세계사의 덕관 주지스님은 오래된 역사유적에 낀 이끼도 역사인데 깨끗하게 닦는다고 석불의 전신을 화학약품을 써서 다 씻어내는 과정에서 얼굴에도 화학약품이 들어가 석질이 변하고 뭔가 덕지덕지 들러붙어서 일어난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것이야말로 문화재를 보호한다면서 불상에서 가장 중요한 얼굴 자체를 훼손한 사례라며 분노하신다. 환한 얼굴로 우리에게 위안과 평안을 주던 석불이 영 볼품없고 입술 주위도 지저분하고 욕심만 많은 얼굴이 되어있지 않으냐는 것이다.

 

근 10년의 공사 끝에 이 일대 석불과 석굴이 지반을 안정적으로 갖게 된 것은 다행이지만 가장 중요한 불상의 얼굴이 크게 변형된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하늘재로 발길을 돌린다. 하늘재는 여기에서 2.5킬로미터를 걸어 올라가야 한다. 나는 평소에 경북 문경 쪽 생각을 하면서 이쪽도 차가 올라갈 정도의 길이 아닌가 했는데 올라가 보니 곧 길이 좁아지며 그 옛날 다니던 작은 길만 나오고 차가 다닌 흔적은 전혀 없다.

 

하늘이 보이지 않는 깊은 숲에서 4월 말 5월 초의 신록은 마침 살살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청명한 세계를 펼쳐 보여준다. 새들도 나와서 인사를 한다. 길옆에는 옛날 이곳을 지나가던 사람들을 위해 잠을 재우고 교통편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 원(院)의 터도 있고 조선시대 백자가마터도 있었다.

 

하늘재는 백두대간을 넘는 첫 고갯길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시대 초인 156년 아달라이사금왕의 북진을 위해 하늘재를 개척했으며, 죽령 옛길보다 2년 앞서 열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충청도 충주와 경상도 문경 사이의 고갯길 가운데 가장 낮다. 하늘재라는 이름은 하늘에 닿을 듯이 높은 고개라 하여 붙여진 것이지만, 실제로는 고갯마루의 높이가 해발 525m로 그다지 높지 않다.

 

이 일대는 당시 한반도의 남북을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교통로였다. 삼국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접경 지역에 있으며 군사상으로 볼 때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 지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또한 동시에 문명의 길이기도 했다. 삼국시대 한반도에 도입된 종교이자 새로운 문명의 원동력이 된 불교가 신라로 전해진 길이기도 했다. 원래 이름은 아침에 닭이 우는 소리를 듣는다는 계립령(鷄立嶺)이었다. 조선 태종 때 지금의 새재(鳥嶺)로 새 고갯길을 내도록 한 뒤에 하늘재의 이용은 점점 줄어들었다.

 

 

 

 

 

 

이곳은 백두대간의 중간쯤에 해당한다. 고개 넘어 북쪽으로 큰 베를 펼쳐놓은 듯한 바위산인 포암산(962m), 남쪽으로 주흘산의 일부인 부봉(935m)과 월항삼봉(851m)이 자리를 잡고 있다. 남북의 산을 연결하는 산줄기 사이에 말안장처럼 움푹 들어간 곳에 길이 만들어졌다. 경상도 쪽 문경시 구간은 신작로가 만들어지면서 노면이 콘크리트로 포장되어 옛길의 모습이 크게 훼손되었고 다행히 미륵리 절터에서 문경으로 올라가는 충북 쪽 하늘재 길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미륵리에서 출발한 계립령 하늘재길은 2.5킬로이니 천천히 걸어서 1시간쯤 걸린다. 꼭대기를 넘어서는 관음리이다. 이렇게 불교의 보살 이름이 붙은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궁금해하는데, 길의 이름이 붙은 것이 신라시대였고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보면 관음리가 먼저고 그 다음이 미륵리다. 곧 관음보살을 만나서 이생을 잘 살다가 다음 생에는 미륵보살의 가호를 받는다는 뜻과 염원이 이 고갯길을 두고 양쪽으로 이름이 달라진 뜻이라고 풀이할 수 있겠다.​

 

필자의 고향은 문경이고 바로, 이 부근이다. 하늘재로 넘어가면 관음리 다음에 용흥리가 있는데 거기에 있는 초등학교를 필자가 2학년까지 다녔다. 필자가 자란 동네는 아까 미륵리 절터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또 산 사이로 낮아진 데가 있어 그곳으로 넘어가면 그쪽 평지에 있다.

 

그 동네로 가는 도중에 월항리라는 곳이 있고 근처에 ‘개그늘’이란 지명이 있는데 옛날 공민왕이 피난하러 와 머물면서 설치한 큰 차양이 그늘을 드리웠기에 그런 이름이 왔다는 전설이 있는 것을 보면 그쪽으로도 많이 다녔지만, 지금은 완전히 끊어진 길이 되었다는 뜻이다. 하늘재 고개마루에서 잠시 땀을 씻고 기념사진을 찍은 뒤 우리는 올라왔던 길로 다시 내려간다. 식힐 땀도 별로 나지 않은 싱그러운 봄날 하루였다. ​

 

백두대간을 넘는 첫 고갯길인 하늘재를 오르고 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이곳에는 고대 한반도의 주인이 되고자 했던 고구려, 신라, 백제가 영토확장을 위해 치열하게 다투었던 역사가 있다. 관음리와 미륵리를 연결하는 고갯마루, 거기에서 필자는 경북에서 태어나 충북에서 주로 성장한 지난날을 되돌아보았고 이 길을 통해 서울로 이어지며 왕래했던 많은 사람의 발길도 생각해보았다.

 

그러고는 역사의 큰 물길이 바뀌면서 한적해진 이 옛길의 운명도 생각해보았다. 우리의 삶도 그렇고 나라와 겨레의 삶도 그러리라.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이 옛길이 남아 있으므로 해서 우리가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다는 거다. 우리 동아시아 고대학회 회원들이 답사를 다니는 이유이기도 하다. 제발 이 재 위에 자동차가 다니는 길을 내지는 말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이곳에 간직된 역사가 이 땅과 길에 숨어있다가, 이곳을 밟는 사람들에게 말을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동식 인문탐험가 lds@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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