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을 도와 세종르네상스를 만든 인물들을 살피고 있다. 졸기를 중심으로 유관과 유정현을 살펴보자.
유관(柳寬, 충목왕 2, 1346~세종 15, 1433) : 조선의 청백리
· 유관의 졸기
세종 15년 5월 7일(1433) 나이가 많아 우의정을 물러난 유관(柳寬)이 졸(卒)하였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 곧 슬피 울어서 초상난 것을 알리고자 하니, 지신사 안숭선이 아뢰기를,
"오늘은 잔치를 베푼 뒤이고, 또 예조에서 아직 정조장(停朝狀, 조회를 정지)을 올리지 않았으며, 날이 저물고 비가 내리니, 내일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고, 흰옷과 흰 산선(繖扇, 임금이 나들이할 때 앞에 세우는, 우산 모양으로 생긴 의장)으로 홍례문 밖에 나가 백관을 거느리고 의식과 거행하였다. 관의 처음 이름은 관(觀)이고, 자는 몽사(夢思)인데, 뒤에 이름은 관(寬), 자를 경부(敬夫)로 고쳤다. 황해도 문화현 사람으로 고려 정당문학(政堂文學) 공권(公權)의 7대손이다.
공민왕 20년(신해년, 1370)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번 옮겨서 전리 정랑(典理正郞), 전교 부령(典校副令)이 되고, 봉산 군수로 나갔다가 들어와서 성균 사예가 되고, 내사 사인(內史舍人)과 사헌 중승(司憲中丞)을 거쳤다. 태조가 원종 공신권(原從功臣券)을 하사하고, 대사성ㆍ좌산기(左散騎)와 이조ㆍ형조의 전서(典書)를 거쳐, 강원ㆍ전라 두 도의 관찰사와 계림 부윤으로 나갔다가 들어와서 예문관 대제학, 형조 판서를 지나, 두 번 대사헌이 되고, 의정부 참찬과 찬성으로 옮겨 갑진년(세종 6년, 1424)에 우의정에 올랐다.
관은 공순 검소하고 정직하며, 경사(經史, 경서와 사기)를 널리 보고 가르치기를 게을리 아니하며, 군사 및 병법에 관한 책도 모두 섭렵하였다. 집에 있을 때 살림을 돌보지 아니하고 오직 서사(書史)로 스스로 즐기고, 비록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어도 조금도 개의치 아니하였다. 이단(異端, 유교 외의 종교)을 배척하여 여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은 뒤에 불공을 하지 말고 일체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에 따르되, 고기 말린 포와 젓갈만은 없애라. 시속에서 놀라고 해괴히 여길까 두렵다. 비록 기일(忌日)을 당할지라도 불공을 드리고 중을 먹이지 말라." 하였다. 이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가 88살이다. 3일 동안 조회와 시장을 멈추고, 치조(致弔, 임금이 신하의 죽음에 조문하던 일)하며, 관에서 장사를 다스렸다. 시호를 문간(文簡)이라 하였는데,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덕을 한결같이 닦고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 간(簡)이다. (《세종실록》15/ 5/7)
유관, 방 안에서 우산을 쓰다!
고려부터 조선까지 8대 왕을 모신 '유관(柳寬)'은 '존경받는 정승(政丞)'으로 늘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막강한 권력의 자리에 있었음에도 울타리 없는 오두막에 살았으며 수레나 말(馬)을 타지 않고 지팡이를 짚고 걸어 다녔다. 심지어 겨울이나 여름에나 짚신을 신고 나가 호미(鋤)를 들고 채마밭을 돌아다니며 스스로 밭일을 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마을(村) 사람들은 그가 나라의 재상(宰相)인 줄도 몰랐을 정도였다.
그렇게 검소했던 유관(柳寬)에게는 유명한 일화(逸話)가 있는데 한 번은 장맛비가 오래 계속되어 방안까지 빗물이 들어올 정도였다. 나중에는 지붕에서도 비가 세자 유관(柳寬)은 우산(雨傘)을 쓰고는 비(雨)를 피했다. 그리곤 걱정하는 부인(夫人)에게 말했다.
"우산(雨傘)도 없는 집은 이런 날 어떻게 견디겠소"
고려의 공민왕부터 조선의 세종(世宗)까지 변치 않고 늘 청렴한 유관(柳寬)의 검소한 모습에 임금은 물론 백성들까지 오랫동안 존경했다고 한다.
변함없는 삶의 모습과 정직한 태도가 존경받는 시작일 것이다. 방 안에서 우산을 쓴 일도 있고 이후부터 동네 사람들은 유관의 집을 우산각(雨傘閣)이라 불렀다고 한다.
▲ 비가 새는 방안에서 일산을 펼친 청백리 유관 선생(그림 이무성 작가)
유정현((柳廷顯 공민왕 4 1355~ 세종 8년 1426)
· 생애 및 활동사항
고려 말에 음보(조상의 덕으로 벼슬을 얻게 됨)로 사헌규정(司憲糾正)을 거쳐 전라도안렴사ㆍ장령(掌令)ㆍ지양근군사(知楊根郡事)ㆍ집의ㆍ좌대언 등을 지냈다. 이어 1394년(태조 3)에 상주목사로 발탁되었다. 이후 병조전서(兵曹典書)ㆍ완산부윤을 지내고, 1404년(태종 4)에 전라도관찰사ㆍ중군동지총제 태종 9년(1409)에 판한성부사를 거쳐 이듬해에 형조판서로 승진하였다.
이어서 예조판서ㆍ서북면도순문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ㆍ평양부윤ㆍ대사헌ㆍ이조판서ㆍ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ㆍ병조판서ㆍ찬성사 등 요직을 거친 뒤 태종 16년(1416)에는 좌의정이 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1419년(세종 1) 대마도를 정벌할 때 삼군도통사에 임명되었고, 세종 6년에는 영돈녕부사 겸 판호조사를 지낸 뒤 세종 8년에 다시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을 이유로 사퇴하고, 이로부터 4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관직생활을 순탄하게 지냈다. 성품은 과단성이 있고 검소, 근면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이치를 따지고, 옳은 일을 주장할 때는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고 한다. 태종이 양녕대군의 세자위를 폐할 때 누구도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으나, 먼저 현명한 이를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는 사실에서 유정현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유정현 졸기, 호조 업무에서 깐깐
세종 8년(1426) 5월 15일 좌의정으로 물러난 유정현의 졸기.
좌의정으로 물러난 유정현(柳廷顯)이 졸하였다. 처음에는 고려에 벼슬하여 사헌 규정(司憲糾正)에 임명되고, 여러 번 옮겨 전라도 안렴사ㆍ사헌 장령(司憲掌令)ㆍ지양근군사ㆍ사헌 집의ㆍ밀직사 우대언을 거쳐 좌대언으로 옮겼다. 우리 조정(세종 때)에서는 갑술년(테조 3, 1394)에 상주 목사(尙州牧使)ㆍ병조 전서(兵曹典書)ㆍ완산 부윤(完山府尹)으로 제수되고, 나가서 전라도 도관찰사가 되고, 다시 경기좌우도 도관찰사ㆍ중군 동지총제로 옮기고, 또 충청도 도관찰사ㆍ판한성부사로 나갔다가, 형조 판서로 옮기고 예조 판서로 전직되었으며, 또 나가서 서북면 도순문찰리사와 평양 부윤(平壤府尹)이 되고, 사헌부 대사헌ㆍ이조 판서ㆍ참찬의정부사ㆍ병조 판서를 거쳐 다시 참찬이 되고, 찬성사(贊成事)로 승진되었다가 병신년에 좌의정에 임명되어 영의정으로 옮겼다.
기해년 대마도 정벌 때에는 삼군 도통사(三軍都統使)가 되고, 갑진년(세종 6, 1424)에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ㆍ판호조사(判戶曹事)를 겸무하다가 병오년(세종 8, 1426)에 다시 좌의정이 되어 병으로써 면직을 청하여 물러난 지 4일 만에 돌아가니, 나이가 72살이다. 부음(訃音)이 들리니 임금이 매우 슬퍼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슬퍼했으며, 조회를 3일 동안 폐하고 간소한 찬을 들었다. 부의로 쌀과 콩 70석과 종이 1백 50권을 내리고 정숙(貞肅)이란 시호를 내리니, 숨기지 않고 굴함이 없는 것을 정(貞)이라 하고, 헤지지 않게 꽉 잡은 마음으로 결단하는 것을 숙(肅)이라 한다.
위
정현의 사람됨은 엄숙하고 굳세며, 일을 딱 잘라서 결정하고 검약 근신하여, 일을 조리 있게 처리하고 논란하여 토의함에 굳세고 바른 자세로 피하는 바가 없었다. 태종이 양녕을 폐하고 나라의 근본을 정하지 못하매, 여러 사람이 두려워 하였는데 정현이 맨 먼저 어진 이를 택해야 한다는 의논을 내었으니, 그 뜻은 성상을 두고 말한 것이었다.
태종이 옳게 여기어 들으시고 드디어 계책을 정하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임금이 그의 소신(所信)을 중히 여겼으나, 정치를 함에 가혹하고 급하여 용서함이 적었고, 집에서는 재물에 인색하고 재화를 늘이어 비록 자녀라 할지라도 일찍이 말과 되의 곡식이라도 주지 않았으며, 오랫동안 호조를 맡고 있으면서 출납하는 것이 지나치게 인색하더니, 사람들이 그를 많이 원망하여 상홍양(桑弘羊, 재리에 밝았던 한무제 때 사람)으로 지목하기까지 되었으니, 이것이 그의 단점(短點)이었다. 아들이 둘이니 곧 유의(柳儀)와 유장(柳章)이었다. (《세종실록》8/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