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300석에 몸이 팔린 심청의 효심 어린 이야기는 매우 감동적이다. 1930년대에 출간된 《조선창극사》에도 방만춘이 심청가를 고쳐 짰다고 적고 있는 점을 참고해 본다면, 조선조 정조(正祖)나 영조(英祖)무렵에는 <심청가>가 불렸다는 점을 알게 한다. ‘서한범의 우리음악 이야기’는 지금, 대학 국악과에서 판소리를 지도하고 있는 젊은 소리꾼, 어연경의 심청가 발표회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8~9살 되던 어린 시절, 우연히 판소리 한 토막을 테이프로 듣게 되면서 소리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가사의 내용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고저(高低)의 가락이 흥겹고 멋이 있어서 수없이 따라 불렀다고 한다.
그렇다. 모든 노래를 반복적으로 따라 부르게 되면, 비록 가사의 내용은 이해하기 어렵다 해도 곡조의 표현은 충분히 가능한 법이다. 그 위에 가사의 전개 과정이나 그 의미를 이해한다면 더더욱 적극적인 표현이 될 것이다. 어린 어연경이 처음으로 익힌 노래는 바로 춘향가 가운데 <사랑가> 대목이었는데, 춘향 역할을 맡아 멋진 창을 불러 준 소리꾼이 바로 성창순 명창이라는 사실은 훨씬 뒤에 알게 되었다고 한다.
고(故) 성창순(1934-2017년)은 광주의 명창, 성원목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소리를 가슴에 담았다가 따라 부르곤 했는데, 그 수준이 거의 전문가 수준이어서 기특하게 여긴 아버지가 판소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성창순 명창은 타고난 목과 끼를 지닌 명창으로 판소리 <심청가>의 예능보유자에 올랐던 인물이다.
그가 부르는 소리는 <심청가>뿐이 아니다. 김소희로부터 <춘향가>, <정응민에게서 <수궁가>, 박녹주로부터 <흥보가>, 정권진에게서 <적벽가>를 배워 일가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음악인으로서의 자질을 지닌 바탕 위에 서예나 교양미가 출중해서 이 분야 많은 후배, 제자들이 존경해 마지않았던 명창이었다. 그의 수상 경력은 너무도 화려하다. 1968년, 한국국악협회 주최 전국명창경연대회에서 1등, 1978년에는 제4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명창부 장원, 1982년, KBS 제정 국악대상, 1991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던 인물이다.
어연경이 성창순 명창을 스승으로 만나게 된 인연은 국악예고 1학년 때, 시조(時調)창을 즐겨 부르시던 외할아버지를 통해서였다.
그러니까 어린 시절에는 외할아버지의 시조창을 들으며 자랐고, 중학교 시절에는 동네 국악학원에 다니면서 <진도아리랑>이나 <사철가>, <사랑가> 등을 배웠으며 국악예고에 입학한 어느 날,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서울 잠원동의 성창순 명창을 만나게 되고, 그날부터 소리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던 고교생이 판소리와 가까워지면서 보다 더 대담해졌고, 학교의 생활도 판소리에 쏟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자신이 가야 하는 길이 판소리의 길임을 다짐하던 무렵이었다.
고교 1년생, 어연경이 명창으로부터 배운 최초의 소리는 <만고강산>이라는 단가였다. 단가(短歌)란 짧은 노래를 말한다. 판소리와 같은 긴소리를 하기 전, 목을 풀거나, 또는 목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부르는 짧고 간단한 노래가 곧 단가다.
참고로, <만고강산>이라는 단가는 유람차 나섰다가 삼신의 하나인 봉래산에 이르러 그 절승에 감탄하는 내용으로 짜인 노래다. 단가에 흔히 보이는 내용들은 중국의 지명(地名)이나 인물(人物)들이 나오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노래에서는 한국의 지명이 나오고 멋진 경관을 노래하고 있어서 많이 불리고 있는 소리다. 노랫말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만고강산 유람할 제, 삼신산(三神山)이 어드메뇨.
일(一)봉래(蓬萊) 이(二)방장(方丈)과 삼(三)영주(瀛洲)가 아니냐,
죽장 짚고 풍월 실어 봉래산을 유람헐 제, (아래는 줄임)
단가와 함께 그가 배운 소리는 심청가 중 <집이라고 들어서니, 부엌은 적막허고->로 시작되는 대목인데, 심봉사가 곽씨 부인을 장사 지내고 난 뒤로 이어지며, 중모리장단에 맞추어 진행되는 슬픈 소리제다.
성창순 문하에 들어간 어연경은 1997년 제자 발표회를 통해 전수자가 되었고, 선생 댁으로 소리공부를 하러 가던 그때가 너무도 행복했다고 회상하고 있다. 그해 여름, 구례 연기암으로 처음 산(山)공부를 들어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심청가 중 <따라간다> 대목을 배웠던 때를 비교적 상세하게 기억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토록 열심히 소리 공부를 했음에도, 그는 그해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만다. 서울 00예술대 예비 1번이었음에도 그에게 입학은 허락되지 않았다. 주위의 권유로 전남 장흥에 있는 <전남도립 00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당시 성창순 명창의 배려로 《광주시립국극단》의 비상임 단원이 되어 공연생활도 경험하였으나 자신의 대학진학 실패는 깊은 충격으로 남아있었다. 그의 말이다.
“그때 저는 선생님 댁에서 지내며 눈물로 낮과 밤을 지새우고 있었어요. 그러면서도 선생님 옆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선생님이 연습하시던 소리를 듣기 위해서였지요. 선생님 소리를 듣고 있으면 가슴속이 조여 오고, 정수리가 찌릿찌릿 해 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 소리 흉내 내보고 싶은 마음만 그득했어요.
2003년, 선생님은 불행하게도 뇌졸중 초기라는 진단을 받으셨고 그래서 반포에 있는 김 내과를 시작으로 여러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악조건 속에서도 저는 심청가의 이수자가 되었고, <영광 법성포 단오제 경연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40일 된 큰딸, 지원이를 데리고 저는 구기동 선생님 댁으로 날마다 출근해서 <심청가>, <춘향가>, <흥보가>를 여러 번 반복 해서 배웠습니다. 제가 잠깐 나들이하게 될 사정이 생길 때도 선생님은 어린 지원이에게 분유 타서 먹여 주시고, 기저귀까지 갈아 주시는 등, 사랑을 듬뿍 쏟아주셨어요. 참으로 모든 제자들이 마음을 다해 받들고 있는 고마운 선생님이셨습니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