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비석 형태로 다듬은 돌에 불상과 상을 조성한 기록을 새긴 불비상(佛碑像)은 중국에서 북위시 때부터 당대(唐代)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조성되었습니다. 특히 불비상에 새겨진 글자는 조성 시기와 발원(發願)한 사람, 조성 당시의 역사·사상적 배경까지 알 수 있어 학술 값어치가 큽니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달리 그 예가 매우 드문데, 통일신라 초기에 제작된 7구(軀)의 불비상이 동일 지역에서 발견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으며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습니다. 계유명삼존천불비상(癸酉銘三尊千佛碑像)은 그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몸체[비신부(碑身部)]ㆍ받침돌[대석(臺石)]ㆍ지붕돌[옥개석(屋蓋石)]이 잘 남아있어 비상 형식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백제 유민들이 발원하여 만든 불비상
1960년과 1961년에 충청남도 세종특별자치시[옛 연기군] 서광암(瑞光庵), 비암사(碑巖寺), 연화사(蓮花寺)와 인근 지역인 공주시 정안면에서 모두 7구의 비상이 확인되었습니다. 이 불비상들은 모두 흑회색 납석(蠟石) 계통의 돌을 사용하였고 조각 기법과 양식도 같아 같은 조각가 집단에 의해 제작됐을 것으로 봅니다.
이 가운데 4구의 비상에는 연대가 기록된 글씨가 새겨져 있어서 제작 시기와 제작 연유를 알 수 있습니다. 글씨는 ‘계유(癸酉)’ ‘무인(戊寅)’ ‘기축(己丑)’ 등의 간지와 ‘전씨(全氏)’ ‘진씨(眞氏)’ 등의 백제 성씨(姓氏), ‘내말(乃末)’ ‘대사(大舍)’ 등 신라 관등(官等)과 함께 ‘달솔(達率)’ 등의 백제 관등명도 보입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 문무왕은 백제 사람들에게 그 지위에 따라 신라 관직을 부여했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다음과 같이 관련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무왕 13년에 백제에서 온 사람들에게 내외의 관직을 주었는데, 관등은 백제의 관직에 준하였다. 경위 대나마는 백제의 달솔, 나마는 백제의 은솔, 대사는 백제의 덕솔, 사지는 백제의 한솔, 당은 백제의 나솔, 대오는 백제의 장덕에 준하였다. 외관으로서 귀간은 백제의 달솔, 선간은 백제의 은솔, 상간은 백제의 덕솔, 간은 백제의 한솔, 일벌은 백제의 나솔, 일척은 백제의 장덕에 준하였다. - 《삼국사기》 권40 잡지(雜誌) 제9
위 기록에 따르면 문무왕 13년(673)에 백제 관리 가운데 달솔에 해당하는 사람에게는 신라 관직 대나마[대내말], 은솔에 해당하는 사람에게는 나마[내말], 덕솔에 해당하는 사람에게는 대사를 부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달솔과 은솔, 덕솔은 백제 제2~4위에 해당하는 높은 관직입니다. 이로써 통일신라 초기에 옛 백제 땅인 연기 지역을 중심으로 백제 유민들이 발원한 불사(佛事)가 이어져 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계유년에 만든 삼존천불비상
계유명삼존천불비상은 1961년 학계에 알려지면서 이듬해 국립공주박물관(당시 국립박물관 공주분관)으로 옮겨졌습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원래 조치원 읍내에서 발견한 것을 서광암으로 옮겨 봉안해 오던 것이라고 합니다.
받침돌과 몸돌은 하나의 돌로, 지붕은 별개의 돌로 만들어 얹었습니다. 몸체 앞면 아래 가운데의 삼존불은 가운데 본존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협시보살상을 대칭으로 배치하였습니다. 본존불은 두터운 대의(大衣)가 양어깨를 덮는 통견(通肩)형식으로 입었고 방형대좌(方形臺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하였습니다. 대의자락은 대좌를 덮어 좌우대칭을 이룹니다.
머리 뒤의 두광(頭光)은 가장자리를 구슬을 꿴 듯한 모양의 연주문(聯珠文)으로 장식한 원형 광배와, 이를 감싼 끝이 뾰족한 불꽃 모양의 이중 광배 등 백제 불상의 형식을 계승하였습니다. 좌우 협시보살은 엄격한 직립 자세에 삼국시대 보살상의 특징인 X자 모양으로 교차한 천의(天衣)를 걸치고 있습니다. 삼존불 좌우에 각 4행씩 음각으로 글씨를 새겼습니다.
歲癸未年四月十五日香徒釋迦及諸佛菩薩像造石記
是者爲國王大臣及七世父母法界衆生故敬造之
香徒各彌次乃眞牟氏大舍上生大舍□仁次大舍□宣大舍贊不小舍貳使小舍□□□小舍□□等二百五十(人)
계유년 4월 15일에 향도가 석가와 여러 불보살의 상을 만들어 돌에 기록하다.
이것은 임금, 대신, 칠세부모와 법계의 모든 중생을 위하여 삼가 만든 것이다.
향도 이름은 미차내 진모씨 대사, 상생 대사, □인차 대사, □선 대사, 찬불 소사, 이사 소사, □□□ 소사, □□ 등 250인이다.
계유년(673) 4월 15일에 미차내의 진모씨를 비롯한 향도 250명이 국왕과 칠세부모와 중생을 위하여 석가와 여러 불보살상을 만들었다는 내용입니다.
삼존불과 글씨를 새긴 몸체 앞면 하단을 뺀 모든 면에는 작은 불상들을 빼곡히 표현하여 장식적 성격이 강합니다. 현재 일부 없어진 부분까지 계산한다면 그 수는 9백여 구로, 이는 천불신앙에 따른 천불상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우리나라의 천불상은 삼국시대에 연가 7년명 금동불입상이나 평양 원오리 출토 소조불과 같이 천불상의 하나로 제작된 사례가 있지만, 이 불비상은 돌에 천불을 새겨 넣은 첫 예로 주목됩니다.
국립중앙박물관(김혜경)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