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안동립 기자] 며칠 전 여행사 손 사장을 통해 작년에 방문했던 한국의 다른 답사단이 이곳 동이박물관을 비판하는 논문을 발표한 일로, 우리 답사단 역시 출입 금지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입장은 허가되었으나 사진 촬영은 절대 금지이다. 박물관 입구에서 카메라까지 압수당해 보관함에 맡긴 뒤에야 입장하였다. 직원 8명이 앞뒤로 밀착하여 감시하고, 심지어 우리 일행을 사진 촬영하여 무척 기분이 나빴다. 서둘러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동이문화박물관(东夷文化博物馆) : 입구에 들어오니 안내 배너에 사진 촬영 금지와 학술적 인용 금지 문구가 있다. 전시관 중앙 벽면의 대형 봉황과 태호 복희, 소호 금천, 치우, 대순(순임금)의 초상을 배치하여 동이 문화가 산동에서 발생했음을 강조하고 있었다.
전시관은 벽화와 여러 고증을 제시하며, 대문구문화(B.C. 4,100~B.C. 2,600), 용산문화, 악석문화(B.C. 2,600~B.C. 2,000) 등 신석기 시대부터 한나라 이전까지의 토기와 석기 유물을 다루고 있다. 특히 발굴 현장 모형을 유리 바닥 아래로 설치해 관람객이 그 위를 걷도록 한 구성이 눈에 띄었다. 농경 관련 돌칼, 활촉, 토기 등이 사실감 있게 전시되어 있었으며, 이 지역 출신인 왕희지, 안진경, 제갈량, 유홍, 증자, 담자 등의 초상화도 함께 전시되어 동이족의 후예라고 소개하였다.
감시원 8명이 우리 답사단을 끝까지 밀착 감시하는 어이없는 상황 속에서, 동이족 문화를 알리는 박물관이 정작 학술적 교류를 원천 봉쇄하고 있다는 점에 깊은 유감을 느꼈다. 황산 선사 유적지(5,000년 전)에 세워진 이 박물관은 동이 문명을 중국 문화의 중요한 뿌리 가운데 하나로 조명하며, 조류 토템 숭배, 수공예, 건축, 언어 등이 초기 국가 형성에 미친 영향을 밝히고 있다.
박물관은 구이(九夷)라고도 불리는 동이족을 화하(華夏) 문화와 교류·융합된 주체로 소개하며, 한국 문화 역시 그 영향을 받은 여러 문화권 가운데 하나로 서술하고 있었다.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하고 쫓기듯 박물관을 나와야 했던 점이 못내 아쉽지만, 동이족의 자취를 중국의 역사 체계 안으로 편입하려는 그들의 의지를 현장에서 생생히 목격한 시간이었다.
박물관을 나오는 데 한국에서 온 또 다른 문화답사단 10여 명을 만났다.
▶죽간박물관(竹简博物馆) : 임기(临沂) 시내에 있는 은적산 한나라 묘에서 출토된 죽간은 기원전 5세기경부터 종이가 발명되기 전까지 널리 사용된 글을 기록하던 방법의 하나이다. 길쭉한 대나무 조각에 글을 쓴 뒤 실로 엮어 만든 형태의 책은 고대 문명의 지혜를 담은 귀중한 보고(寶庫)이다.
중국 최초의 한나라 시대 죽간 전문 박물관으로 소장품은 고대 화폐, 청동기, 비석, 옥기, 자기, 인장과 《손자병법》과 《손빈병법》 죽간 등 다양한 유물이 전시돼 있었다. 특히 발굴된 죽간을 특수 액체가 담긴 유리 용기 안에 보관되어 전시되고 있는데, 글자가 쓰인 죽간을 보면 너무 작은 면적에 가는 붓으로 쓰여 있어 맨눈으로는 글씨를 확인하기 어려웠으나, 벽면에 죽간의 내용을 크게 확대해 두어 이해하기 수월했다.
▶왕희지 고택(王羲之故居) : 답사 일정에 없었으나 점심 식당과 왕희지 사당과 멀지 않은 곳에 있어 가이드 염용철 사장에게 부탁하여 관람할 수 있었다.
중국 동진(東晉) 시대의 서예가 왕희지는 서성(書聖)이라 불린다. 초서, 행서, 해서 등 모든 서체를 완성하여 중국 서예의 으뜸으로 존경받고 있다. 그의 으뜸 걸작으로 《난정집서(蘭亭集序)》를 대리석에 조각하여 그의 서체를 감상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중국식 정원에는 대나무를 심어 미로처럼 꾸며 놓았는데, 자칫 길을 잃기 쉬울 정도로 넓고 울창했다.
평소 왕지환(王之涣)의 시 '등관작루(登鸛雀樓)'의 시 구절인 "더 멀리 보려면 한 층 더 올라가라(欲窮千里目 更上一層樓)"를 통해 흠모해 왔는데, 오늘 이곳에서 왕희지의 초상화를 마주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낭야대(琅琊台, 높이 183.4m) : 두 시간을 달려 낭야대 주차장에 도착했다. 전동차를 타고 해안 절벽을 굽이굽이 오르는 길, 바닥에 뒹구는 낙엽들이 계절의 정취를 더한다. 낭야대는 우뚝 솟은 모양이 마치 높은 대(臺)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삼면이 바다와 접해 있어 절경을 자랑하지만, 오늘은 해무가 끼어 해안의 아름다움을 보기 어렵고 멀리 바다만 보인다.
산꼭대기에 기상대 같은 시설이 있으며, 그 아래에는 바다를 응시하는 진시황 일행의 석상과 그에게 죽간을 바치며 불로초를 찾으러 떠나기를 청하는 죽간을 바치는 서복의 석상이 있다. (낭야대는 서복이 동남동녀 3,000명을 이끌고 불로초를 찾아 떠난 장소로 알려져 있다.)
《산해경(山海經)》에 "낭야대가 발해 사이에 있고, 낭야의 동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뒤 남쪽으로 순행하며 낭야대에 올랐다고 한다.
전동차 마감 시간이 4시 10분이 마지막 운행이라 산꼭대기를 20분 동안 둘러보았다. 걸어 내려오려고 하였는데, 다음 일정이 있어 전동차를 타고 산을 한참 돌아 내려왔다. 바다와 가까워 마른 생선을 파는 아주머니들이 있어 구경하였다.
▶낭야대 전설 : 옛날 이곳에 랑(琅)이라는 남자와 야(琊)라는 여자가 살았다. 악당이 아름다운 야를 잡으려 하자 랑이 그녀를 보호했고, 추격병을 피해 두 사람은 함께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들이 뛰어든 자리에서 두 산봉우리가 서로 꼭 붙은 채 솟아올랐는데, 사람들은 이를 랑과 야가 변한 것이라 믿고 산을 '낭야대'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다시 두 시간을 달려 청도 시내 코리아타운에서 저녁으로 삼겹살을 먹는데, 나는 목이 부어서 된장국에 밥을 말아 먹었다.
(청도 青岛海泉, 이동 거리 351km, 호텔 : 蓝海御华大饭店 0532-5866-00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