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북한의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가 평양에서 김옥균 연구서 《김옥균》을 펴낸 것은 1964년이었다. 그것을 우리나라 대한민국에서 출판한 것은 그로부터 26년 후인 1990년이다.
“이 책은 이미 1964년에 나온 것으로서 26년이라는 시간이 경과된 지금 어쩌면 고루한 느낌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그 이후 북한 역사학계의 근대사 서술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점, 그리고 1968년 일본에서 번역. 출판한 이래 일본은 물론 심지어 남한 역사학계의 근대사 연구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아직도 이 책이 지닌 의의는 손상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주진오)
주진오의 논고에 따르면, 김일성은 1955년 12월 행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지금 다른 나라의 혁명을 하는 것이 아닌 바로 조선혁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선혁명이야말로 우리 당 사상사업의 주체입니다. ……조선혁명을 하기 위해서는 조선역사를 알아야 하며…..”
이로부터 3년 뒤인 1958년 3월. 김일성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총회 연설에서 “주지하디시피 일본은 동양에서 최초로 자본주의 발전의 길을 걸었습니다. 김옥균은 자본주의 일본을 이용하여 우리나라를 개명시키려고 하였던 것인데, 우리나라가 일본의 침략을 받았기 때문에 결국 그는 친일파로 규정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함께 토론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김일성의 관점과 교시에 따라 북한학자들이 연구. 발표한 김옥균론은 교조주의적인 색채가 짙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북한의 《김옥균》에 첨부된 자료는 객관적인 사료이므로 좋은 참고가 된다. 이 자료 가운데 김옥균이 일본 망명 중에 고종에게 보낸 편지가 들어 있다. 김옥균은 이 편지에서 민씨세도에 대하여 통박하고 가슴 속의 목소리를 여과 없이 토로하고 있다.
곧, 민씨족은 그 사람됨을 불문하고 세도를 부린 지 20년이 되었으나 그들 중에 나라를 위해 도움이 된 자가 과연 몇 명이나 있나이까. 다수는 나라를 팔아먹는 죄인이옵니다. 청나라에 붙어 국권을 경멸하는 자도 있으며 중전마마의 총애를 얻어 전하의 성명(聖明, 임금님의 밝은 지혜)을 가리고 국사를 망치는 자도 또한 적지 않나이다. 전하께옵서 평소 늘 이를 깊히 우려하시어 신(김옥균)에게 은밀히 이를 제거할 계책을 언급하신 바, 신 또한 감읍하여 말씀 올린 바 있나이다.
간악한 부류들을 척결하지 못할진대 전하로 하여금 망국의 군주됨을 면하기가 불가능하므로 국가를 위하여 신명을 바쳐 거사를 감행하였사온데 이제와서 도리어 신을 지목하여 역적이라함은 어찌된 일이오니까. ……장차 나라를 어떻게 이끌어야 하오리까. 밖으로는 널리 구미 각국과 신의로써 친교하고 안으로는 정치를 개혁하여 인민을 가르치되 문명의 도로써 하고 상업을 흥기하여 재정을 바로잡고 또 군대를 양성함은 어려운 일이 아니오니 능히 그렇게 하면 영국은 거문도를 반환할 것이요 기타 외국도 또한 침략할 생각을 내지 못하리다. ….”

김옥균에 대하여 서양인들이 찬탄하는 기록도 보인다. 동경 주재 영국 외교관 사토우(Ernest Satow)의 1882년 6월 12일 자 일기에 자못 흥미로운 기록이 보인다.
“김옥균, 서광범 그리고 탁정식(승려-옮긴이)과 저녁을 하다. 그들은 매우 서글서글하고 입담이 좋다. 내가 아는 어떤 일본인보다도 훨씬 더 개방적이다. 이태리 피에몬트인(Piedmontese: 보수적인 성격의 사람들로 유명-옮긴이)인과 개방적인 피렌체 사람이 대조적이듯이 그런 인상을 준다.
(To dinner Kim Okkyun, So Kuang pöm and Thak Chyöng-sik. They were very agreeable & talkative, much more open than any Japanese I have ever known, in fact produce the same impression that Piedmontese in relatn. to Florentin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