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자연관을 담은 담양 소쇄원(潭陽 瀟灑園)

  • 등록 2025.10.07 10:57:17
크게보기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소쇄원은 조선시대 중기 이땅에 성리학적 이상세계를 실현하고자 하였던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자신이 살았던 시대 전체를 성리학적 이상세계로 만드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하여 자신이 태어나 살던 한적한 시골 고향땅에 조그마한 이상세계를 실현하며 살아왔던 조선시대 한 성리학자 삶의 이상향 이었다.

 

소쇄원을 세웠던 양산보는 조선 중기 신진 사대부로 이름을 날렸던 조광조(趙光祖 1482~1519)가 신흥사림파를 대표하여 기존 세력인 훈구파와 다툼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모함으로 정읍으로 유배되고 결국 임금의 노여움을 풀지 못하고 사약을 받고 죽게됨에 따라, 조광조의 제자였던 양산보는 중상모략이 판치는 세상을 버리고 낙향하여 무등산 골짜기에 숨어살면서 맑은 계곡이 있는 이곳에 유유자적 자연인으로 살며 멋스럽게 살아온 자취를 후세에 그대로 남겨준 것이다.

 

소쇄원의 뜻은 '깨끗하고 시원한 정원'이란 뜻으로, 중국의 송나라시절 주자가 성리학적 이상세계를 꿈꾸며 무이산 계곡에 무이구곡을중심으로 무이정사를 짓고 은둔생활을 하였던 것을 본받아 자신도 주자와 같은 은둔한 삶을 살면서 성리학적 이상향을 실현하며 살고자 하였다.

 

소쇄원은 계곡을 중심으로 좌우 언덕에 복숭아나무, 배롱나무 등을 심고, 광풍각 앞으로 흐르는 계류와 폭포를 감상하기 위하여 자연석 석축을 쌓아 집터를 다듬고, 그 곳에 광풍각을 지어 사계적 폭포수를 감상할 수 있도폭 하였다. 이는 자연과 인공물이 서로 잘 어울려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속세를 벗어난 신선의 경지에 살고자 하였던 소쇄옹 양산보의 철학이 현세에 구현된 것으로 후대 시인 묵객들에게 알려져 많은 시와 방문기를 남겼다.

 

소쇄원은 후대 시인묵객들이 즐겨찾는 곳이기도 하였지만, 이 또한 임진왜란을 피하지 못하고 완전히 불타버리는 운명을 맞이하기도 하였고, 이후 오랜 세월 빈터로 남겨져 있던 것을 복원하여 오늘의 모습이 되었다. 지금은 한국의 정원을 알고자 하는 세계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찾는 바람에 그 멋을 느끼기 어려울 때도 많아, 유유자적하며 명상에 뻐져 자연을 느끼기 어려울 때도 있다.  그런데 기자가 찾은 날은 비가 온 날 이어서 인지 다행히 탐방객들이 많지 않아 소쇄원을 보고 느끼고 즐기기에는 더 없이 안성맞춤인 날이었다.

 

 

최우성 기자 cws0108@naver.com
Copyright @2013 우리문화신문 Corp. All rights reserved.

프로필 사진
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서울시 영등포구 영신로 32. 그린오피스텔 306호 | 대표전화 : 02-733-5027 | 팩스 : 02-733-5028 발행·편집인 : 김영조 | 언론사 등록번호 : 서울 아03923 등록일자 : 2015년 | 발행일자 : 2015년 10월 6일 | 사업자등록번호 : 163-10-00275 Copyright © 2013 우리문화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ine996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