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재상 황희의 유지가 깃든 사목리

2013.05.03 10:10:23

[파주문화통신 7]방촌 황희 선생의 사람 사랑

[얼레빗=권효숙 기자]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이곳에 흐르는 임진강은 하루 두 번 조류로 인해 물이 거슬러 흐릅니다. 이 물줄기를 따라 날아오는 갈매기를 벗 삼던 정자 반구정(伴鷗亭)이 임진강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이곳은 조선시대 명재상 방촌(厖村) 황희(黃喜)선생의 유지가 깃들어 있는 마을입니다. 

황희선생은 고려 공민왕 12(1363) 개성 가조리에서 태어나 조선조 태조. 정종. 태종. 세종까지 네 분의 임금을 모시고 74년간의 관직생활, 18년간 영의정을 지낸 후 87세에 은퇴하여 이곳에서 지내다 90세에 별세하여 파주 탄현면 금승리에 안장된 조선초기 최고의 명재상입니다. 

사목리에는 황희선생유적지가 잘 조성되어 있어 황희선생의 영당, 방촌기념관. 반구정, 앙지대, 황희선생의 고손인 월헌 황맹헌의 부조묘 월헌사와 재직사, 재실, 황희선생의 동상 등이 잘 관리되고 있습니다. 황희선생의 영당에는 황희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어 매년 선생의 탄생일인 음력 210일에 파주 유림들이 모여 제향을 올리고 있지요. 

   
▲ 반촌영당 제향 모습

또한 사목리에는 황희선생의 둘째 아들 보신(保身)의 후손들이 지금도 46호가 누대를 이어 살아오고 있습니다. 625전쟁 이전에는 100여 호가 살고 있었다고 하나 전쟁이후 외지로 나간 집들도 많고, 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본 집도 있어 많이 줄었다고 합니다. 

조선 초기 맹사성과 함께 대표적인 청백리 재상으로 많은 이들의 존경과 흠모를 받던 방촌 황희 선생의 수많은 일화 중 사람에 대한 평등사상과 관련하여 몇 가지 이야기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어느 과거급제자의 비밀 

황희 선생이 참찬으로 있을 때 황해도에서 10살 된 어린 노비를 데려다가 자제들의 글방 심부름을 맡겼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글방에서 들려오는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면 금새 외워 틀리지 않고 줄줄 외우고 다녔습니다. 이를 본 황희 선생은 그 아이의 어머니를 불러 노비 신분을 없애주고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 말하지 말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옮겨 가 살도록 하라. 학문이 있는 사람을 찾아 몸을 의지하고 아이를 부지런히 공부시키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이곳에 찾아오지 마라.”

어린 노비는 그 후 학문에 정진해 과거를 보러 오게 되었는데 마침 그곳에 황희 선생이 시험관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노비는 반갑고 고마운 마음에 황희 선생에게 다가가 자신을 밝히고 인사를 하였으나 그를 알아본 황희 선생은 시험관에게 잘 보이려고 인사를 하는 것은 받아줄 수 없다.”하였습니다.  

다행히 시험에 합격한 그 젊은 선비를 황희 선생은 따로 불러 거듭 당부를 하였습니다. “ 다시는 나를 아는 체 하지 마라. 나도 너를 잊었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정진해서 오로지 나라를 위한 일에 노력을 다하여라.” 하고는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 황희 선생이 갈매기를 벗 삼던 정자 반구정(伴鷗亭)


종도 하늘이 낸 사람 

황희 선생은 집에 있는 종들을 항상 너그럽게 대하여 여종이 사내종과 어울려 지나치게 장난하는 것을 보고도 그저 웃으며 보아 넘기고 했는데 평소에 늘 이렇게 말했답니다. 

집에서 부리는 노복도 역시 하늘이 보낸 사람인데 어찌 무리하게 부리겠는가?” 그리고 유서까지 만들어 자손들에게 자신의 뜻을 그대로 실천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하루는 당대 명필 중 한 사람인 이석형이 황희의 집에 들러 담소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황희가 책 한 권을 꺼내 놓고 새로 표지를 만들었으니 제목을 써 달라고 부탁했지요. 이석형이 정중하게 책 표지에 제목을 써 주었는데, 조금 뒤 한 어린 아이가 방에 들어와 놀다가 방금 이석형이 제목을 써 준 책 위에 오줌을 싸고 말았습니다.  

이를 본 황희 선생은 노여운 기색도 없이 아랫사람을 부르지도 않고 직접 방바닥과 책에 묻은 오줌을 닦았습니다. 그러고는 아이의 옷을 벗겨 둘둘 말아 아이의 손에 쥐어 주면서 괜찮다. 괜찮아. 이제 엄마한테 가서 옷을 갈아 입혀 달라고 해라.” 이렇게 우는 아이를 달래서 내보낸 뒤 황희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이석형에게 사과를 했습니다. 

조금 있으니 방문 밖에서 그 아이의 어머니인 여종이 황망한 목소리로 죄를 빌었습니다. 황희는 사죄하는 여종에게 오히려 따뜻한 말투로 철없는 아이가 한 일이니 신경 쓰지 마라.” 하고 말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이석형은 황희에 대한 존경심이 더욱 깊어져서 그의 앞에서는 항상 머리를 숙이고 예를 다했다고 합니다.
 

   
▲ 반촌 황희 선생 영당

노비들에게 출산 휴가를 주라 

1434년 세종 임금은 서울과 지방의 노비에게 출산이 임박한 달과 산후 100일 안에 부역을 시키지 말도록 일찍이 입법하였거니와, 그 남편에게도 휴가를 주니, 지금 부역 중인 사람의 처가 출산하면 그 남편은 만 30일 후에 부역에 종사하게 하라.”는 내용의 교서를 내렸습니다. , 노비들에게 출산 전과 후 총 130일을 휴가로 주며 그 남편에게도 만 30일을 휴가로 준다는 내용입니다. 

15세기에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선진적인 정책이 나왔다는 것은 세종을 비롯하여 그를 보좌하는 명재상 황희가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백성의 어려움을 살피려고 노력했고 그 밑바탕에는 평등한 인본 사상이 있었다는 것을 위의 일화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황희는 태종과 세종이 가장 신임하는 재상으로 당대의 왕권 강화와 국정의 안정에 크게 이바지했고, 청렴한 명신으로 청백리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6조의 판서를 모두 역임하고, 6년간을 좌우의정으로 재직하였으며, 19년간을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영의정으로 지냈습니다. 

이러한 동안 그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국정 전반에 걸쳐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천첩소생의 천역 면제 정책 등에서 특히 모든 백성에 대한 평등과 애민정신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방촌 황희 선생은 파주의 반구정과 문경의 숙정사에 영정이 봉안되어 있으며, 상주의 옥동서원, 장수의 창계서원, 남원의 풍계서원 등에서도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 황희 선생의 62살 때 영정

   
▲ 황희 선생 무덤
 

 ** 권효숙 :

   
 
고양시 공릉천 주변 신원리 장뜰에서 태어나 공릉천에서 물장구 치며 자라던 수줍던 한 소녀가 있었답니다. 그 소녀는 서울로 이사를 가 서울에서 학업을 마치고 넓은 세상을 알고자 기자생활을 했습니다. 그러고는 경실련이라는 시민단체 여성최초 사무국장을 하며 세상을 변화하고자 노력을 했지요. 그 여성은 역사에도 관심이 많아 두레문화기행이라는 시민단체에서 간사로 활동하며 전국을 누비고 다니더니 결국 대학원에 진학해 역사를 전공합니다.  

고향에서 고양시사편찬위원회의 연구원으로 <고양시사> 7권을 편찬하는 작업에 참여하고, 이어서 파주로 들어가 살게 되면서 <파주시지> 9권을 편찬하는데 연구원으로 참여합니다. 현재 파주문화원 부설 파주향토문화연구소에서 책임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고 경기도 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경기도문화관광해설사. 자운서원 부설 율곡전통문화학교 교사, 파주문화학교 한국사 강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 국민이 두려워한다는 중학생 아들의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권효숙 기자 jeenine@egre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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