뺏고 빼앗기던 전략적 요충지 덕진산성

2013.05.10 09:57:15

[파주문화통신8] 민통선 내 고구려 석축성을 찾다

 [그린경제=권효숙 기자덕진산성을 찾아가기로 한 그날은 개성공단에서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7명의 직원들이 들어온다던 날이었다. 통일대교 남단 검문소에는 수많은 취재진들이 카메라와 방송 장비를 펼쳐놓고 북쪽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검문소 한쪽 도로에는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된 접경지역의 현장을 보기 위하여 세계 각국의 관광객을 태운 관광버스가 줄을 서있었다. 

파주시 군내면 정자리 산 13번지. 덕진산성에 오르는 길은 자동차가 갈 수 있도록 길이 잘 나있었다. 반은 포장, 반은 비포장이라 덜커덩거리며 낮은 구릉 꼭대기에 이르렀다. 시도기념물로 지정되어서인지 주차장도 안내판도 잘 정비되어 있다.   

   
   ▲ 덕진산성 안내판

해발 85미터. 높지 않으나 꼭대기에 서니 가슴이 탁 트인다. 눈맛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불어오는 바람도 이를 데 없이 상쾌하여 폐 속을 정화시켜주는 듯 하다. 이렇게 발 아래 펼쳐지는 임진강 하구의 장면은 평화롭기 그지없는데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뺏고 뺏기면서 수많은 전투를 치러낸 곳이라 하니 아이러니 하다.  

   
▲ 초평도로 인해 갈라져 흐르던 임진강이 다시 합쳐서 흐른다. 멀리 통일대교가 보인다.

임진강은 함경남도 마식령 산맥의 두류산에서 발원하여 강원도 이천을 지나 북한지역인 철원에서 평안천, 역곡천과 합쳐서 휴전선을 지나고 연천에서 한탄강과 만나 파주 파평의 늘노천, 문산천, 공릉천과 합쳐져 교하(交河)에서 한강과 만나 서해로 나아간다.

총 길이는 272, 파주구간은 약 75정도이다. 임진강은 삼국시대에는 칠중하. 표하, 호로하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웠는데 이는 임진강이 구불구불 뱀이 가는 형상을 나타낸 것이다. 고구려의 진임성(津臨城)이 신라 경덕왕 때 임진(臨津)’으로 바뀌어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6.25전쟁 이전까지는 농산물의 집산지였던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까지 배가 다녔으며, 물길이 깊어질 때는 소형 선박이 북한지역의 철원 중북부 일대인 안협까지 운항되었다.

일제강점기의 고랑포에는 당시 유명했던 화신백화점의 분점이 있을 정도로 고랑포는 번화했던 유통의 중심지였다. 

고랑포에서 물길 따라 하구쪽으로 내려오다보면 강물이 두 갈래로 흐르면서 가운데에 모래와 흙이 쌓여 만들어진 섬 초평도가 있다. 50여만평의 큰 섬이다. 60년 동안 사람의 접근이 금지되어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섬, 새와 동식물의 낙원, 그러나 예전에 박격포 사격장이었던 탓에 불발탄과 강물에 떠내려온 유실된 지뢰로 인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  

   
▲ 1930년대 고랑포구 하구

 

   
▲ 초평도를 가운데 두고 임진강이 양쪽으로 갈라져 흐른다.

이 지역은 동쪽에 임진나루, 서쪽에 수내나루가 있고 초평도를 통해 비교적 쉽게 임진강의 도하가 가능해서 남쪽으로부터 오는 적의 도강을 막기 위해서 일찍부터 성을 축조해왔던 곳이다. 강을 사이에 두고 초평도 남쪽에는 장산돈대가, 북쪽엔 덕진산성이 수축되었다.  

1500여년 전 이곳에 석축 성을 처음 쌓은 것은 고구려였다. 덕진산성은 인근의 임진강변에 위치한 호로고루성, 당포성, 은대리성, 무등리보루 등과 함께 임진강의 북안에 설치된 고구려의 중요한 방어 시설이었다.  

그 후 통일신라가 산성을 점령한 후 남쪽으로 이어진 봉우리까지 석성을 쌓았고 이후 수백년간 방치 되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겪었던 광해군이 왜란을 대비하기 위해 이 곳에 산성을 수축하고 동북쪽으로 외성(外城)을 쌓았다. 이후 산성은 다시 방치가 되어 허물어져 갔다.

   
▲ 석축을 쌓았던 흔적

오랫동안 버려졌던 덕진산성은 1994년 육군박물관에서 처음 조사되어 세상으로 나왔다.

그리고 지난해 826~11163개월간 ()중부고고학연구소가 다시 발굴조사에 착수했다. 이 조사에서는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토기편과 도기편, 기와편, 자기편과 철제유물 볏(논밭을 가는 보습 위에 대어 흙이 한쪽으로 떨어지게 하는 쇳조각) 등이 출토됐다. 내성에서는 나뭇잎무늬를 찍은 수막새 기와가, 외성에서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기와편들이 출토되었고 볏은 20~30크기의 2점이 발견되어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된다.   

해발 85미터의 낮은 구릉을 감싼 덕진산성의 지형은 표주박처럼 중간이 오목하게 들어간 형태이다. 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쌓여져 전체 둘레가 1384m이고 내성은 600m의 석축산성이다. 가운데 우물터가 있고 남쪽 봉우리에 덕진단으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남아있다. 마을주민들은 이 자리에 성황당이 있었다고도 했다.

외성에는 두개의 문이 있던 곳이 완연하게 남아있고 성가퀴(성위에 낮게 담을 쌓아 몸을 숨겨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는 곳)로 추정되는 부분이 두 군데 있다. 외성과 내성 사이는 완만하게 경사를 이루며 강변으로 연결되어 배를 댈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 발굴작업 현장

   
▲ 발굴작업 시 발견된 기와조각들

 

지금 발굴조사가 다시 중지되어 있어 발굴현장에는 비닐이 덮여져 있다. 이후 다시 조사가 진행될 예정이나 언제가 될지는 알 수가 없다.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이 지역을 오히려 평화를 기원하는 상징적인 장소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서 덕진산성을 내려와 인근의 허준 묘로 발길을 돌렸다.

 

   
▲ 발굴작업 중 비닐로 석축을 덮어놓았다

[그린경제/한국문화신문 얼레빗=권효숙 기자]


**
권효숙 :  

   
 
고향에서 고양시사편찬위원회의 연구원으로 <고양시사> 7권을 편찬하는 작업에 참여하고, 이어서 파주로 들어가 살게 되면서 <파주시지> 9권을 편찬하는데 연구원으로 참여합니다. 현재 파주문화원 부설 파주향토문화연구소에서 책임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고, 경기도 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경기도문화관광해설사. 자운서원 부설 율곡전통문화학교 교사, 파주문화학교 한국사 강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파주에 뼈를 묻을 것이기에 무한한 애정과 열정으로 숨겨져왔던 흥미진진한 파주이야기를 여기에서 하나하나 풀어나갈 것입니다.  

 

권효숙 기자 jeenine@hanmail.net
Copyright @2013 우리문화신문 Corp. All rights reserved.


서울시 영등포구 영신로 32. 그린오피스텔 306호 | 대표전화 : 02-733-5027 | 팩스 : 02-733-5028 발행·편집인 : 김영조 | 언론사 등록번호 : 서울 아03923 등록일자 : 2015년 | 발행일자 : 2015년 10월 6일 | 사업자등록번호 : 163-10-00275 Copyright © 2013 우리문화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ine996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