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신하를 존중하는 군주였다

2013.05.28 08:28:53

[실록으로 배우는 소통 4]

[그린경제=김기섭 기자] 경복궁의 이궁인 창덕궁이 완성된 것은 태종 5년 때의 일입니다. 이때만 해도 아직 궁궐로서의 규모는 갖추지 못한 상태입니다. 주요 시설들이 다 들어서지 못한 탓입니다. 이듬해 태종은 창덕궁 동북쪽 모퉁이에 정자를 짓고, 해온정(解慍亭)이란 이름을 붙입니다. 이 정자는 태종이 재임하는 동안 다목적 공간으로 쓰이는데, 초기에는 명나라 사신을 위한 연회 장소로, 나중에는 종친을 위한 연회의 단골장소로 자주 이용됩니다. 잔치뿐만이 아니라 종친들과 함께 활쏘기나 격구를 구경하고, 이곳에서 삼군의 군사동원 태세를 점검하기도 합니다.

 다목적 공간으로 활용된 해온정

또한 이곳은 외척인 민무휼·민무회 형제를 제거하는 논의의 장소로 이용되기도 합니다. 태종 16년, 의정부·공신·육조·대간에서 두 사람의 죄를 청하는 상소를 쏟아내자, 태종은 밤에 유사눌을 해온정으로 부릅니다. “민무구와 민무질은 이미 벌을 받았고, 민무휼과 민무회도 죄에 걸렸다. 민씨(閔氏)의 네 아들을 잇달아 죽이는 일은 차마 할 수가 없다.” 태종은 민무구와 민무질에 이어 나머지 동생까지 죽이는 것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밝힙니다.

그러자 유사눌은 불충(不忠)한 마음을 가지고 종지(宗支), 즉 나머지 대군들을 죽이려 한 이들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며 왕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만약 전하께서 이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역사책에 우유부단한 임금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이 일을 어찌 감당하려 하십니까?” 이미 영의정인 성석린조차 이들을 죽이는데 찬성한 상태입니다. 태종은 이틀 동안 생각해보았지만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고 털어놓습니다.

 

   
▲ 창덕궁 전경(문화재청 제공)

그러자 유사눌은 기다려줄 여유가 없다며 자진보다는 사사(賜死)하기를 청합니다. 이 날의 논의는 민무휼·민무회 형제의 운명을 가르는 날이 되고 맙니다. 결국 태종은 두 사람을 원주, 청주로 각각 유배를 보냅니다. 하지만 이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법을 택합니다.  

그 이후로도 해온정은 《주역》과 《춘추》 등을 강론하는 경연장소로, 가뭄이 들었을 때에는 왕의 기도 장소로 쓰입니다. 경복궁의 경회루가 완성된 뒤부터 연회의 장소가 경회루로 바뀌지만 그래도 해온정은 태종이 애용하는 장소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태종 14년 해온정은 신독정(愼獨亭)으로 이름이 바뀌는데, 이는 고려 말의 정자 이름과 똑같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훗날 세조에 의해 또다시 변경되지만, 해온정이란 이름에는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전해 옵니다.

태종은 정자를 짓고 나서 지신사 황희를 시켜 권근에게 가서 이름을 받아오라고 명합니다. 권근은 공신이면서 성리학에 조예가 깊은 당대 문장가 중 한 사람입니다. 권근이 지은 정자 이름은 청녕(淸寧)입니다. 하늘은 맑고 땅은 편하다[天淸地寧]는 뜻에서 두 자를 취한 것입니다. 그러나 왕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적당하지 않다며, 자신이 고안한 이름을 제시합니다. “해온(解慍)으로 고치려고 하는데 어떠한가?” 해온이란 화나 분노를 풀거나 씻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좌우에 있던 신하들이 입을 모아 “매우 좋습니다”라고 호응을 하자 왕은 웃으면서 “임금이 말을 내면 신하들이 반드시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추켜세운다.”며 권근과 다시 의논하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권근의 집으로 보냅니다. 왕이 제안한 이름을 받아든 권근은 좋다는 뜻을 표시합니다. 해온정이란 이름은 이렇게 하여 확정됩니다.

이 일화는 권근에 대한 태종의 믿음과 마음 씀씀이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태종은 자신이 제안한 정자 이름으로 결정해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없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굳이 권근에게 다시 보여 동의를 받는 절차를 밟은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름을 지어보라고 명했으니 의리 차원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도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권한을 위임했던 신하에 대한 예의, 신하의 의사에 대한 존중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요?

섬세한 배려와 베품은 소통의 기본조건

한편, 권근은 이 점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실록에는 그의 반응이 나오지 않습니다만 모른 긴해도 자신의 동의를 구하는 왕에 대해 무한한 신뢰와 애정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요? 비록 의견이 채택되지 않았지만 자신의 뜻을 존중하는 왕의 태도에서 적잖은 감동을 받았을 겁니다.

고려 말 때 권근은 누명을 쓰고 청주 옥에 갇힌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큰 비가 내려 감옥으로 물이 거침없이 밀려들어왔습니다. 다른 죄수들은 살기 위해 높은 나뭇가지에 오르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권근만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태연하게 앉아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만약 죄가 있으면 마땅히 천벌을 받을 것이고, 만약 죄가 없으면 하늘이 어찌 나를 물에 빠져 죽게 하겠느냐?”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도 초연했던 권근이지만 태종의 이 같은 섬세한 배려에는 울림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권근은 58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습니다. 그러나 태종은 권근이 병들어 누운 날부터 약을 하사하고 문병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죽자 후하게 장사를 지내주고, 직접 세자를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합니다.

지금까지 태종에 대한 평가는 왕권 강화를 위해 외척을 인정사정없이 죽인 냉혈 군주라는 부정적 인식이 강합니다. 그 덕분에 세종의 성세가 가능했다는 이야기도 합니다만, 그렇게 태종을 판단하기에 앞서 신하를 존중하는 소통 정신에서 그의 진면목을 찾아보는 것도 필요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비록 해온정과 같은 사례는 작은 예에 속하지만 태종실록에는 호생군주로서 태종의 면모를 여럿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소통은 성과를 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보여주는 섬세한 배려와 베품이 없고는 그 또한 불가능한 일일 겁니다.

 
 
** 김기섭(세종연구가/한국형리더십교육센터 대표)

세종대왕의 능(영릉)이 있는 여주에서 태어나, 경희대 대학원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고 세종의 의사결정 연구로 학위를 받았습니다. 오래 전부터 일선 학교와 교육청에서 교육토론과 고전읽기지도법을 강의하고,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며 한국적 회의와 소통문화, 한국형 토론과 리더십을 개발하고 보급하는데 온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김기섭 기자 youlight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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