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창과 홍랑, 사랑과 문학

2013.07.17 07:12:01

[파주문화통신 18]

[그린경제=권효숙기자]

“묏 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자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 닙 곳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산에 있는 버들가지를 골라 꺾어 임에게 보내오니,
주무시는 방의 창문가에 심어두고 보십시오.
행여 밤비에 새 잎이라도 나거든 마치 나를 본 것처럼 여기소서.)
 

   
▲ 고죽 최경창의 무덤

연시(戀詩)를 읽으면 누구나 마음이 달달해진다. 요즘엔 문자메세지나 전화통화로 연인들이 마음을 전하지만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밤에 조용히 음악을 틀어놓고 편지를 쓰며 연인을 생각하곤 했다. 

위의 시는 홍랑이라는 관기가 부임해온 최경창이라는 젊은 관리를 사모하다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자 배웅 나왔다가 작별하고 돌아가는 길에 지어 최경창에게 보낸 시이다.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임에게 바치는 순정은 묏버들처럼 항상 님의 곁에 있겠다고 다짐하며 연정가를 보낸 것이다.
 

최경창은...

조선 중기, 시를 멋지게 잘 쓰는 젊은 관리가 있었다.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 1539,중종34 ~ 1583, 선조16)은 평안 병마절도사 수인(守仁)의 아들로 전라도 영암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가운(嘉運)이고 호는 고죽(孤竹)이다. 

   
▲ 최경창의 비석(왼쪽)과 시비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나 박순(朴淳)의 문인이며, 백광훈(白光勳)과 함께 이후백(李後白), 양응정(梁應鼎)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또한 당시(唐詩)에 뛰어나 옥봉 백광훈(玉峰 白光勳), 손곡 이달(蓀谷 李達)과 함께 3당(三唐)시인으로 불렸다.  

1568년(선조 1) 증광문과을과로 급제하여 북평사가 되고, 예조. 병조의 원외랑(員外郞)을 거쳐 1575년에 사간원 정원에 올랐다. 1576년 영광군수로 좌천 되었는데 뜻밖의 외직을 받게 되어 관직에 뜻을 잃고 사직 하였다, 다음해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으로 복직하였다.  

1582년 선조가 종성부사로 두 계급을 올려 벼슬을 주었으나, 이를 시기한 북평사의 무고한 참소가 있어 말썽이 되자 대간에서는 갑작스러운 승진을 문제 삼았다. 그 일로 다시 성균관 직강직의 명을 받고 상경하는 도중에 종성 객관에서 45세의 나이로 객사하였다.  

학문과 문장에 능하여 당대의 문인이었던 율곡 이이(栗谷 李珥), 구봉 송익필(龜峯 宋翼弼), 최립(崔笠) 등과 무이동(武夷洞)에서 시를 짓고 서로 주고받았으며, 또한 송강 정철(松江 鄭澈), 서익(徐益)등과 삼청동에서 교류하면서, 조선 중기 8문장으로 불리고 서화에도 뛰어난 재질이 있었다.  

음악에도 뛰어나 피리를 잘 불었다고 하며, 영암 해변에 살 때 왜구를 만났으나, 퉁소를 구슬피 불어 왜놈들을 향수에 젖게 하여 위기를 모면했다는 일화가 있다. 숙종 때 청백리에 녹선 될 만큼 청렴 했던 최경창은,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강진의 서봉서원(瑞峯書院)에 모셔져 있으며, 최경창의 증손이 1683년 펴낸 저서 <고죽집>에는 홍랑의 시 ‘못 버들 가려 꺾어...’와 이 시를 최경창이 한역한 번방곡(飜方曲)을 비롯하여 236편의 시가 실려 있다.

 
홍랑은...

홍랑은 최경창이 북도평사로 경성에 가 있을 때 홍원의 관기였다. 최경창이 경성에 부임했을 때 연회 자리에서 처음 만나, 최경창의 시를 읊은 것이 인연이 되었다. 홍랑은 그해 겨우내 최경창의 막중(幕中)에 같이 있게 되었다. 
 

   
▲ 최경창 무덤 앞 홍랑 무덤(왼쪽)과 비석

최경창이 이듬해 봄 서울로 돌아가고 그 뒤 서로 소식이 끊겼다가, 1575년(선조 8)에 최경창이 병이 들어 봄부터 겨울까지 병석에 누워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날로 집을 떠나 7일 만에 서울에 와서 병을 간호하였다.  

그 일로 최경창은 파직되고 만다. 병석에 누운 연인을 걱정해서 찾아 왔던 홍랑의 행동이 최경창을 파직으로 까지 몰고 간 것은, 그때의 시대 상황에 있었다. 그 때는 ‘양계의 금’이 있었고, 국상 때였다. ‘양계의 금’이란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들의 도성 출입을 제한하는 제도를 말한다.  

양계는 중국과 접경한 변방지역인데,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이 지역을 번성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양계인 들이 그 지역을 떠나 밖으로 나가는 것을 엄격하게 막았던 것이다.  

그리고 최경창과 홍랑이 같이 있던 때는 명종 비 인순왕후가 죽은 지 1년이 채 안된 국상기간이었다. 이런 일들을 빌미로 최경창을 시기하던 이들에 의해 결국 최경창은 파직 당하게 되었고, 홍랑도 이듬해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눈물로 홍랑을 떠나보내며 최경창은 ‘송별(送別)’ 이란 제목으로 두 편의 한시를 지어 주었다.  

“말없이 유란(幽蘭)을 주노라
오늘 하늘 끝으로 떠나고 나면 언제 돌아오랴
함관령의 옛 노래를 부르지 말라
지금까지도 비구름에 청산이 어둡나니
옥 같은 뺨에 두 줄기 눈물 흘리며 봉성을 나서는데
새벽 꾀꼬리 한없이 우는 것은 이별의 정 때문이네
비단 적삼에 명마를 타고 하관 밖에서
풀빛 아스라한데 홀로 가는 것을 전송 하네“

 

   
▲ 고죽 최경창의 송별시와 홍랑의 시

고향으로 되돌아간 홍랑은 7년 후 1583년(선조 16) 최경창이 죽자 경성에서 파주로 와 스스로 얼굴을 지저분하게 하고 그의 무덤을 지켰다. 임진왜란 때는 최경창의 시를 쓴 원고를 등에 짊어지고 피난을 다녀서 최경창의 주옥같은 시들을 구했다.  

홍랑은 죽을 때 “나를 임 곁에 묻어 주오” 라는 유언을 남겼고, 해주최씨 가문에서는 그녀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기리어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 아래 무덤을 만들어 주고, 지금까지도 해마다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그들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은 ‘최 즙’이라고 한다. 

이 같은 사실은 조선 중기의 학자 남학명(南學鳴 1654~?)의 문집 ‘회은집’에 기록되어 후세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현재 파주시 다율동의 해주 최씨 선산에 있는 이 홍랑의 묘에도 후손들은 시제 때가 되면 음식을 차려 놓고 제를 올려준다. 그러나 축문을 읽지 않고 술도 한잔 만 올리며, 종손이 아닌 후손 중 한 사람이 올린다. 

최경창과 홍랑의 묘로 올라가는 입구에는 최경창이 홍랑의 시를 한역한 번방곡 비석이 세워져 있다. 

번방곡(飜方曲) 

절양류기여천리 인위아시향정전(折楊柳寄與千里 人爲我試向庭前)
수지일야신생엽 추췌수미시강신 (須知一夜新生葉 椎悴愁 眉是姜身)
 

이들의 묘는 원래 파주 월롱면 영태리에 있었다가 군용지가 되어 이곳으로 옮겨왔는데 이곳도 앞에 큰 도로가 생길 예정이라 다른 곳으로 이장을 해야 할 처지이다. [그린경제/한국문화신문 얼레빗=권효숙 기자]
 

권효숙 기자 jeenin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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