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우리나라 사람이 몰래 담배(南靈草)를 심양(瀋陽)에 들여보냈다가 청나라 장수에게 발각되어 크게 힐책을 당하였다. (중간 줄임) 이 풀은 병진년(1616)부터 바다를 건너 들어와 피우는 자가 있었으나 많지 않았는데, 신유년(1621) 이래로는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어 손님을 대하면 차와 술 대신에 담배를 대접하기 때문에 혹은 연다(煙茶)라고 하고 혹은 연주(煙酒)라고도 하였고, 심지어는 종자를 받아서 서로 교역(交易)까지 하였다. 오래 피운 자가 유해무익한 것을 알고 끊으려고 하여도 끝내 끊지 못하니, 세상에서 요망한 풀이라고 일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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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쉴 때 피우는 한 모금> 이교익, 국립중앙박물관 |
위는 《인조실록》16년(1638) 8월 4일 치 기록입니다. 조선 사람이 몰래 심양에 담배를 보냈다가 청나라 장수에게 들켜 크게 꾸중을 들었으며 “요망한 풀”이라 한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보면 담배가 1946년 일본에서 들어온 것으로 나오지요. 조선 후기의 학자 한치윤(韓致奫, 1765~1814)이 “어린애 티를 벗기만 하면 으레 담뱃대를 문다. 세상에서 하는 말인즉 ‘팔진미는 안 먹어도 담배만은 끊을 수 없다.’고 한 것을 보면 지금보다 더 담배 인기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당시 담배는 돈을 버는 작물로 가장 인기가 있었습니다. 곡식을 심는 것보다 이문이 곱절이나 많이 생기기 때문에 좋은 경작지가 거지반 담배를 심는데 들어가 담배를 심지 못하게 금지하기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특히 그 품질이 뛰어난 평안도와 황해도의 서초(西草)는 값이 월등히 비싸 그 정도가 심했지요. 당시에도 오래 피우면 왕왕 간이 상하고 눈을 어둡게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담배는 마약처럼 끊을 수 없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갑오년 새해부터 금연을 꿈꾸는 분들은 작심삼일로 돌아 가지 않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