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2.8 독립선언 95주년 도쿄에서 기념식 열려

2014.02.08 08:08:22

오전 11시 도쿄 한국YMCA 서 기념식 연다

[그린경제/얼레빗 = 이한꽃 기자]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은 우리 이천만 겨레를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와 승리를 얻은 세계 여러 나라 앞에 우리가 독립할 것임을 선언하노라.”

 오늘은 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에서 독립선언서를 전 세계에 당당히 알린 날이다. 그날의 함성으로부터 어느새 95주년의 세월이 흘렀다. 해마다 이곳에서는 재일본 한국YMCA와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의 공동주최로 ‘2.8 독립기념식’을 열고 있는데 올해도 오전 11시 한국YMCA 지하홀(재일 한국문화관)에서 열린다.

     
 
   
▲ 도쿄 2.8독립선언 기념식 (재일본한국 YMCA 자료사진)

 기념식이 열리는 재일본 한국YMCA 건물 입구에는 2.8 독립선언 돌 기념비가 서있다. 2·8 독립선언(二八獨立宣言) 기념비는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 재일 유학생이 중심이 되어 적지나 다름없는 땅에서 불굴의 의지를 만천하에 선포한 장한 행동을 기리고자 1982년 세웠다. 동경 유학생들이 주축으로 일어난 2.8 독립선언 선포식은 삽시간에 절망에 빠져있는 고국에 전해졌고 급기야 3.1운동의 활화산을 뿜어내게 한 원동력이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 2.8 독립선언서 전문 ⓒ 재일본 한국YMCA

 1919년 1월 유학생들은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를 중심으로 동경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대회를 열었다. 이때 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결의하고, 실행위원으로 최팔용·김도연·백관수 등 11명을 뽑았으며 실행위원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고 <민족대회 소집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2월 8일 선언서와 청원서를 각국 대사관, 공사관과 일본정부, 일본국회 등에 발송한 다음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대회를 열어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을 일본 경찰이 얌전히 봐줄 상황이 아니었다. 이들은 가차 없이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는 고통을 당해야 했으며 국외로 파견한 2명을 뺀 9명의 실행위원을 포함 27명의 유학생이 검거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 2.8 독립선언 당시 동경아사히신문 (東京朝日新聞) 1919년 2월 9일치 내용(왼쪽) 선언 직후 검거된 조선 유학생을 무료 변론해준 후세 변호사 ⓒ 재일본 한국YMCA

실행위원 전원이 검거되는 상황 속에서도 2.8 독립선언은 그 위력을 발휘하여 당일 체포되지 않은 참가자들이 조선에 잠입하여 3.1 독립선언 준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의 3.1 독립운동은 같은 처지에 있는 중국인들의 가슴에도 불을 질러 5.4운동에까지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동경 유학생이 중심이 된 '2·8 독립선언서'는 '3·1 독립선언서'보다 훨씬 강경하게 일제의 침략을 고발하고 독립을 위하여 최후의 일인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따라서 2.8 독립선언은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인 3.1 독립선언을 이끌어낸 위대한 실천이며 민족 자주의 초석인 것이다.

 또 이 선언은 일제에 대항하여 그들의 심장부인 동경에서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을 외치고 일제가 불법으로 조선을 침략, 강제 병합하여 우리 민족의 신성한 역사적 전통과 위엄을 파괴한 죄악상을 폭로하는 한편 민족의 생존을 위해 자유의 행동을 취함으로써 독립을 달성할 것을 세계만방에 외친 우국충정에 불타는 우리 젊은 청년들의 정의로운 외침이었으며 절규였다.

 이러한 중요한 역사적 선언이 외쳐진 장소가 바로 재일본 한국YMCA 건물이다. 하지만, 그 역사적 건물은 1923년 관동대지진 때 불타 없어졌다. 유감스럽게도 현재 동경YMCA 건물은 원래 터에 세워진 게 아니다. 2.8독립선언이 있던 역사적인 건물 터엔 지금은 세탁소 건물이 들어서 있다.

   
 ▲ 2.8 독립선언 현장인 1919년 당시의 재일본 한국YMCA (왼쪽), 이 건물은 관동대지진 때 불타 없어졌고 그 터는 팔려나가 현재는 세탁소 등이 들어서 있다. (오른쪽) ⓒ 김영조
     
 

 옛 YMCA 건물 터는 현재 건물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500여 미터 아래쪽에 자리하고 있다. 2010년에 물어물어 세탁소 건물을 찾아갔을 때 아쉬웠던 것은 그 자리에 작은 표지석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2.8 독립선언과 함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인물이 있다. 다름 아닌 후세다츠지(布施辰治) 씨다. 1880년 미야자키 농촌에서 태어난 다츠지 씨는 변호사의 길을 걷기 이전인 18살의 어린 나이에 “높은 관직을 얻거나 유명인이 되기보다는 부를 구하지 않고 바른 일을 하면서 가난하게 사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상경하여 명치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할 만큼 고매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다.

 그가 조선유학생의 무료변론을 맡아 주지 않았다면 당시 검거되었던 조선 유학생들의 운명은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유학생들의 행동을 두고 일본경찰은 “내란음모죄”를 씌울 참이었는데 후세 변호사는 “유학생들이 자국의 독립을 위해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게 무슨 내란음모죄냐?”라고 반박하는 변론을 맡아 중죄를 면했다는 이야기는 뜻밖에 한국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다.

   
 ▲ 재일본 한국YMCA 10층에 마련된 2.8 독립선언 기념자료실 ⓒ 김영조

 많은 한국인이 국제도시 도쿄를 찾는다. 오늘 2.8 독립선언 95돌을 맞아 3.1 독립선언의 도화선이 되었던 함성의 현장을 찾아보는 일은 매우 뜻있는 일이다.

 내친 김에 지금 도쿄 한복판에서 (1월 29일~3월 30일) 열리고 있는 한국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화전에 들러 보면 좋을 것이다. 국난의 시기에 불굴의 의지를 발휘한 위대한 선열들의 실천적 삶 앞에 오늘 하루라도 옷깃을 여미는 하루가 되었으면 한다.

 

 

 

이한꽃 기자 59y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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