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수시절 녹봉 털어 백성 구휼…일제침략 땐 단식 순국

2014.03.04 10:29:10

[한국종가의 철학을 찾아서(21)] 향산 이만도 종가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흉년 들자 자신의 녹봉과 사창미 풀어 규제
경술국치 땐 단식 일경들이 미음 먹이려하자
"날 총으로 쏴서 죽여라" 호통 24일 만에 숨져
"愛民과 절개" 조선 선비의 기개 몸소 보여줘

   
▲ 안동댐 공사로 수몰되어 1976년 현재의 안동시 안막동으로 옮겨온 향산고택

얘 얘 이 책도 담아라. 단식원을 가려고 짐을 꾸리는 나에게 엄마는 향산 이만도라는 책을 찔러 넣어 주셨다. 나는 올해 스물여섯 살로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있으나 고질적인 아토피로 이 약 저 약을 쓰다 급기야 엄마 손에 이끌려 화순군에 있는 한 단식원에 내려가기로 한 것이다. (……) 아마도 엄마는 내가 밥을 먹지 못할 때 이분을 떠올리라고 책을 넣어 주신 것 같다. 새삼 엄마의 마음 씀에 눈가가 촉촉이 적셔옴을 느낀다. 단식은 죽음에 이르는 시일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다른 어떤 자결보다 고통스럽고 강한 의지가 필요할 것이라는 것을 이번 단식을 통해 깨달았다. 향산 이만도 애국지사의 강인한 저항정신이 절절이 몸에 와 닿았다.”  

이 글은 기자가 1만여 명의 독자들에게 누리편지로 보내는 한국문화편지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에 어떤 독자가 보내온 글이다. 아토피를 고치기 위해 1주일 단식 때 읽으라고 가방에 찔러 넣어준 책이 향산 (響山) 이만도(李晩燾, 1842~1910) 선생의 책이라는 독자의 글을 읽고 나는 내심 기뻤다. 일제 침략에 맞서 24일 동안 단식의 고통을 견디면서 숨져간 향산 이만도 선생을 아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우리나라가 일제에게 국권을 강탈당하고 강산이 유린되는 한말 풍운의 역사 속에서, 일제 침략에 항거하여 순국 자결한 인물들은 많다. 그 가운데 가장 우뚝 선 분을 들라하면 단연 향산 이만도 선생을 꼽아야만 한다. 

   
▲ 향산 이만도 선생 건국공로훈장증

나는 나라로부터 두터운 은혜를 입었는데 첫 번째 을미년에 죽지 못하였고, 다시 을사년에 죽지 못하고 산으로 들어가 구차하게 목숨을 연장한 것은 혹 쓰임이 있을까 해서였다. 이제 그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없으니 죽지 않고 살아서 무엇을 바라겠는가? 변란(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여러 날이 지났는데 아직 이렇게 결행이 지연되고 있는 것은 자진하는 방법을 찾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뜻이 정하여졌으니 장차 명동에서 죽고자 한다.” 순국을 결심한 뒤에 선생이 하신 말씀이다. 

1894(고종 31) 6월 개화당 정부가 성립되고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조선정부는 일본과 공수동맹을 체결하고, 자주 독립을 천명하였으며, 내정의 혁신을 단행하였다. 이 때 향산 선생은 이는 오로지 속 검은 왜놈들에게 우롱당하는 것이라 하여 즉시 그 불가함을 상소하였으나 이른바 개혁을 한다는 명분으로 신하의 상소를 막았던 때라 임금에게 전달되지는 않았다. 이듬해 8월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피살되자 상복을 입고 일월산 국사봉에 올라 한양을 향하여 통곡하였다.

그해 11월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에 추대되었으나 미처 대오가 정비되기 이전에 관군에게 안동의병진이 무너지고 의병을 해산하라는 왕명이 내려져 군사를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을 극형에 처하고 을사늑약을 철회하라는 상소를 올리고 고향을 떠나 산속을 옮겨 다녔다. 집에서 안주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다 19108월 경술국치의 변을 들은 선생은 청구촌율리(靑丘村栗里, 지금 예안면 인계동)에 있는 재종손 강흠의 초당을 찾아 단식을 결행하였다. 

   
▲ 을사오적을 극형에 처하고 을사늑약을 철회하라는 상소 '청참오적소'

선생의 문하생들이 자정 순국과정을 기록한 청구일기(靑邱日記)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을 준다. 단식기간 동안 가족과 친척은 물론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곁에서 애를 태웠다. 하지만, 선생은 단식 중에도 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고, 자손과 친척들에게 충성과 효도, 공경, 우애 등을 가르쳤다. 그리고 영영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지인들에게는 편지를 썼다.

단식을 시작한 지 21일만 인 95일 일제 경찰이 와서 강제로 미음을 먹이려 하자, 그는 나는 내 명()으로 죽을 것이다. 지금 너희들이 나를 속히 죽이고자 하느냐. 나를 속히 죽이고자 하면 즉시 총을 쏘아 죽여라.’고 소리치면서 가슴을 열어젖힌 채 고함을 질렀다. 선생은 나는 조선의 당당한 정2품 관료다. 어떤 놈이 감히 나를 회유하며, 어떤 놈이 감히 나를 공갈하고 협박하려 드느냐.’라고 일경(日警)들에게 호통을 쳤다.

단식 24일 만인 191098일 조선 선비의 기개를 지녔던 퇴계 11대손 향산 선생은 끝내 숨을 거뒀다. 선생의 순국은 나라는 망했어도 조선의 선비 정신은 조선의 소나무처럼 푸르게 살아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선생은 자신의 단식이 과장되어 전파되는 것을 몹시 경계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단식으로 일제에 항거한다는 소식은 당시 지식인들에게 큰 힘이 되었음은 물론 많은 백성이 선생의 단식 소식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겠다고 다짐할 정도였다. 하루에도 100여명의 사람들이 단식 중인 선생을 방문하였다. 

선생은 중앙조정에서 주로 언관(言官, 사간원사헌부 등 임금에게 간언하는 일을 맡은 관원)의 직책으로 10여 년 동안 일한 끝에 187611월 양산군수로 내려갔는데 이때 선정을 크게 베풀었다. 더욱이 그가 부임하던 해는 양산에 가뭄이 심하게 들어 많은 백성이 굶게 되자 스스로 검소한 식생활을 했고, 특히 기근이 심하던 마을에 직접 가서 백성을 위로했다.

그리고 관내 굶는 백성 1500여명에게 자신의 녹봉에서 내놓은 900냥에 부자들에게 거둔 2000냥을 나누어 주었고 사창미 500석을 풀어 이들을 구휼하였다. 또한 이듬해 5월에 폭우가 내려 낙동강변 70리 들판이 물에 잠겨 백 수십여 호의 이재민이 발생하자 관곡을 풀어 이들을 적극적으로 구제하였다. 

이러한 공적으로 선생에 대한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18779월 경상감사는 선생의 치적을 으뜸으로 보고하였으며 18783월에 어사 또한 향산의 치적이 가장 훌륭하다고 보고했다. 독립운동이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몸을 바친 것이라면 굶는 백성을 구제하는 것도 역시 같은 마음일 것이다. 자신의 출세와 안녕이 아니라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한 진정한 마음가짐의 선생은 결국 일제에 맞서 거룩한 순국을 택할 수밖에 없었음이리라. 향산 선생이야말로 이 시대에 본받아야할 진정한 충신이요, 거룩한 목민관임이 분명하다 

   
▲ 향산 이만도 현손 이부 선생

현손 이부(李滏) 선생을 만나러 서울 서초구 댁에 찾아갔다. 댁에는 향산 선생과 아들 이중업, 며느리 김락, 손자 이동흠의 훈장증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어렸을 때 향산 할아버님 자정순국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 독립운동에 관한 얘기는 전혀 듣지 못했지요. 향산 할아버지께서 자신의 단식을 두고 지나치게 높여 기리는 것을 경계했는데 이후 후손들에게 그 정신이 전해진 까닭일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현손 이부 선생은 직장생활을 하다가 정년 퇴직한 뒤 날마다 서예를 하면서 묵향 속에서 자신을 닦고 있었다. 대담 중에 향산 할아버님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는 겸손한 몸가짐이 엿보였으며 선조의 독립운동에 대한 부분에서는 자부심이 넘치는 모습에서 향산 종가에 대한 경외심이 크게 느껴졌다.

 


 며느리 김락 '항일운동' 명가 지킨 '여성 대장부'

3·1운동 참여했다 왜경에 고문 당해 두 눈 잃어
두 아들‧맏사위도 독립운동…친정도 투사 가문

"내 어머니가 31운동 때 일제 수비대에 끌려가 두 눈을 잃고 11년 동안 고생하다 돌아가셨으니 일제에 대한 적개심을 결코 버릴 수 없다." 일제가 쓴 고등경찰요사에는 위와 같은 향산 이만도 선생의 손자 이동흠이 말한 김락 애국지사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김락 여사는 향산 이만도 선생의 며느리로 독립운동에 직접 가담했으며 친정집 또한 독립투사 집안이다.

   
▲ 김락 애국지사 훈장증(건국훈장 애족장)
 

김락 여사는 3·1만세운동에 앞장섰을 뿐 아니라 시아버님인 향산 이만도 집안의 독립운동 3대를 지켜낸 중심인물이다. 열다섯 살에 안동 도산면 하계마을로 시집가서, 향산 이만도 선생의 맏며느리이자 이중업의 아내가 되었다. 1895년 시아버지는 예안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이 되었고, 남편도 마땅히 함께 나섰다. 48세 되던 1910, 나라가 망하자 시어른 향산 선생이 24일 단식 끝에 순국했다.  

장례를 치른 뒤 눈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아버지처럼 여기던 친정의 큰오라버니 김대락과 김동삼 등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만주로 독립운동 하러 떠났다. 큰 형부 이상룡(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집안도 함께 갔다. 그들은 나라를 찾는 고난의 길에 다 함께 한 것이다. 한편 남편 이중업은 1914년 안동과 봉화 장터에 격문을 돌렸고, 맏아들 이동흠은 대한광복회에 가담했다가 구속됐다.  

191931만세운동 당시 남편은 <파리장서>라 불리는 독립청원서를 발의했으며, 강원도와 경북 지방 유림 대표의 서명을 받는 일을 맡았다. 바로 이때 김락은 57세의 나이로 예안장터로 만세운동에 나섰다가 왜경에 붙잡혔고, 고문 끝에 두 눈을 잃었다. 그런 상황에서 독립청원서를 가지고 중국으로 떠나던 남편의 죽음을 만났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 남편 이중업 훈장증(왼쪽)과 아들 이동흠 훈장증

학봉 김성일 선생의 종손인 맏사위 김용환은 만주 독립군 기지를 지원하던 의용단에 가담했다가 일제에 붙잡혔다. 이후 김용환은 '조선 최대의 파락호' 소리를 들으며 노름꾼으로 위장해 독립자금을 댔다. 무려 100억 원이 넘는 종가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친 인물이다. 둘째 사위 류동저도 안동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둘째 아들 이종흠 역시 1925년 제2차 유림단 의거에 참여했다. 이와 같이 온 가족이 독립운동에 뛰어든 가운데 김락여사 자신도 독립운동하다 일제의 고문으로 두 눈이 멀어 11년의 고통스런 삶을 살았다.  

김락 여사가 시집와서 살던 35년 동안 시집과 친정 모두 독립운동의 한 복판에 서 있었고, 그 중심에서 자신 역시 독립의 굳은 의지를 지니며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정신을 지켰다. 김락 여사는 그러한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2001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안동에서는 그를 기리기 위한 인형극과 뮤지컬을 만들어 공연하고 있다.
 

 

김영조 기자 pine996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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